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1월 08일  
--------------------------------------------------------------------------------



7장. 백인만을 위한 세상 (1)







리오는 다시 쾌활해졌다. 여행을 떠나는 마차 안에서 그는 새삼스레 파란 하늘에 감탄하고 지나가는 풀꽃들을 애정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다, 아름답지 않아요?"

"뭐가?"

"세상이요!"

'어이구 속편한 놈.'

그래도 나다는 새삼스럽게 주변풍경을 감탄하는 리오가 보기 싫지 않았다. 시케도 또한 곧 결혼할 낭군을 옆에 두고 무지하게 행복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 눈에 뭐가 안 이뻐 보이겠니, 세상이 무지개지.'

그러나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나다는 리오에게 삐딱한 말을 퉁 하니 던졌다.

"문둥이 마을에선 그렇게 질질 짜더니, 그새 기분이 좋냐?"

리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시케가 리오 모르게 나다를 쏘아보았다.

"다시 돌아갈 겁니다. 시케에게도 양해를 구해놓았어요."

리오는 시케의 손을 잡더니 웃으며 나다에게 말했다.

"우린 거기에서 살 거에요."

나다는 걱정되었다.

'정말 나환자촌에서 살 건가보다. 그러다 정말 병이 옮으면? 아이가 병에 옮으면? 너희는 단지 상처입은 자에 대한 정상인의 태도만을 문제삼지만, 실제 문둥병이 어떻게 옮는지도 모르게 옮는데, 그 현실은 어떻게 할것이냐? 리오, 네가 하는대로 나환자 아이들과 같이 잠을 자며 십 년, 아니 오 년만 있어봐라. 장담컨데 넌 이타냐 나환자의 수를 하나 보태게 되리라.
시케마저 그렇게 만들 것이냐?
태어나지도 않은 두 사람의 아이까지?'

생각에 잠겨있던 나다는 리오가 초록빛 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보자 흐흐,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곧이어 나다의 마음속에서는 리오의 마음이 들려왔다.

'나다, 많은 분들이 저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희망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신 많은 분들이 저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드와인님의 일이 끝나고 나면 전 평생 나환자촌에 머물면서 그 속죄를 할 생각입니다.'

나다는 기가 막혔다. 리오를 찾기 위해 야크와 동료들은 많은 나환자들을 죽였다. 하지만 나다는 그것이 정당방위라고 생각했기에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리오는 달랐다. 그는 그 비참한 사람들의 최후를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나다는 순간 리오의 마음 깊숙이에 묻혀있는 수많은 기억들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끝없이 펼쳐진 검은 황야 아래 수도 없이 묻혀버린 무덤들을 본 것만 같아 섬뜩해졌다. 나다는 리오의 사고방식이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은 무서울 정도였다.
리오는 그런 나다를 보고 그냥 빙긋 웃더니 시케의 손을 잡고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나다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행복한 표정의 리오와 시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때 가서 생각하자.'

나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리오를 말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차를 몰고 가는데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날카로운 창끝을 위로하고 위풍당당하게 몰려갔다. 길을 온통 메우며 지나가는 병사들을 피해 일행은 잠시 마차를 옆에 세워놓았다.

"어딜 저렇게 몰려갈까?"

"그러게요. 여긴 전쟁터도 꽤 먼 곳인데."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듯한 음성으로 시케가 행복하게 말했다. 말의 내용과 어조가 상당히 어울리지 않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나다는 그냥 웃고 말았다.
다시 말을 재촉하여 마차를 몰고 간 일행은 곧 도시 하나를 발견했다.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로 유명한 로에쉬 영주가 다스리는 도시, 베이리크린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일행은 여관을 알아보았다.
마차 여행을 하는 짧은 기간 동안 리오가 나환자들에게 자근자근 밟힌 상처가 모두 완쾌되었으므로, 일행은 펍으로 가서 조촐하게 그의 완전한 회복을 축하했다. 물론 그 동안 맥주를 먹지 못해서 몸이 단 드와인의 입김이 가장 셌다. 일행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맥주잔을 들었다.

"리오, 축하한다!"

"성자님, 앞으로는 행복만이 가득하길 비오! 금광을 발견한 드워프처럼."

비록 작은 일이었지만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이 작은 회복을 축하했다. 볼을 발그레하니 붉히며 빙글빙글 웃는 리오의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나와, 우리 형을 용서해줘서 고맙다."

마지막으로 던진 야크의 말에 다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나다는 그 동안 잊었던 서스턴을 떠올렸다. 야크의 큰형인 황룡 크리아트만의 화신, '악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선한 신룡의 사악한 화신. 솔직히 나다나 시케, 반, 더욱이 고향이 저주를 받아버린 드와인은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리오지만.
리오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이젠 다 지나간 일인 걸요. 과거는 흘러갔고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요."

일행은 잡담을 해가며 술을 마셨다. 그런데 그때 펍의 한 켠이 시끌벅적해지면서 사람들이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카일, 아까 지나간 병사들 말이야. 뭐지?"

"뭐긴. 문둥이 산적들을 퇴치하려고 온 정부군이지."

"거 참 잘됐네. 안 그래도 문둥이들이 모여들어서 기분 찝찝하더니. 요새는 완전히 무리를 이루더구만."

"싹 쓸어버리고 소독도 해야지. 문둥이라니, 찝찝해서 원."

리오와 일행은 모두 조용해졌다.

"가자."

야크의 한마디에 일행은 말없이 그를 따랐다.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반은 마차 바퀴가 튀어나갈 정도로 마차를 몰아대었다.

"이랴! 이랴! 하!"

나다는 끔찍한 나환자들을 떠올렸다. 솔직히 그 좀비같이 생긴 사람들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그냥 보기에만 끔찍하다면 어느 정도 참겠지만, 나병은 어떻게 옮는지도 모르게 옮아버린다. 자신이 그 병에 걸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직한 일이었다. 자기 몸이 하나씩 녹아 떨어지는 것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닐 것이다.
드디어 멀리 나환자들의 마을이 보였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마을이 아니었다.
검은 연기의 잔해만을 남긴채, 모두 타버렸고 파헤쳐졌다. 다같이 힘들여 세운 집과 빨래터, 수도원같은 병실, 그 모두가 시커먼 골조만을 남긴 채 산더미같은 나환자들의 시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일행은 아연실색했다. 드와인은 자신의 손으로 설계한 집이 부서진 것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

털벅 무릎을 꿇은 리오는 넋을 잃고 신음을 흘렸다.

"야, 반! 넌 브라이언 찾아봐! 그리고 시케! 저 정신나간 리오녀석 옆에 있어 줘. 그리고 야크! 우리 둘이 생존자가 있나 찾아보자."

"저 거지같은 놈이 어디다 대고..."

나다가 이리저리 지시하자 야크는 낮게 불평했지만 곧 시체를 뒤졌다. 넋이 나간 리오는 손을 덜덜 떨면서 목이 졸린 듯한 신음소리만 반복했다.

"이럴 수가.. 욱, 이럴 수가..."

리오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그는 시체더미를 마구 뒤졌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행도 같이 쌓여진 시체를 뒤지며 생존자를 찾았다.

"리오! 이리로 와봐! 샤니야!"

반의 외침에 일행은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나 샤니는 이곳에 널려져있는 나환자 아이들처럼 시체가 되어 있었다. 반은 소녀의 작은 몸에 계속 치유를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그 모양을 보던 야크가 리오의 얼빠진 모습을 보더니 칫, 하고 작게 잇소리를 내었다. 작은 소녀인 샤니가 리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야크는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굵은 손에 비해 처참하리만치 갸냘픈 문둥이 소녀의 몸을 집어들더니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강하게 찔렀다.

"잠시동안만 시체에 영혼이 깃들게 했다. 리오, 작별인사나 해라."

야크의 거대한 손에 대롱 매달린 샤니의 작은 몸은 조금씩 떨리면서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말조차 잊은채 충격에 젖은 리오가 떨리는 손으로 샤니의 몸을 소중하게 받아들자 야크는 뒤로 물러서서 딴청을 피웠다. 나다가 옆에 슬그머니 다가가 속살거리며 물었다.

"야, 그런 재주도 있었냐. 아예 그냥 살려주라, 응?"

야크는 눈 아래로 나다를 깔아보며 신경질을 냈다.

"죽은 년을 어떻게 살려! 이 거지새끼야!"

야크는 아예 성큼거리며 멀리 가버렸다. 괜히 신경질이야, 나다의 꿍얼거림이 귓전에 들렸지만 야크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들을 그저 지켜 보아야만 하는 무능한 자신의 상태에 야크는 커다란 슬픔과 자존심의 손상을 느꼈다. 그는 지금, 그가 예전에 이무기였을때 지녔던 능력조차 없었다. 그에게는 이런 아픈 순간들이 모두가 충격이었다. 무능한 자신에 대한 충격.
문둥이 인간들이 죽건 말건 야크는 사실 상관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리오가 또다시 상처받았다는것에 마음이 아팠다.
리오는 야크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서방의 인간 친구.
리오는 가늘게 떨며 샤니의 몸을 바라보았다. 작은 아이의 몸은 온통 화상으로 얼룩져있었다. 촛점없는 눈을 힘없이 껌벅이던 아이는 리오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성자님.. 정말이네.. 와주셨어요. .. 정말 오셨어요...거봐 토미, 내가 올거랬지?"

눈물은 주루륵 리오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의 눈물젖은 뺨을 샤니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성자님.. 문둥병은 ...신의 저주를 받은 거라면서요? 헥...헥.... 후아, 지은 죄가 많아서.. 성자님이... 기도해주시면 신님이 듣고 용서해 준댔어요. 안 그러면 지옥 간대... 헉, 그러니까, 헉, 그러니까, 나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줘요.."

"으윽..."

리오가 드디어 통곡을 참지 못했다. 그는 잇새로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나.. 열 여섯되면 성자님하고.. 결혼할거야.. 시케언니, 성자님 내 꺼에요.. 헉, 헥...우린 뽀뽀두 하고, .. 헤헤, 같이 잠도 자구요.. 그리구.. 헉, 그리구.. 성자님이 나 사랑한댔어요...  히히..."

시케의 얼굴에도 쉬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샤니를 향해 미소지었다. 뚝, 턱밑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성자님, 나 사랑하죠?"

리오는 대답하려고 했으나 목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힘들게 끄덕였다.

"히히.. 그럼 ..나 지옥 안 간다... 성자님이 나.. 사.. 랑.. 한.. 댔.. "

그리고 아이는 잠잠해지더니 축 늘어졌다.
리오는 눈을 감고 작은 아이의 시체를 더욱 더 꼭 껴안았다. 나다가 주위를 살펴보니 샤니 외에도 나환자아이들의 시체가 주변에 있었다. 아마 여기서 아이들을 학살한 것이리라. 나다는 샤니가 그렇게 죽은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꼭 유치한 연극을 한 것만 같았다.

'이 작은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이 아이가...'

시체를 안고 흐느끼는 리오의 마음의 외침이 나다의 가슴속에 메아리치듯 울려왔다. 리오는 슬픔에 이성을 잃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신의 벌을 받았다구요? 나환자는 지옥에 간다고? 이런 작은아이의 어깨에.. 이 작은 어깨에 그런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째서.. 왜!'

나다는 짜증이 났다.

'이젠 더 이상 듣기 싫다! 제발 그만해!'

시케는 샤니를 안은 리오를 안았다. 그리고 반과 드와인과 야크는 각자 생존자를 찾기 위해 흩어졌다. 하지만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다. 완전 전멸.
나다가 야크에게 짜증스런 말투로 물었다.

"이렇게 많은 수인데, 그래도 산 사람이 있겠지?"

"그럴 것 같지 않아. 저길 보라구."

일행은 야크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나환자 마을을 무참히 유린한 뒤, 병사 몇몇이 시체 사이를 뒤지며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을 창으로 확인사살하고 있었다. 몇몇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한 병사가 그들을 보며 거만하게 외쳤다.

"당신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얼씬거려? 여기는 악마에게 저주받은 문둥이들이 가득 있는데."

병사는 아이의 시체를 안고있는 리오를 보더니 어이없어했다.

"빨리 그거 버려! 미쳤나? 그따위 더러운 문둥이 시체를..."

리오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샤니라고 합니다. 비록 병에 걸렸지만 맑고 쾌활한 아이였지요."

그리고 고개를 홱 돌려 병사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그따위 더러운 문둥이 시체'가 아닙니다!"

나다는 약간 화가 났을 뿐 리오처럼 감정적으로 휩쓸리진 않았다. 나다는 병사에게 공손히 물었다.

"여기 있던 사람들은 다 이렇게 된 겁니까?"

흥, 하고 코방귀를 뀐 병사가 답했다.

"사람? 아, 문둥이들? 다 청소해버렸지."

"청소?"

"우리 임무는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것이지. 문둥이, 병신, 거지, 부랑자. 그리고 .."

병사는 나다와 드와인을 흘끗 보았다.

"..유색인하고 드워프족도 말이지. 노랑이들은 다 소집이야. 깜둥이도."

"뭐이? 노랑이? 소집이라고?"

병사는 히죽 웃으며 나다를 쳐다보았다.

"위대한 백인을 받들어야 하니까. 일단 다 소집하고 번호를 매겨야 해. 만약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면... 어때? 너희는 누구 소유야?"

병사는 나다와 드와인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소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드워프족의 후예인 드와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다도 점점 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흐으, 하고 웃던 야크는 머릴 긁으며 한가하게 말했다.

"너희 인간들은 정말 골치아프단 말이야. 뭐뭐라구? 난 다 외우지도 못하겠군. 단지 알만한 건 내 마음에 안든다는 거야. 어때, 반. 몸 좀 풀자구."

병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 이런 외팔이자식이?"

병사의 그 한마디는 실수였다. 야크는 병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아아악!"

그 비명을 신호로, 여기 저기 흩어져있던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냐?"

"노랑이 하나하고 외팔이 병신 하나가..."

다음 순간 나다는 놀라고 말았다. 퍽!하고 병사를 친 것은 야크가 아니고 리오였다. 별로 주먹은 세지 않았지만 사제의 공격에 병사는 멍해졌다. 병사는 불같이 화를 냈다.

"빌어먹을 성직자라고 봐줬더니... 억!"

리오에게 또 한대 맞은 병사는 바로 맞받아쳤다. 리오는 병사의 일격에 얼굴을 맞고 꼬꾸라졌다. 그러나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나 분노에 찬 눈으로 다시 병사에게 덤벼들었다. 리오가 사람을 공격했다는것에 그저 놀라 멍하니 보고 있던 동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병사들을 제압했다. 십여명의 병사가 덤벼들었지만, 겨우 십여명 따위의 병사가 분노에 찬 야크와 반, 시케 그리고 드와인을 당할 수는 없었다. 일행은 오히려 병사들에게 미친듯이 덤벼드는 리오를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시케마저도 이런 리오의 모습을 처음 본 지라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애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애가 무슨!"

리오는 나다와 반에게 양 손을 붙잡힌채 병사들을 향해 울부짖었다. 나다도 역시 당황하여 외쳤다.

"야! 야, 정신차려! 너 왜이래!"

"이거 놔요! 말해봐! 왜 죽인거야, 왜! 왜!"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지금 뭐하는 것이냐?"

나환자촌을 쓸어버린 부대 한 무리와, 그들을 인솔하는 기사가 나타났다. 기사는 나뒹굴어진 병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일행은 잠시 주눅이 들었다. 십여 명이면 몰라도, 백여 명이 넘게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한바탕 싸움에 흥분한 야크는 병사들의 숫자를 보고 더욱 신이 나서 외쳤다.

"야, 너희들 한꺼번에 덤빌래? 덤벼! 이 자식들아!"

기사는 말 위에서 비웃었다.

"이것 참 흥미롭군. 우릴 다 이길 수 있다고?"

거대한 검을 비껴든 야크가 척 하니 나섰다. 그의 거대한 몸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는 불타오르는 전의와 같이 느껴졌고, 더욱이 이글거리는 붉은 갈색 눈은 좌중을 압도했다.
호승심이 불끈 일어난 기사는 말에서 내렸다. 그는 야크와 일행을 향해 말했다.

"만약 나를 이긴다면 공무집행방해죄를 묻지 않겠다. 하지만 진다면..."

야크는 더 이상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의 거대한 검이 기사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기사는 야크에 비한다면 터무니없이 가는 검을 들고 야크의 검을 쳐냈다. 야크의 거대한 힘에 기사의 검이 웅웅거렸다. 기사는 감탄했다.

"호,"

야크에게 감탄하는 말이지만, 상대에게 감탄할 수 있을만큼 기사도 여유롭다. 일행은 뒤로 물러섰고 병사들도 기사의 명령대로 물러섰다.
챙! 캉! 치짓!
검이 부딪히는 소리는 리듬을 타고 공중을 갈랐다. 야크가 아무리 마룡석때문에 지치고 팔이 하나 없어져 검에 대한 감각이 혼란스러워졌다 해도, 야크의 검을 받아내는 기사는 대단한 것이 분명했다. 야크는 그 거대한 검을 마치 가는 나뭇가지인양 소용돌이처럼 휘둘렀다. 그러나 기사는 하나하나 정확하게 쳐내었고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동작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다가, 돌연 기사가 뒤로 물러서더니 손을 들어 야크에게 말했다.

"그만 됐어. 외팔인데도 대단한 검사군. 당신과 같은 사람은 존경한다."

돌연한 기사의 칭찬에 야크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기사는 얼굴을 험악하게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여기 문둥이들처럼 추악하고 해악만 끼치는 것들은 용서할 수 없어. 그들은 버러지보다 못하다. 모두 청소해 버려야해."

"도,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리오의 울부짖는듯한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기사는 흔들림없는 어조로 차갑게 잘라 말했다.

"아니다. 우리는 신을 위해서 쓰레기를 청소한다. 신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우리 인간, 특히 백인은 그 지배자. 열등한 자들은 신이 정하신 적자 생존의 원칙에 따라 사라져야한다."

나다는 기가 막혔다.

"야! 누가 너희한테 그런 권한을 줬어? 누가 그랬냐구!"

화가 나서 외친 나다의 말에 기사는 그를 흘깃 보았다. 그리고 다음순간 기사의 눈에는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역시 열등한 종족답군. 싸움이 일어나 위험해질 땐 한발자국 비켜서서 피하다가 안전한 듯 하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서서 떠드는구나. 내 말을 이해 못하겠나? 역시, 너희는 멍청하니까 모르겠지. 지금의 세상을 보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인간, 우리 백인인 것이다! 우리의 찬란한 문화와 과학, 미개한 너희들이 어찌 알 것인가! 미개한 유색인들을 개화시켜 준 것도 바로 우리 너그러운 백인이 아닌가!"

"뭐야?"

"세상을 보라. 세상을 이끌어 가는 문화는 누구의 것이지? 바로 우리 백인의 것! 의식, 사회, 과학, 문화, 마법.. 그 모든 것을 보라. 역사를 보라. 흥, 미개한 것들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

기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신의 뜻을 받들어, 악하고 추악한 것은 모두 처단되어야 한다. 오크나 고블린 같은 사악한 피조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인에게 빈대 붙는 병신들, 거지들, 도둑들... 그런  것들은 다 죽어야 한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냐? 드워프의 도끼 맛을 좀 봐야겠어!"

드와인이 노기충천하여 외쳤다. 그러나 반은 그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 기사시여. 당신은 그 유명한 케이와이단의 일원이시군요."

"그렇다."

"저의 동료들이 실수하였습니다. 그럼 저희는 실례하겠습니다."

케이와이단이란 소리에 반과 시케와 나다는 얼굴표정이 변했다. 반의 말을 끝으로 반과 시케와 나다는 씩씩거리는 야크와 리오와 드와인을 끌고 화급히 마차로 갔다. 일단 서방의 사정을 모르므로 지금의 상황을 판단할수 없는 야크는 화가 나긴 했어도 동료의 의견을 존중해 말없이 따라와 주었다. 그러나 야크는 마차 앞까지 오자 반의 손을 뿌리치며 물었다.

"케이와이단이 뭐길래 그 한마디에 사색이 되어서 도망친 거냐?"

"케이와이단은..."

시케가 말했다.

"그들은 극우 백인 우월 단체에요. 그들은 자신들만이 오직 신의 선택을 받은 인종이며, 그 외 엘프나 드워프 심지어 같은 인간인 황인이나 흑인 모두를 열등하다고 보지요. 오크나 고블린은 말할 것도 없구요."

"뭐얏!"

드와인이 흥분하여 외쳤다. 시케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세력은 막강해요. 이타냐 도처에 그 세력이 흥성하고 있죠. 그들에게 잘못보이면 언젠간 암살을 당하고 말아요."

"그래서, 무서워서 도망쳤다?"

야크의 말이 험악했다. 나다는 시케의 말을 거들기로 했다.

"정면으로 덤비기보다는 좀 우회하는 게 어때?"

모두들 나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케이와이단 녀석들은 골치 아픈 것들이야. 더욱이 자신들은 신의 뜻을 행하는 거라고, 선을 행하는 거라고 믿거든. 그리고 백인 외의 종족은 아무리 잔인하게 죽인다 해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쓰레기를 처치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지. 정면으로 붙었다간 손해라구. 엄청 진드기들이야.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일단 우리 목적은 생존자를 찾는 거니까,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뭐 생존자가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나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는 화광이 충천했다. 모두 일어나 보니 케이와이단이 나환자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화염은 무심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나환자들의 고통에 찬 육신을 땅으로 돌려보내었다. 나다는 그 동안 리오가 몸을 아끼지 않고 돌보아주었던 환자들이 재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리오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나다는 리오의 무너지는 듯한 마음을 찌릿하게 느끼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성자가 나타났다는, 헛된 명성에 이끌려 험한 여행도 마다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나환자들. 그들의 작은 희망에 답해주지 못한 것에 리오는 항상 괴로워했다. 그들이 죽어간다. 리오는 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

Posted by 리오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