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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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배운대로 행동하는 아이들 (1)
"학교요?"
"네."
빅터주교의 대답에 일행은 각각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언뜻 이해가 되지 않기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빅터주교가 일행에게 모아놓고 설명했다.
"지금 여러분들은 수도원의 손님들입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체류에 브룬하르트 쪽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방법은 여러분들이 여기에 꼭 필요해서 남아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가장 확실한 방법이 학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사제들을 대피시켰다고 말씀 드렸을 겁니다. 당연히 학교의 교사를 맡을 사제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 공백을 케이와이단의 교사단이 대체하고 있으니, 여태껏 그럭저럭 잘 운영되어왔지요. 어차피 교사가 부족하니 그 핑계를 대면 여러분들의 장기체류도 설명이 될 겁니다."
"흥, 내가 있고 싶으면 있는 거지, 왜 이유를 만들어야되나?"
야크가 화를 냈다.
"그들은 여러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빅터주교의 말에 다들 수긍을 했다. 나다가 주교에게 물었다.
"주교님이 말하는 데가 교단에서 운영하는 평민학교 맞수?"
빅터 주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다는 턱을 만지며 말했다.
"음... 평민학교 나온 지가 꽤 돼서... 하긴, 리오야. 나두 예전에 교사 조금 했었거든?"
나다의 말에 주교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다님은 안됩니다. 나다님은 교사로 들어갈 수 없어요. 잡역부라면 몰라도."
"메, 메야?"
"나다님은 황인이잖습니까."
"으...윽..."
야크가 웃었다.
"야, 나다. 너 참 웃기는 놈이다. 전쟁터에서 시체나 뒤지는 놈이 평민학교도 나오고 교사를 한 적도 있어? 너 정체가 뭐야?"
"뭐긴 뭐야. 부랑자지. 흥! 이젠 잡역부가 될 것이고. 우윽."
주교가 앞장서서 모두 학교로 갔다. 도시의 거리는 마치 케이와이단 병사들의 군화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학교는 꽤 경치 좋은 곳에 위치했다. 벽돌은 빨간 벽돌, 층층이 둘러서 예쁘게 꽃들이 심겨져있다. 고풍스러운 건물에는 담쟁이들이 둘러져 있었다.
"환영합니다. 안 그래도 적은 수의 교사로 많은 수의 학생을 이끌어가다 보니 고충이 많았습니다. 정말 환영합니다."
대머리에다 키가 작은 교장이 연신 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학교의 정문도 그렇고, 교장실에도 커다랗게 [일하지 않는 자는 살 가치가 없다] 라는 표어가 매달려있었다. 교장은 표어를 바라보는 일행을 보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브룬하르트님의 명이라... 아참, 모든 과목이 다 일손이 부족한데 어떤 과목을 맡으실지."
"일반체육과목을 당분간 맡게될 시케사제입니다."
시케가 운동장에서 인사하자 남녀학생들이 절도있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학생들은 꼿꼿이 선채 다함께 구호를 말하듯 외쳤다. 시케는 당황했다.
"편하게 하지요, 여긴 군대가 아니에요."
운동장을 빗질하던 나다가 시케를 보았다. 간편한 체육복을 입은 모습이 멋지다.
"검술을 맡은 야크라고 한다. 그런데, 다 목검이야?"
야크의 불퉁한 말이다. 어린 학생들은 거대한 그의 몸집에 벌써부터 겁을 먹었다.
"진검으로 해야 실력이 느는 법이거늘. 이런 목검으로 무슨 어린애 장난하나? 흥."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서 수근거림이 들렸다. 귀밝은 야크가 놓칠 리가 없다.
'야, 외팔이잖아?'
'흥, 덩치크다고 주눅들거 없어.'
"야, 너."
유난히 비죽거리는 금발머리 학생을 야크가 지목하자, 그 학생은 삐딱하게 그를 꼬나보았다.
"검 들고 와봐. 대련이다."
금발머리는 기죽지 않고 목검을 들고 나왔다.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야크는 자기 주위에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날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게 하면 넌 다음부터 수업에 안나와도 최고의 점수를 주겠다. 자, 시작해!"
그리고 야크는 학생에게 진검을 던져주었다. 멀리서 그 모양을 지켜보던 나다는 어이가 없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하긴, 어린 학생이니까.'
"저는 학생이고 선생님에게 진검을 대고싶지 않습니다. 이런 유치한 장난에 동조할 생각이 없군요."
금발머리의 싸늘한 말에 야크가 흥분했다.
"뭐, 뭐? 유치한 장난? 너 이 자식!"
쿵쾅쿵쾅 다가와 한대 먹이려는 야크의 주먹을 보고 소년은 두 손을 내밀어 막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동그라미에서 나오셨군요, 선생님? 그럼 전 최고의 점수를 받겠군요?"
"뭐, 뭐?"
'아이구 저 단세포. 난 못살아...'
나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한심해했다. 학생들은 킥킥거렸고 무안을 당한 야크는 얼굴이 벌개져서 이만 부드득 갈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들어가 이 자식들아!"
리오는 아이들을 가르쳐보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긴장했다. 수도원에서 생활할때 견습사제들의 수업을 보조해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였다. 수업을 진행한적도 있었지만 교사사제가 짜놓은 틀에 맞추어 강의를 해보았을 뿐이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쳐본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곳 아이들은 귀족자제가 대부분인 견습사제가 아니라 평민아이들이었다. 물론 평민인 견습사제들도 많았지만 그런경우 그들은 잡일을 하지 수업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리오는 사원의 수도사에게서 신학교과서를 받아들고서 그날부터 열심히 줄을 치고 요약해가며 나다를 붙잡고 연습까지 했다. 나다가 교사생활을 해봤다기에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나다는 버벅거리는 리오에게 계속 욕을 하다가 책상에 앉아 자버렸다. 도대체가, 리오는 너무 어려운 단어만 썼다! 이제 열살 겨우 넘긴 먹은 평민 아이들이 그 어려운 말을 어찌 이해한단 말인가! 나다의 다구침에 주눅이 든 리오는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푹 죽어버렸다.
아침이 되어 학생들의 교실로 들어가기 전, 리오는 책을 가슴에 대고 잠시 눈을 감은 뒤 심호흡을 했다. 대중 앞에 서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리오는 상당히 긴장했다. 옛날, 처음으로 수도원 교실에 강의하러 들어섰던 때가 기억난다. 그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가슴이 떨려왔다. 리오를 좋게 보아준 지도교사 사제는 그를 몇번 교단에 세웠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 보내졌다. 그리고 그 일로 리오 자신은 마르코주교에게....
"저.. 사제님?"
대머리 교장이 땀을 닦으며 나타났다. 리오는 교장을 돌아보고 간단히 목례한 후 미소지었다. 리오의 손에 들린 책을 본 교장은 얼굴을 이그린 채 그에게 책 한권을 내밀었다.
"이것은?"
"저, 저.. 신학교과서가 바뀐 것을 교단에서는 모를 겁니다. 이 교재로 수업을.."
리오는 몹시 당황했다. 이렇게 되면 어제 연습한것이 무용지물이지 않은가.
"어, 언제 바뀌었지요? 수도원에서는 이 책이라고....."
"새로 개정된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수도원에서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 이걸로 해주십시오."
리오는 교장이 내민 교재를 망연히 받았다. 그는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수업시간이 되어 어쩔 수가 없이 교실에 들어갔다. 리오는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는 서른 쌍의 눈동자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교재로 첫 수업을?
"신학을 맡은 리오사제입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리오는 식은땀을 흘리며 방글방글 인사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표정은 무척 딱딱했다. 리오는 교단 앞에 서서 절망적인 기분으로 교재를 보았다. 결국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교재를 폈다. 첫 장부터 거미줄같은 예언자의 계보가 나와있었다. 그는 교과서를 보며 버벅거렸다.
"음.. 그러니까 주요 예언자 분들의 계보를 보면..."
"그건 이미 배웠는데요?"
한 학생의 말에 리오는 더욱더 식은땀을 흘렸다. 학생들은 풋내기 선생의 모습을 보고 다같이 웃었다. 악의가 섞인 웃음이었다.
"당신은 성자라면서요?"
당돌한 질문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야크를 무안주었던 당돌한 금발머리 학생이었다.
리오의 얼굴이 발개졌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오해입니다. 소문이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색하게 하하, 웃는 리오의 얼굴을 보며 학생은 보이지 않게 싸늘히 경멸의 웃음을 지었다. 당돌한 학생은 질문을 늦추지 않았다.
"주교님도 당신보고 성자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학생 이름이?"
"마크 탤보트입니다."
리오는 당황했다. 평민은 성이 없고, 성이 있는 경우는 귀족이거나 정식사제 이상일 경우였다. 그런데 여기는 평민학교가 아닌가? 하지만 마크는 리오가 당황스러운 마음을 수습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상당히 도전적인 얼굴로 리오를 추궁했다.
"당신이 성자가 아닌데 주교님이 성자님이라고 부른다면, 당신은 주교님을 속인 것입니까? 아니면 주교님이 멍청이란 소립니까?"
조용. 뒤에서 청소하는 척 하면서 리오를 지켜보던 나다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저 어린것이, 뭐하는 짓이야?'
리오의 얼굴에 슬픔이 떠올랐다. 그는 마크의 이름을 들을 때부터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예전에 백룡 차이에게 죽음을 당한 어린 미크..... 그와 이름도 비슷하고, 당돌한 것도 비슷했다. 단지, 마크는 좀 더 큰 소년이었다.
"왜 대답이 없으시죠?"
리오는 인자한 얼굴로 마크를 보았다. 마크는 자신의 당돌한 질문에 리오가 화를 낼 줄 알았기에 저도 모르게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크군. 세상에는 실제가 아닌데 실제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원하지 않는 명칭이 따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그런 이름으로 칭해주시는 분들은 호의로 그러시는 것이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전 실제가 아닌 명칭이 싫습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마크는 리오의 대답에 빈정댔다.
"하긴, 누가 '문둥이'의 성자라고 불리고 싶겠습니까?"
아이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이들은 그 호칭을 비웃는 것이다. 그렇지만 리오는 마크의 그런 도발에 오히려 떨리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리오는 진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런 아름다운 칭호를 아무나 가질 순 없겠지요.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리오가 미소짓자 아이들과 마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리오는 웃으며 마크를 보고는 교재를 펴면서 말을 이었다.
"자, 그럼 교과서를 보세요. 어.."
리오는 새로운 교재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나다는 리오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몰라서 학생들의 교과서를 뒤에서 흘낏 보았다.
[신은 백인족을 세상의 지배자로서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 신 또한 백인의 모습이며 천사 또한 그러하다. 반대로 다른 종족들은 그 변이종에 불과하다. 그림이나 신화의 악마가 검은 피부이거나 백인종보다는 타 종족에 가까운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며, 나머지 종족은 '유사인종'일 뿐이다. '유사'의 말뜻은,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다. 세상의 식물과 짐승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듯 유사인종들도...]
여기까지 읽고 나다는 왜 리오가 얼굴이 굳었는지 알아차렸다. 나다는 리오가 걱정되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리오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교과서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이단에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마크가 리오를 공격했다. 리오는 교재를 덮었다.
"여러분, 신은 만물을 평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은 이단이야."
마크의 싸늘한 어조다. 그는 대놓고 리오를 비난하고 있었다.
"이단에 물든 가짜 성자에게는 감히 신성한 신학을 배울 수 없습니다."
마크는 교과서를 탁 덮더니 벌떡 일어나 절도있게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아이들은 눈치를 보더니 역시 다 가방을 챙기고 교실에서 나가버렸다.
텅 빈 교실에서 나다는 리오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쳐주었다.
"야, 신경 쓰지마. 저 자식들 케이와이단 자식들인가 보다."
"...아닙니다. 나다. 마크의 말이 옳아요. 전 자격이 없습니다."
"뭐야? 왜이래? 너 자학하냐?"
"저는 사제직을 버리려고 이미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제복을 입고 교단에 선단 말입니까? 스스로 떳떳할 수가 없군요. 아이들을 너무 우습게 보았습니다. 저의 실수입니다."
나다는 또 리오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음.... 넌 너무 모든 걸 심각하게 생각해. 쩝.'
다른 반들은 그럭저럭 꾸려가지만, 아무래도 마크가 속한 반이 가장 말썽이었다. 그 소년은 학생들 사이에서 학교의 일인자였다. 주먹도 세고 공부도 잘했고, 무엇보다 그의 아버지는 케이와이단의 주요인물이었다. 평민으로써는 대단한 출세인 것이다. 그래서 곧 귀족학교로 옮긴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평민아이가 귀족학교에 가긴 힘들었다. 마크가 귀족 이상만이 가지는 '탤보트'란 성을 가진 것은 케이와이단의 평등사상 때문이었다. 백인끼리는 모두 평등하며, 그러므로 백인은 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윽고 그 말썽장이 마크의 반을 시케가 맡을 시간이 되었다. 나다는 걱정이 되어 몰래 지켜보았다.
'시케의 일반체육시간이 또 돌아왔습니다.. 뎅뎅뎅. 히히, 시케의 멋진 몸매를 감상할 수 있는... 음, 흠.'
"오늘은 종합적인 일반체육 테스트에 앞서 하나씩 능력을 측정해보도록 하죠. 나중에 자신의 능력이 향상되었음을 보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시케가 또박또박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 테스트할 것은 달리기, 여자는 매달리기 남자는 철봉. 그리고 푸쉬업하고 던지기 등이다.
시케는 학생들이게 인기가 많았다. 일단 뛰어난 실력이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자만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일반체육이었지만 학생들이 물어보는 검식에 대해서도 친절히 답해주었다. 가끔 시케가 보여주는 간단한 검술의 시범에 학생들은 모두 찬탄의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자, 달릴 때 정면을 보도록 해요. 그리고 자세는..."
시케가 학생들의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그런데,
"선생님, 같이 달려보시겠습니까? 함께 달려보면 실력이 더 향상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지. 밉살스런 마크녀석!'
나다는 속으로 으르렁대며 마크를 보았다. 그러나 시케는 침착했다. 그녀는 이미 나다를 통해 미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리오에게 어떻게 했는지 모두 들었기에, 속으로는 무척 화가 많이 나있었다. 모든 일에 냉정할수 있는 시케지만 리오에 관한 일이라면 무조건 감정이 앞섰다. 나다는 그런 그녀를 탓할수는 없었지만 무슨 일을 저지를까 심히 염려되었다.
그녀는 억지로 방긋 웃었다.
"좋아요. 우리가 첫 테이프를 끊도록 하지요."
나다는 속으로 마크에게 외쳤다.
'요 녀석 맛 좀 봐라! 너 시케 여자라고 얕보지마. 시케는 용병단의 대장급이였다구!'
"출발!"
둘은 힘차게 달려나갔다. 처음엔 마크가 기를 쓰고 시케를 쫓아 추월했다. 마크가 시케를 젖히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의 추종자들이 우우 하며 함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시케의 표정은 여유로왔다. 둘 사이가 멀리 떨어졌을 즈음, 갑자기 시케가 빨라졌다. 그녀는 마치 일부러 간격을 띄워준 양, 그 먼 간격을 순간에 좁혀버렸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시케가 골인했다.
마크는 숨을 헐떡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빠르기는 그의 상상을 넘어섰다. 그러나 곧 분노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케의 그런 행동이 분명히 자신을 놀리는 태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케는 땀을 닦으며 발랄한 음성으로 마크에게 말했다.
"마크 잘 뛰는걸? 신학에 대한 견해도 독특하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운동도 잘하네?"
나다는 휙 꼬꾸라질 뻔했다.
'윽! 시케. 넌 성자는 아니다.'
시케는 마크를 노골적으로 비꼬고 있었다. 마크는 이를 악물었다. 등을 돌린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 쪽으로 걸어갔다.
다들 한마당씩 뛰고 나자, 철봉 쪽으로 갔다.
"선생님! 철봉의 자세에 관해서도 가르침을 주시죠."
마크가 구겨진 자존심을 억지로 펴면서 말했다. 시케는 방실 웃었다.
"좋아요."
먼저 마크가 두 손에 송진을 탁탁 바르더니 뛰어올라 철봉에 올라갔다.
"하나, 둘, 셋..."
아이들이 숫자를 센다. 마크의 동작은 나다가 봐도 훌륭했다.
"서른 다섯, 서른 여섯..."
마크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여든 다섯, 여든.......여섯!"
탈진한 마크가 철봉 밑으로 내려오자 그의 추종자들은 마구 환호했다. 마크는 그들의 영웅이었다. 그가 손만 들어도 추종자들은 감격하며 그를 칭찬하느라 입에 거품을 물었다.
"뭐, 기록이긴 하지만. 언젠간 백을 넘을 거야."
의기양양해진 마크가 시케를 쳐다보았다. 시케 역시 자신 있게 쳐다본다. 그녀는 깨끗한 동작으로 철봉에 올라갔다. 아이들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한참이 지나자 의기양양하던 마크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가셨다.
"여든 다섯, 여든 여섯..."
아이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케를 쳐다보았다. 시케는 마크의 기록인 여든 여섯을 넘어서자, 마크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이고는, 한 손가락으로 하기 시작했다.
"아흔 여덟, 아흔 아홉... 백..."
시케는 여전히 힘찼지만 '시간이 없군'하는 제스츄어를 보내며 사뿐히 철봉에서 내려왔다.
"마크 철봉도 잘하는걸? 질문도 잘하는 학생이라는데. 팔 힘도 센데 그래?"
'으윽, 시케!'
나다는 운동장 한 켠에서 혼자 자빠지고 어푸러지고 난리가 났다.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마크는 분노에 입술을 깨물며 시케를 노려보았다. 비웃는듯 입꼬리를 올린 시케 역시 그를 맞받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던지기종목이 남았다.
"이번엔 먼저 던지시죠."
마크의 말에 고개를 까딱한 시케가 공을 집어들었다. 저 멀리 케이와이단의 깃대가 아련히 보인다. 순간 역동적인 조각상인 양 훌륭하게 자세를 잡은 그녀는 재빠르고 힘차게 공을 던졌다.
'어어.. 날아간다 날아간다 멀리멀리.....'
나다는 크게 호선을 그으며 힘차게 날아가는 공을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았다. 케이와이단의 깃대에 맞은 공은 보초의 머리를 때렸다. 모두들 입을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시케가 마크에게 공을 집어주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의 패배입니다. 대단하시군요."
마크가 순순히 패배를 시인하자 시케는 방긋 웃었다.
"그래? 마크는 승패에도 깔끔하구나."
그러나 시케의 다음 말은 나다가 생각해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수업 중간에 나올 때도, 단호하게 잘했다면서. 항상 끝이 깔끔한가보지?"
마크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시케를 노려보았다. 녀석은 시케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진 그녀를 존경의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케가 여전히 비꼬자 눈빛이 증오로 바뀌었다. 시케는 조금 흠칫했지만 맞받아 노려보았다.
"다, 당신은,"
마크가 흥분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여자고 사제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마크의 말에 시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난 안다고. 당신은 용병이었어! 인간 백정, 살인마.... 돈을 받으면 누구에게라도 칼을 겨누는, 인간 백정!"
아이들은 웅성거렸고 어떤 아이 몇은 노골적으로 시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왜 가짜성자를 옹호하는지도 알아. 너희들의 그 더러운..."
짝!
시케는 부들부들 떨며 마크의 뺨을 쳤다. 마크의 뺨이 벌겋게 부어 올랐다.
"나는 욕해도 상관없지만, 리오를 욕할 순 없어! 그분은 감히 너 같은 것이 이름을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분이야!"
'으음... 쿨럭.'
나다는 시케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곧 수긍했다.
'하긴, 시케야말로 리오의 둘도 없는 숭배자니깐. 쩝.'
마크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시케를 노려보았다. 그때 나다가 뛰어들었다.
"수업 끝났으면 비키슈우? 청소하게?"
나다는 흥분한 시케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빗자루로 먼지를 일으키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천한 유색인종 따위가 어딜 감히!"
마크는 선생인 시케에겐 손을 대지 못하고 대신 나다의 뺨을 쩍! 쳤다. 나다의 코에서 코피가 찍! 뛰쳐나갔다. 그는 자신의 볼따구를 감싸쥐고 잠시 웅크려앉아 고통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하더니 고개를 홱 들었다.
"헤헤,"
눈을 바보같이 멍청하게 뜬 청소부는 실실거렸다.
"아퍼요요... 청소하겠다는데.. 웅.. 되련님 한번만 봐주쇼. 엥?"
화풀이상대를 찾은 마크는 '이놈 잘 걸렸다'는 듯 다시 발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더이상 참고 보기 힘든 시케가 마크의 다리를 막아치기 위해 몸을 날렸다. 나다는 그 순간 그녀의 손을 잡아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시케는 갑작스레 균형을 잃고 몸을 바로 하려 했으나 나다를 향하던 마크의 발은 미처 그녀의 머리를 피하지 못했다.
퍽!
학생들은 순간 굳어졌다. 마크의 발에 머리를 맞은 시케의 이마에 피가 흘러내렸다.
"어어? 학생이 선생을 쳤네에?"
나다는 일부러 과장되게 멍청한 척을 하며 마구 소리질렀다.
"어이구 동네사람드을~ 학생이 선생을 쳐어~ 사람살려요오오오------!"
"괜찮아요."
시케가 나다의 손을 잡고 말렸다. 그녀는 이미 냉정을 되찾았다.
"마크, 네 뺨을 때린 건 내 잘못이다. 그렇지만 리오를 모욕한 건 용서할 수 없어! 서로 한번만 봐주기로 하자."
시케는 마크에게 엄하게 말하면서 나다에게 눈을 찡긋 했다. 나다는 얼빵하게 웃어주었다. 피를 본 마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멍하니 시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미운 털 박힌 빅터주교다. 나다의 생각에는, 그가 추천한 교사가 하루만에 학생의 뺨을 때렸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것같았다. 특히 마크는 케이와이단 주요인물의 자식인데.
'시케에겐 미안하지만 한대 맞아주는 것이 낫겠지. 작전성공~ 쿠쿠.'
나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었다. '역시 난 교활해~'하고 흡족해 하면서.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수건으로 땀을 닦던 시케 앞에 종종거리며 긴 머리의 여교사가 달려왔다. 주위를 흘끔거리며 경계하면서 그녀는 시케의 손을 잡고 구석으로 갔다.
"왜 그러시죠?"
"저는 미술교사인 다이앤이라고 해요. 선생님, 마크를 조심하세요. 마크가 선생님 때렸지요?"
시케는 난처하게 웃었다.
"아니오 그건 사고..."
"아니에요."
다이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시케는 다이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피의 도서관' 사건을 아시나요?"
"'피의 도서관' 사건?"
저녁께쯤 지친 일행은 뒷뜰 잔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시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학교엔 백인 아이들만 있잖아요? 그 전엔 황인과 흑인 아이들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시케는 리오를 흘긋 바라보며 말하기를 망설였다. 리오는 그 특유의 편안한 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요?"
"임마, 니가 하두 마음이 약하고 찔찔 짜니까 충격받을까 봐 그러는 거 아니야."
나다가 쿡 찌르자 리오의 얼굴이 금새 벌겋게 상기되었다.
"음, 음, 괜찮아요, 말해요 시케."
"말하지요. 리오도 마크 조심하세요. 한 무리의 백인 특히 케이와이단의 아이들이 오후에 도서관으로 몰려갔대요. 그리고 문을 잠그고..."
리오의 눈치를 자꾸만 보던 시케는 더듬거리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롱소드로... 도서관 안의 흑인과 황인족 아이들을..."
나다가 답답해서 말을 이었다.
"다 싸그리 죽였단다! 얘들아, 공포에 질려 책상 밑에 숨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킬킬 웃어가면서 장난치듯이 놀듯이! 다 싸그리 죽였대. 알겠니?"
리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야, 그러니까 리오! 너 조심해 임마. 시케나 야크는 지 몸은 지가 지키지만, 너 갑자기 마크가 푹 찔러버리면 어떡할래? 그 피의 도서관 사건 주동자가 마크였댄다!"
야크가 무심히 말했다.
"리오는 선생이야. 사부님이라고. 찌르다니 무슨 말이야?"
"바보! 그때 도서관에서 죽은 황인족 선생도 있었단다! 그 자식들 장난 아니야!"
'선생을 죽였다'는 말에 야크의 머리털이 위로 치솟았다.
"뭐얏? 감히 제자가 사부를 죽여? 이런 경우가 있나! 그런 패륜아가 멀쩡히 얼굴 들고 도시를 활개치며 다닌단 말이냐?"
야크가 심하게 펄펄 뛰자 나다는 말 꺼낸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리오가 뜻밖의 말을 했다.
"아니오, 이해가 갑니다."
"뭐야?"
다들 눈꼬리가 치솟아 리오를 쳐다보았다. 리오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신학교과서를 보십시오. 평민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교과서가 개정된 것은 얼마 안되었지만 케이와이단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 받아왔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교육받은 아이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이들만 탓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무심한 듯 말하는 리오의 말꼬리는 약간 떨렸고 기울이는 찻잔도 파르르 떨렸다. 누가 봐도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야크가 굵은 음성으로 불평했다.
"와, 정말 못해먹겠다. 이건 학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전쟁터구만. 허, 참. 사부를 죽인 패륜아가 우등생이랍시고 활개치고 다니는 꼬라지인 곳이니까!"
동방이나 남방에서는 사제관계가 부자관계보다 엄했으면 엄했지 덜하지 않았다. 승천하기 위해 수련하면서 사부가 죽으라면 진짜 죽으려고 했었던 야크에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었다.
리오는 쓰게 웃었다.
"명석한 학생이에요. 그는 배운 대로 정확하게 실천한 거군요."
나다는 화제를 바꿀 필요를 느꼈다.
"학교 쓰레기통 비우는 일 언제까지 해야 돼냐? 제길."
다들 나다를 보고 웃었다.
"야, 리오. 너 신학수업 못하겠다. 어떡할 거야?"
"음... 좀 강하게 나가야 할까봐요."
"어떻게?"
그때 군인같은 용모의 과학교사가 다가왔다. 얼굴도 우락부락한데다 머리카락도 꼭 군인과 같이 대머리 비슷하게 짧게 잘라 보기에도 찬바람이 불었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일행을 둘러보았다.
"선생으로써, 아이들이 왔다갔다하는 뒷뜰에서 잡담이나 나눈다면 교사의 권위가 어떻게 되겠소?"
그의 차가운 말투에 야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리오가 야크의 발 위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야크는 그런 리오를 보더니 참았다.
"아이들은 민감합니다.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소.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들의 귀감이 되야 할 선생들께서..."
그는 나다를 흘깃 보았다.
"...저런 저급한 유색인 청소부와 담소하다니. 아이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소?"
이것은 나다가 부랑생활하면서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나다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들은 얼굴색이 변했다. 나다는 동료들의 눈치가 수상해지자 벌떡 일어나 능청을 떨었다.
"아이구우 선생님덜... 지가 방해해서 죄송해요오~ 그러니까 알았쥬? 코피잔은 꼭 치우고 휴지는..."
"잔소리가 많다! 그걸 치우는 게 네 직분이야!"
나다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동료들에게 찡긋 눈짓을 한 뒤 청소통을 들고 화급히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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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배운대로 행동하는 아이들 (1)
"학교요?"
"네."
빅터주교의 대답에 일행은 각각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언뜻 이해가 되지 않기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빅터주교가 일행에게 모아놓고 설명했다.
"지금 여러분들은 수도원의 손님들입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체류에 브룬하르트 쪽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방법은 여러분들이 여기에 꼭 필요해서 남아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가장 확실한 방법이 학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사제들을 대피시켰다고 말씀 드렸을 겁니다. 당연히 학교의 교사를 맡을 사제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 공백을 케이와이단의 교사단이 대체하고 있으니, 여태껏 그럭저럭 잘 운영되어왔지요. 어차피 교사가 부족하니 그 핑계를 대면 여러분들의 장기체류도 설명이 될 겁니다."
"흥, 내가 있고 싶으면 있는 거지, 왜 이유를 만들어야되나?"
야크가 화를 냈다.
"그들은 여러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빅터주교의 말에 다들 수긍을 했다. 나다가 주교에게 물었다.
"주교님이 말하는 데가 교단에서 운영하는 평민학교 맞수?"
빅터 주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다는 턱을 만지며 말했다.
"음... 평민학교 나온 지가 꽤 돼서... 하긴, 리오야. 나두 예전에 교사 조금 했었거든?"
나다의 말에 주교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다님은 안됩니다. 나다님은 교사로 들어갈 수 없어요. 잡역부라면 몰라도."
"메, 메야?"
"나다님은 황인이잖습니까."
"으...윽..."
야크가 웃었다.
"야, 나다. 너 참 웃기는 놈이다. 전쟁터에서 시체나 뒤지는 놈이 평민학교도 나오고 교사를 한 적도 있어? 너 정체가 뭐야?"
"뭐긴 뭐야. 부랑자지. 흥! 이젠 잡역부가 될 것이고. 우윽."
주교가 앞장서서 모두 학교로 갔다. 도시의 거리는 마치 케이와이단 병사들의 군화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학교는 꽤 경치 좋은 곳에 위치했다. 벽돌은 빨간 벽돌, 층층이 둘러서 예쁘게 꽃들이 심겨져있다. 고풍스러운 건물에는 담쟁이들이 둘러져 있었다.
"환영합니다. 안 그래도 적은 수의 교사로 많은 수의 학생을 이끌어가다 보니 고충이 많았습니다. 정말 환영합니다."
대머리에다 키가 작은 교장이 연신 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학교의 정문도 그렇고, 교장실에도 커다랗게 [일하지 않는 자는 살 가치가 없다] 라는 표어가 매달려있었다. 교장은 표어를 바라보는 일행을 보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브룬하르트님의 명이라... 아참, 모든 과목이 다 일손이 부족한데 어떤 과목을 맡으실지."
"일반체육과목을 당분간 맡게될 시케사제입니다."
시케가 운동장에서 인사하자 남녀학생들이 절도있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학생들은 꼿꼿이 선채 다함께 구호를 말하듯 외쳤다. 시케는 당황했다.
"편하게 하지요, 여긴 군대가 아니에요."
운동장을 빗질하던 나다가 시케를 보았다. 간편한 체육복을 입은 모습이 멋지다.
"검술을 맡은 야크라고 한다. 그런데, 다 목검이야?"
야크의 불퉁한 말이다. 어린 학생들은 거대한 그의 몸집에 벌써부터 겁을 먹었다.
"진검으로 해야 실력이 느는 법이거늘. 이런 목검으로 무슨 어린애 장난하나? 흥."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서 수근거림이 들렸다. 귀밝은 야크가 놓칠 리가 없다.
'야, 외팔이잖아?'
'흥, 덩치크다고 주눅들거 없어.'
"야, 너."
유난히 비죽거리는 금발머리 학생을 야크가 지목하자, 그 학생은 삐딱하게 그를 꼬나보았다.
"검 들고 와봐. 대련이다."
금발머리는 기죽지 않고 목검을 들고 나왔다.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야크는 자기 주위에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날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게 하면 넌 다음부터 수업에 안나와도 최고의 점수를 주겠다. 자, 시작해!"
그리고 야크는 학생에게 진검을 던져주었다. 멀리서 그 모양을 지켜보던 나다는 어이가 없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하긴, 어린 학생이니까.'
"저는 학생이고 선생님에게 진검을 대고싶지 않습니다. 이런 유치한 장난에 동조할 생각이 없군요."
금발머리의 싸늘한 말에 야크가 흥분했다.
"뭐, 뭐? 유치한 장난? 너 이 자식!"
쿵쾅쿵쾅 다가와 한대 먹이려는 야크의 주먹을 보고 소년은 두 손을 내밀어 막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동그라미에서 나오셨군요, 선생님? 그럼 전 최고의 점수를 받겠군요?"
"뭐, 뭐?"
'아이구 저 단세포. 난 못살아...'
나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한심해했다. 학생들은 킥킥거렸고 무안을 당한 야크는 얼굴이 벌개져서 이만 부드득 갈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들어가 이 자식들아!"
리오는 아이들을 가르쳐보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긴장했다. 수도원에서 생활할때 견습사제들의 수업을 보조해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였다. 수업을 진행한적도 있었지만 교사사제가 짜놓은 틀에 맞추어 강의를 해보았을 뿐이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쳐본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곳 아이들은 귀족자제가 대부분인 견습사제가 아니라 평민아이들이었다. 물론 평민인 견습사제들도 많았지만 그런경우 그들은 잡일을 하지 수업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리오는 사원의 수도사에게서 신학교과서를 받아들고서 그날부터 열심히 줄을 치고 요약해가며 나다를 붙잡고 연습까지 했다. 나다가 교사생활을 해봤다기에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나다는 버벅거리는 리오에게 계속 욕을 하다가 책상에 앉아 자버렸다. 도대체가, 리오는 너무 어려운 단어만 썼다! 이제 열살 겨우 넘긴 먹은 평민 아이들이 그 어려운 말을 어찌 이해한단 말인가! 나다의 다구침에 주눅이 든 리오는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푹 죽어버렸다.
아침이 되어 학생들의 교실로 들어가기 전, 리오는 책을 가슴에 대고 잠시 눈을 감은 뒤 심호흡을 했다. 대중 앞에 서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리오는 상당히 긴장했다. 옛날, 처음으로 수도원 교실에 강의하러 들어섰던 때가 기억난다. 그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가슴이 떨려왔다. 리오를 좋게 보아준 지도교사 사제는 그를 몇번 교단에 세웠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 보내졌다. 그리고 그 일로 리오 자신은 마르코주교에게....
"저.. 사제님?"
대머리 교장이 땀을 닦으며 나타났다. 리오는 교장을 돌아보고 간단히 목례한 후 미소지었다. 리오의 손에 들린 책을 본 교장은 얼굴을 이그린 채 그에게 책 한권을 내밀었다.
"이것은?"
"저, 저.. 신학교과서가 바뀐 것을 교단에서는 모를 겁니다. 이 교재로 수업을.."
리오는 몹시 당황했다. 이렇게 되면 어제 연습한것이 무용지물이지 않은가.
"어, 언제 바뀌었지요? 수도원에서는 이 책이라고....."
"새로 개정된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수도원에서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 이걸로 해주십시오."
리오는 교장이 내민 교재를 망연히 받았다. 그는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수업시간이 되어 어쩔 수가 없이 교실에 들어갔다. 리오는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는 서른 쌍의 눈동자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교재로 첫 수업을?
"신학을 맡은 리오사제입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리오는 식은땀을 흘리며 방글방글 인사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표정은 무척 딱딱했다. 리오는 교단 앞에 서서 절망적인 기분으로 교재를 보았다. 결국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교재를 폈다. 첫 장부터 거미줄같은 예언자의 계보가 나와있었다. 그는 교과서를 보며 버벅거렸다.
"음.. 그러니까 주요 예언자 분들의 계보를 보면..."
"그건 이미 배웠는데요?"
한 학생의 말에 리오는 더욱더 식은땀을 흘렸다. 학생들은 풋내기 선생의 모습을 보고 다같이 웃었다. 악의가 섞인 웃음이었다.
"당신은 성자라면서요?"
당돌한 질문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야크를 무안주었던 당돌한 금발머리 학생이었다.
리오의 얼굴이 발개졌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오해입니다. 소문이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색하게 하하, 웃는 리오의 얼굴을 보며 학생은 보이지 않게 싸늘히 경멸의 웃음을 지었다. 당돌한 학생은 질문을 늦추지 않았다.
"주교님도 당신보고 성자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학생 이름이?"
"마크 탤보트입니다."
리오는 당황했다. 평민은 성이 없고, 성이 있는 경우는 귀족이거나 정식사제 이상일 경우였다. 그런데 여기는 평민학교가 아닌가? 하지만 마크는 리오가 당황스러운 마음을 수습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상당히 도전적인 얼굴로 리오를 추궁했다.
"당신이 성자가 아닌데 주교님이 성자님이라고 부른다면, 당신은 주교님을 속인 것입니까? 아니면 주교님이 멍청이란 소립니까?"
조용. 뒤에서 청소하는 척 하면서 리오를 지켜보던 나다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저 어린것이, 뭐하는 짓이야?'
리오의 얼굴에 슬픔이 떠올랐다. 그는 마크의 이름을 들을 때부터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예전에 백룡 차이에게 죽음을 당한 어린 미크..... 그와 이름도 비슷하고, 당돌한 것도 비슷했다. 단지, 마크는 좀 더 큰 소년이었다.
"왜 대답이 없으시죠?"
리오는 인자한 얼굴로 마크를 보았다. 마크는 자신의 당돌한 질문에 리오가 화를 낼 줄 알았기에 저도 모르게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크군. 세상에는 실제가 아닌데 실제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원하지 않는 명칭이 따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그런 이름으로 칭해주시는 분들은 호의로 그러시는 것이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전 실제가 아닌 명칭이 싫습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마크는 리오의 대답에 빈정댔다.
"하긴, 누가 '문둥이'의 성자라고 불리고 싶겠습니까?"
아이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이들은 그 호칭을 비웃는 것이다. 그렇지만 리오는 마크의 그런 도발에 오히려 떨리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리오는 진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런 아름다운 칭호를 아무나 가질 순 없겠지요.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리오가 미소짓자 아이들과 마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리오는 웃으며 마크를 보고는 교재를 펴면서 말을 이었다.
"자, 그럼 교과서를 보세요. 어.."
리오는 새로운 교재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나다는 리오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몰라서 학생들의 교과서를 뒤에서 흘낏 보았다.
[신은 백인족을 세상의 지배자로서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 신 또한 백인의 모습이며 천사 또한 그러하다. 반대로 다른 종족들은 그 변이종에 불과하다. 그림이나 신화의 악마가 검은 피부이거나 백인종보다는 타 종족에 가까운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며, 나머지 종족은 '유사인종'일 뿐이다. '유사'의 말뜻은,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다. 세상의 식물과 짐승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듯 유사인종들도...]
여기까지 읽고 나다는 왜 리오가 얼굴이 굳었는지 알아차렸다. 나다는 리오가 걱정되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리오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교과서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이단에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마크가 리오를 공격했다. 리오는 교재를 덮었다.
"여러분, 신은 만물을 평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은 이단이야."
마크의 싸늘한 어조다. 그는 대놓고 리오를 비난하고 있었다.
"이단에 물든 가짜 성자에게는 감히 신성한 신학을 배울 수 없습니다."
마크는 교과서를 탁 덮더니 벌떡 일어나 절도있게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아이들은 눈치를 보더니 역시 다 가방을 챙기고 교실에서 나가버렸다.
텅 빈 교실에서 나다는 리오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쳐주었다.
"야, 신경 쓰지마. 저 자식들 케이와이단 자식들인가 보다."
"...아닙니다. 나다. 마크의 말이 옳아요. 전 자격이 없습니다."
"뭐야? 왜이래? 너 자학하냐?"
"저는 사제직을 버리려고 이미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제복을 입고 교단에 선단 말입니까? 스스로 떳떳할 수가 없군요. 아이들을 너무 우습게 보았습니다. 저의 실수입니다."
나다는 또 리오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음.... 넌 너무 모든 걸 심각하게 생각해. 쩝.'
다른 반들은 그럭저럭 꾸려가지만, 아무래도 마크가 속한 반이 가장 말썽이었다. 그 소년은 학생들 사이에서 학교의 일인자였다. 주먹도 세고 공부도 잘했고, 무엇보다 그의 아버지는 케이와이단의 주요인물이었다. 평민으로써는 대단한 출세인 것이다. 그래서 곧 귀족학교로 옮긴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평민아이가 귀족학교에 가긴 힘들었다. 마크가 귀족 이상만이 가지는 '탤보트'란 성을 가진 것은 케이와이단의 평등사상 때문이었다. 백인끼리는 모두 평등하며, 그러므로 백인은 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윽고 그 말썽장이 마크의 반을 시케가 맡을 시간이 되었다. 나다는 걱정이 되어 몰래 지켜보았다.
'시케의 일반체육시간이 또 돌아왔습니다.. 뎅뎅뎅. 히히, 시케의 멋진 몸매를 감상할 수 있는... 음, 흠.'
"오늘은 종합적인 일반체육 테스트에 앞서 하나씩 능력을 측정해보도록 하죠. 나중에 자신의 능력이 향상되었음을 보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시케가 또박또박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 테스트할 것은 달리기, 여자는 매달리기 남자는 철봉. 그리고 푸쉬업하고 던지기 등이다.
시케는 학생들이게 인기가 많았다. 일단 뛰어난 실력이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자만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일반체육이었지만 학생들이 물어보는 검식에 대해서도 친절히 답해주었다. 가끔 시케가 보여주는 간단한 검술의 시범에 학생들은 모두 찬탄의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자, 달릴 때 정면을 보도록 해요. 그리고 자세는..."
시케가 학생들의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그런데,
"선생님, 같이 달려보시겠습니까? 함께 달려보면 실력이 더 향상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지. 밉살스런 마크녀석!'
나다는 속으로 으르렁대며 마크를 보았다. 그러나 시케는 침착했다. 그녀는 이미 나다를 통해 미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리오에게 어떻게 했는지 모두 들었기에, 속으로는 무척 화가 많이 나있었다. 모든 일에 냉정할수 있는 시케지만 리오에 관한 일이라면 무조건 감정이 앞섰다. 나다는 그런 그녀를 탓할수는 없었지만 무슨 일을 저지를까 심히 염려되었다.
그녀는 억지로 방긋 웃었다.
"좋아요. 우리가 첫 테이프를 끊도록 하지요."
나다는 속으로 마크에게 외쳤다.
'요 녀석 맛 좀 봐라! 너 시케 여자라고 얕보지마. 시케는 용병단의 대장급이였다구!'
"출발!"
둘은 힘차게 달려나갔다. 처음엔 마크가 기를 쓰고 시케를 쫓아 추월했다. 마크가 시케를 젖히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의 추종자들이 우우 하며 함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시케의 표정은 여유로왔다. 둘 사이가 멀리 떨어졌을 즈음, 갑자기 시케가 빨라졌다. 그녀는 마치 일부러 간격을 띄워준 양, 그 먼 간격을 순간에 좁혀버렸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시케가 골인했다.
마크는 숨을 헐떡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빠르기는 그의 상상을 넘어섰다. 그러나 곧 분노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케의 그런 행동이 분명히 자신을 놀리는 태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케는 땀을 닦으며 발랄한 음성으로 마크에게 말했다.
"마크 잘 뛰는걸? 신학에 대한 견해도 독특하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운동도 잘하네?"
나다는 휙 꼬꾸라질 뻔했다.
'윽! 시케. 넌 성자는 아니다.'
시케는 마크를 노골적으로 비꼬고 있었다. 마크는 이를 악물었다. 등을 돌린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 쪽으로 걸어갔다.
다들 한마당씩 뛰고 나자, 철봉 쪽으로 갔다.
"선생님! 철봉의 자세에 관해서도 가르침을 주시죠."
마크가 구겨진 자존심을 억지로 펴면서 말했다. 시케는 방실 웃었다.
"좋아요."
먼저 마크가 두 손에 송진을 탁탁 바르더니 뛰어올라 철봉에 올라갔다.
"하나, 둘, 셋..."
아이들이 숫자를 센다. 마크의 동작은 나다가 봐도 훌륭했다.
"서른 다섯, 서른 여섯..."
마크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여든 다섯, 여든.......여섯!"
탈진한 마크가 철봉 밑으로 내려오자 그의 추종자들은 마구 환호했다. 마크는 그들의 영웅이었다. 그가 손만 들어도 추종자들은 감격하며 그를 칭찬하느라 입에 거품을 물었다.
"뭐, 기록이긴 하지만. 언젠간 백을 넘을 거야."
의기양양해진 마크가 시케를 쳐다보았다. 시케 역시 자신 있게 쳐다본다. 그녀는 깨끗한 동작으로 철봉에 올라갔다. 아이들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한참이 지나자 의기양양하던 마크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가셨다.
"여든 다섯, 여든 여섯..."
아이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케를 쳐다보았다. 시케는 마크의 기록인 여든 여섯을 넘어서자, 마크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이고는, 한 손가락으로 하기 시작했다.
"아흔 여덟, 아흔 아홉... 백..."
시케는 여전히 힘찼지만 '시간이 없군'하는 제스츄어를 보내며 사뿐히 철봉에서 내려왔다.
"마크 철봉도 잘하는걸? 질문도 잘하는 학생이라는데. 팔 힘도 센데 그래?"
'으윽, 시케!'
나다는 운동장 한 켠에서 혼자 자빠지고 어푸러지고 난리가 났다.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마크는 분노에 입술을 깨물며 시케를 노려보았다. 비웃는듯 입꼬리를 올린 시케 역시 그를 맞받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던지기종목이 남았다.
"이번엔 먼저 던지시죠."
마크의 말에 고개를 까딱한 시케가 공을 집어들었다. 저 멀리 케이와이단의 깃대가 아련히 보인다. 순간 역동적인 조각상인 양 훌륭하게 자세를 잡은 그녀는 재빠르고 힘차게 공을 던졌다.
'어어.. 날아간다 날아간다 멀리멀리.....'
나다는 크게 호선을 그으며 힘차게 날아가는 공을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았다. 케이와이단의 깃대에 맞은 공은 보초의 머리를 때렸다. 모두들 입을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시케가 마크에게 공을 집어주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의 패배입니다. 대단하시군요."
마크가 순순히 패배를 시인하자 시케는 방긋 웃었다.
"그래? 마크는 승패에도 깔끔하구나."
그러나 시케의 다음 말은 나다가 생각해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수업 중간에 나올 때도, 단호하게 잘했다면서. 항상 끝이 깔끔한가보지?"
마크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시케를 노려보았다. 녀석은 시케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진 그녀를 존경의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케가 여전히 비꼬자 눈빛이 증오로 바뀌었다. 시케는 조금 흠칫했지만 맞받아 노려보았다.
"다, 당신은,"
마크가 흥분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여자고 사제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마크의 말에 시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난 안다고. 당신은 용병이었어! 인간 백정, 살인마.... 돈을 받으면 누구에게라도 칼을 겨누는, 인간 백정!"
아이들은 웅성거렸고 어떤 아이 몇은 노골적으로 시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왜 가짜성자를 옹호하는지도 알아. 너희들의 그 더러운..."
짝!
시케는 부들부들 떨며 마크의 뺨을 쳤다. 마크의 뺨이 벌겋게 부어 올랐다.
"나는 욕해도 상관없지만, 리오를 욕할 순 없어! 그분은 감히 너 같은 것이 이름을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분이야!"
'으음... 쿨럭.'
나다는 시케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곧 수긍했다.
'하긴, 시케야말로 리오의 둘도 없는 숭배자니깐. 쩝.'
마크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시케를 노려보았다. 그때 나다가 뛰어들었다.
"수업 끝났으면 비키슈우? 청소하게?"
나다는 흥분한 시케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빗자루로 먼지를 일으키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천한 유색인종 따위가 어딜 감히!"
마크는 선생인 시케에겐 손을 대지 못하고 대신 나다의 뺨을 쩍! 쳤다. 나다의 코에서 코피가 찍! 뛰쳐나갔다. 그는 자신의 볼따구를 감싸쥐고 잠시 웅크려앉아 고통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하더니 고개를 홱 들었다.
"헤헤,"
눈을 바보같이 멍청하게 뜬 청소부는 실실거렸다.
"아퍼요요... 청소하겠다는데.. 웅.. 되련님 한번만 봐주쇼. 엥?"
화풀이상대를 찾은 마크는 '이놈 잘 걸렸다'는 듯 다시 발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더이상 참고 보기 힘든 시케가 마크의 다리를 막아치기 위해 몸을 날렸다. 나다는 그 순간 그녀의 손을 잡아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시케는 갑작스레 균형을 잃고 몸을 바로 하려 했으나 나다를 향하던 마크의 발은 미처 그녀의 머리를 피하지 못했다.
퍽!
학생들은 순간 굳어졌다. 마크의 발에 머리를 맞은 시케의 이마에 피가 흘러내렸다.
"어어? 학생이 선생을 쳤네에?"
나다는 일부러 과장되게 멍청한 척을 하며 마구 소리질렀다.
"어이구 동네사람드을~ 학생이 선생을 쳐어~ 사람살려요오오오------!"
"괜찮아요."
시케가 나다의 손을 잡고 말렸다. 그녀는 이미 냉정을 되찾았다.
"마크, 네 뺨을 때린 건 내 잘못이다. 그렇지만 리오를 모욕한 건 용서할 수 없어! 서로 한번만 봐주기로 하자."
시케는 마크에게 엄하게 말하면서 나다에게 눈을 찡긋 했다. 나다는 얼빵하게 웃어주었다. 피를 본 마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멍하니 시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미운 털 박힌 빅터주교다. 나다의 생각에는, 그가 추천한 교사가 하루만에 학생의 뺨을 때렸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것같았다. 특히 마크는 케이와이단 주요인물의 자식인데.
'시케에겐 미안하지만 한대 맞아주는 것이 낫겠지. 작전성공~ 쿠쿠.'
나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었다. '역시 난 교활해~'하고 흡족해 하면서.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수건으로 땀을 닦던 시케 앞에 종종거리며 긴 머리의 여교사가 달려왔다. 주위를 흘끔거리며 경계하면서 그녀는 시케의 손을 잡고 구석으로 갔다.
"왜 그러시죠?"
"저는 미술교사인 다이앤이라고 해요. 선생님, 마크를 조심하세요. 마크가 선생님 때렸지요?"
시케는 난처하게 웃었다.
"아니오 그건 사고..."
"아니에요."
다이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시케는 다이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피의 도서관' 사건을 아시나요?"
"'피의 도서관' 사건?"
저녁께쯤 지친 일행은 뒷뜰 잔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시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학교엔 백인 아이들만 있잖아요? 그 전엔 황인과 흑인 아이들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시케는 리오를 흘긋 바라보며 말하기를 망설였다. 리오는 그 특유의 편안한 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요?"
"임마, 니가 하두 마음이 약하고 찔찔 짜니까 충격받을까 봐 그러는 거 아니야."
나다가 쿡 찌르자 리오의 얼굴이 금새 벌겋게 상기되었다.
"음, 음, 괜찮아요, 말해요 시케."
"말하지요. 리오도 마크 조심하세요. 한 무리의 백인 특히 케이와이단의 아이들이 오후에 도서관으로 몰려갔대요. 그리고 문을 잠그고..."
리오의 눈치를 자꾸만 보던 시케는 더듬거리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롱소드로... 도서관 안의 흑인과 황인족 아이들을..."
나다가 답답해서 말을 이었다.
"다 싸그리 죽였단다! 얘들아, 공포에 질려 책상 밑에 숨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킬킬 웃어가면서 장난치듯이 놀듯이! 다 싸그리 죽였대. 알겠니?"
리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야, 그러니까 리오! 너 조심해 임마. 시케나 야크는 지 몸은 지가 지키지만, 너 갑자기 마크가 푹 찔러버리면 어떡할래? 그 피의 도서관 사건 주동자가 마크였댄다!"
야크가 무심히 말했다.
"리오는 선생이야. 사부님이라고. 찌르다니 무슨 말이야?"
"바보! 그때 도서관에서 죽은 황인족 선생도 있었단다! 그 자식들 장난 아니야!"
'선생을 죽였다'는 말에 야크의 머리털이 위로 치솟았다.
"뭐얏? 감히 제자가 사부를 죽여? 이런 경우가 있나! 그런 패륜아가 멀쩡히 얼굴 들고 도시를 활개치며 다닌단 말이냐?"
야크가 심하게 펄펄 뛰자 나다는 말 꺼낸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리오가 뜻밖의 말을 했다.
"아니오, 이해가 갑니다."
"뭐야?"
다들 눈꼬리가 치솟아 리오를 쳐다보았다. 리오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신학교과서를 보십시오. 평민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교과서가 개정된 것은 얼마 안되었지만 케이와이단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 받아왔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교육받은 아이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이들만 탓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무심한 듯 말하는 리오의 말꼬리는 약간 떨렸고 기울이는 찻잔도 파르르 떨렸다. 누가 봐도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야크가 굵은 음성으로 불평했다.
"와, 정말 못해먹겠다. 이건 학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전쟁터구만. 허, 참. 사부를 죽인 패륜아가 우등생이랍시고 활개치고 다니는 꼬라지인 곳이니까!"
동방이나 남방에서는 사제관계가 부자관계보다 엄했으면 엄했지 덜하지 않았다. 승천하기 위해 수련하면서 사부가 죽으라면 진짜 죽으려고 했었던 야크에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었다.
리오는 쓰게 웃었다.
"명석한 학생이에요. 그는 배운 대로 정확하게 실천한 거군요."
나다는 화제를 바꿀 필요를 느꼈다.
"학교 쓰레기통 비우는 일 언제까지 해야 돼냐? 제길."
다들 나다를 보고 웃었다.
"야, 리오. 너 신학수업 못하겠다. 어떡할 거야?"
"음... 좀 강하게 나가야 할까봐요."
"어떻게?"
그때 군인같은 용모의 과학교사가 다가왔다. 얼굴도 우락부락한데다 머리카락도 꼭 군인과 같이 대머리 비슷하게 짧게 잘라 보기에도 찬바람이 불었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일행을 둘러보았다.
"선생으로써, 아이들이 왔다갔다하는 뒷뜰에서 잡담이나 나눈다면 교사의 권위가 어떻게 되겠소?"
그의 차가운 말투에 야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리오가 야크의 발 위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야크는 그런 리오를 보더니 참았다.
"아이들은 민감합니다.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소.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들의 귀감이 되야 할 선생들께서..."
그는 나다를 흘깃 보았다.
"...저런 저급한 유색인 청소부와 담소하다니. 아이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소?"
이것은 나다가 부랑생활하면서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나다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들은 얼굴색이 변했다. 나다는 동료들의 눈치가 수상해지자 벌떡 일어나 능청을 떨었다.
"아이구우 선생님덜... 지가 방해해서 죄송해요오~ 그러니까 알았쥬? 코피잔은 꼭 치우고 휴지는..."
"잔소리가 많다! 그걸 치우는 게 네 직분이야!"
나다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동료들에게 찡긋 눈짓을 한 뒤 청소통을 들고 화급히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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