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1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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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문둥이의 성자 (2)





"쟤 정말 성잔가부다."

제멋대로인 야크조차 이렇게 말했다.

"후광까지는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서방에서 '일별의 빛'이라니! 젠장, 동방에서도 보기 힘든걸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동 서방이 바뀌었나?"

"일별의 빛이 도대체 뭐야?"

나다가 묻자 야크는 으음, 잠시 신음하더니 답했다.

"우리 동방에서는, 모든 신과 존재들의 궁극 목적은 수련을 하여 높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헌신이나 수련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 일별이란 것을 맞게 돼. 그건 순간이지만 궁극의 본질을 맛보는 것이지. 하지만 극히 드물어서, 높은 단계의 수련자도 평생 일별의 빛을 못 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보기 드물어.
이 일별의 단계를 넘어서서 돈오를 이룬 것이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조차 넘어선 것을 해탈이라 한다.
어쨌든 일별의 빛은 일별의 순간, 즉 깨달음의 본질을 맛본 순간 순간적으로 너희들이 보았듯이 황금빛이 갑자기 방사되는 것을 말한다. 그 황금빛은 세속의 눈으로 보기엔 치료의 효과가 있지만, 꼭 다 그런 건 아니야. 사람마다 경우의 수가 다르니까."

복잡해서 영 이해가 가지 않자 나다는 괜히 부아만 돋았다.

'우씽! 그래도 난 싫어. 나한테 저 녀석은 근접할 수 없는 고귀하신 성자가 아니라, 멍청하고 감정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 같은 내 친구라고!'

친구...
나다는 생소했던 이 단어를 입안에서 돌돌 굴려가며 스스로 당혹해했다.

"우씨. 그럼 나도 존댓말 써야하나? 음, 그럴 순 없어. 난 비록 이젠 무늬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신룡이라구!"

동방에서는 깨달은 자를 모두가 존중했다. 결국 신룡도 나름대로 수련에 의해 승천한 존재다. 만약 깨달음이 높다면 제아무리 천계에서 떵떵거리던 신이라도 무릎꿇어 존중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크는 원래 제멋대로라 부처 앞에서도 절대 무릎꿇지 않았다. 아니, 아예 만나지 않았다. 게다가 뛰어난 전투력으로 신마전투만 다닌 야크는 일별의 빛을 본적이 거의 없었다. 동방과 남방에서도 깨달음의 한 증표인 일별의 빛은 희귀하고 보기 힘들었다.
야크의 쓸데없는 중얼거림이 듣기 싫어 나다는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리오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야, 리오. 너 어디가?"

"저.. 나다."

몰래 가려다 들킨 리오는 나다를 보고 더듬거렸다. 그러나 리오가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나다의 낯색이 변했다.

"뭐? 문둥이 마을을 둘러보겠다고? 너 미쳤냐?"

리오는 이전에 자신이 나다의 마음을 읽었을 때 그가 난처해하던 것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이젠 반대가 되었다.

"내 마음 다 읽어요. 하하, 갔다 올께요."

"너 미쳤어? 아님 죽고싶어 환장했냐?"

"야크님에게는 비밀로 해줘요."

말을 마친 리오는 이미 어두워진 나환자들의 마을을 향해 갔다. 말려도 소용 없을 것 같자 나다도 역시 따라나섰다.

'어떻게 되겠지 뭐. 저 똥고집!'

리오와 나다는 어둑어둑한 나환자의 마을로 들어섰다. 움푹 파여진 거대한 공터 드문드문이 갈라진 틈과 같은 동굴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사이마다 사람들이 있었다. 가끔가다 집도 보였지만 거의 쓰러질듯하다. 전체적으로 구질구질하고 더러웠다.
나다와 리오는 높은 곳에서 지저분한 나환자들의 거처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요, 나다."

"음, 되게 드럽다."

리오는 나다를 보고 식 웃었다.

"맞아요, 우선 저쪽 동굴을 청소하고 모두 그리로 옮기는 거에요. 그리고 저 쓰러질 듯한 집은 모두 철거하고, 그리고 저기 숲 보이죠? 새로 집을 지어야겠어요. 이번에 완쾌한 사람도 꽤 되니까 금새 될 거에요."

황당해진 나다가 리오를 쳐다보았다.

"잠깐, 잠깐, 너?"

"그리고 저쪽에 강이라기엔 뭣하고.. 좀 큰 시냇물이 하나 보이죠? 거기서 물을 끌어다 오는 거에요. 그럼, "

리오는 아예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 여기저기 한쪽 눈을 감고 재보았다.

"음. 우물을 파는 게 더 낫겠는데, 이 근처에 수맥이 있을 런지. 우선 환자들한테는 위생이 중하니까, 빨래가 가장 큰 일이에요. 빨래터를 크게 지어야지요. 물이 잘 빠지게... 그리고..."

"너 무슨 소리야! 뭐 어쩌려구!"

나다가 외치자 리오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대로 갈 순 없어요, 나다."

"너!"

갑자기 뒤쪽에서 텁텁하고 쾌활한 말이 들렸다.

"성자님, 건물 짓는데 이 드워프를 빼시다니, 섭섭하구만요."

뒤돌아보니 드와인이 서있었다. 그는 리오 옆으로 성큼성큼 와서는 바닥에다 선을 그어가며 설명했다.

"보세요, 원래 건물들이 이렇게 서 있는 것은 자체가 통풍과 일광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빨래터는.."

나다는 어이가 없었다.

"이봐! 외로운 산의 저주 풀러 안 갈꺼야?"

드와인은 나다를 슥 쳐다보더니 말했다.

"마법사님과 레이디께서 잘 할거야. 우리 고향은 아직 끄떡없어."



다음날부터 작업이 시작되었다. 다들 팔을 걷어붙이고 일하여 터가 닦여 갔다. 드와인은 설계도와 펜을 들고 바삐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지시했다. 그는 계속 중얼중얼 투덜거렸다.

"인간들은 도대체가 손가락이 다 엄지발가락인가! 만드는 꼬락서니하고는...."

"지금 이쁜 거 따지게 생겼냐?"

작은 통나무를 낑낑거리며 들면서 나다가 드와인에게 투덜거리며 대꾸했다. 그는 거대한 나무를 들고 가뿐히 걸어가는 야크를 보고 한숨지었다. 그 모습을 본 리오는 팔을 걷어붙이고 다가와 나다가 들다만 통나무를 어깨에 지고 갔다. 야크가 복구시켜준 리오의 몸은 약했지만 그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통증이 와도 말없이 참아서, 통나무를 들고나면 어깨에 시커먼 피멍이 드는데도 내색도 하지 않았다. 통나무를 지고 가는 리오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나다는 어깨를 주물주물하다가 슬그머니 구석으로 피했다. 날씨가 꽤 덥다.

"또 수작부리냐?"

지나가던 반이 나다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탄탄하긴 하지만 날씬한 몸매인지라, 거대한 통나무를 든 모습이 지극히 놀라워보이는 시케가 그런 반을 보고 나다의 변명을 해주었다.

"반, 무슨 소리야. 나다는 환자라구. 심장이..."

"저 자식 다 나은 거 시케도 알잖아!"

"알았다, 알았어!"

신경질이 내며 나다가 일어섰다. 그때 공중에서 리오의 신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이리와 봐요! 와하하!"

그는 겨우 틀을 잡아놓은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두 팔을 펴고 마구 웃었다.

"어억?"

리오의 몸이 균형을 잃더니 밑으로 쑥 떨어졌다.

"야 임마!"

"꺄악!"

그런데 리오의 발끝이 지붕 꾝대기의 나무에 걸려 추락하던 몸이 멈추었다.

"와하하! 어때요, 사제지만 나도 균형감각이, 이?"

리오의 로브가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면서 보자기처럼 상체를 싸버렸다. 리오는 바둥거렸다.

"너 가만있?"

야크가 뭐라 하기 전에 벌써 시케가 그 밑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며 향해 외쳤다.

"뛰어내려요!"

"뭐야?"

황당해하는 나다와 달리 리오는 나무를 지탱하던 발에 힘을 빼고 밑으로 쑥 떨어졌다. 떨어지는 리오를 시케가 받으면서 둘은 같이 넘어졌다.

"어이구 저 바보 같은 놈!"

나다는 주먹을 휘두르며 욕하다가 반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의 얼굴은 슬픔과 실망으로 시커멓게 되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리오에게 달려가서 한 마디씩 하고 유쾌하고 웃고 있었다. 야크의 꿀밤은 다른사람에게 있어서 구타나 다름이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리오는 웃으며 참고 있었다.
나다는 반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리오가 앞도 보이지 않으면서 지붕에서 떨어질 수 있었던 건... 시케를 믿었기 때문이야."

얼빠진 듯 반이 중얼거렸다.

"시케가 리오에게 그냥 떨어지라고 할 수 있었던 건... 리오가 그럴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야."

"니가 포기해라, 반."

나다의 말에도 그는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나다도 옆에 앉아 쾌활하게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사람의 행복은.. 다른 한 사람의 불행을 전제로 한 것일까?
나다는 괜히 서글퍼졌다.



"아도니스님도 같이 왔으면 좋았겠죠?"

리오가 드와인에게 빙글거리며 묻자 훌륭한 건축가인 드워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정원을 가꾸는 덴 엘프 따윈 필요없다오. 녀석들은 나무에 전혀 손을 대지 않거던. 완전히 야생으로 만들어버려. 뭐니뭐니해도 뛰어난 정원사라면 호비트지."

"아, 호비트...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숨어 사니까 보통 인간이 볼 기회는 없을거야."

리오와 드와인은 정원까지 가꾸려고 했다. 꽃도 심고 조촐하지만 길도 닦고...

"리오야, 어지간히 해라. 아예 마을을 세워라 세워. 너 이러다가 문둥이들 집에 누워보지도 못하고 세상 하직하겠다. 적당히 해."

지겨워진 야크가 한마디 크게 했다. 작품이라도 만드는 양 흥분해서 설계도를 보던 드와인과 리오가 찔끔했다.

"설계도를 놓고 가시면 저희가 차차 짓지요. 일단 환자들이 걱정되니까 집은 대강 비바람 피할 정도만 지어놓고 들어가면 어떻겠습니까?"

브라이언도 야크의 의견을 거들었다. 그렇게 해서 지저분의 극치였던 나환자의 거주지는 짧은 시간에 단정하게 되었다. 단지 그 구조가 수도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랑의 집'과 비슷하게 생겼다 해서 리오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주 수도원을 지어놨군. 으이구."

나다는 첫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환자들이 새 집에 입주할 때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가 서멀서멀 기어다니는 꼬죄죄한 옷을 입고 새집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화창한 날을 잡아 거동 가능한 사람들은 모두 모여 냄새나는 옷을 벗겨 삶아 빨고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옷은 태워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급히 준비한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거기다 몸이 더러우니 그냥 옷을 입힐 수도 없고 다 씻겨야 했다.
그리고 그날 하루가 다 지났을 때 다들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전부 누워서는 골아 떨어졌다.

"나다,"

"왜."

리오가 누워서 천정을 보며 말했다.

"기분 좋지요?"

"뭐가."

"같이 일해서.. 그리고 저분들이 이제 깨끗한 집에서... 으악!"

발목이 세게 차여서 리오는 발을 잡고 낑낑댔다. 나다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리오를 쏘아보며 말했다.

"날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알겠어?"

"...."

"결국은 그 얘기 아니야. 빈둥거리면서 게으르게 부랑생활하다가 땀흘려 일하니까 어때요. 선행을 베푸니까 어때요. 그럼 나는 감격스런 얼굴로 이렇게 말해야겠지? 오오, 이것이야말로 삶의 보람, 드디어 느꼈어! 앞으로는 열심히 살아야지. 오오 신이여! 드디어 게으른 나다가 인간같이 변했구나! 만세!"

빈정거리는 말에 리오는 잠자코 있었다.

"날 니 틀에 껴 맞추려 하지 말아. 알겠어?"

"으이구, 저런 건 그저 딱 안 죽을 정도로만 패야되는데."

야크게 거칠게 불퉁거렸다.

"리오야 관둬라. 저 자식은 언제 큰 코 다치기 전엔 소용없어. 놔둬 놔둬. 잠이나 엎어져 자!"



다음날 새벽 리오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 나다는 꿈속에서 리오가 뭘 하는지 다 보았지만 그냥 잤다.
리오는 씻고 신에게 기도를 올린 다음 잠시 명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청소를 했다. 대강 청소를 마친 후 또 아침식사 준비. 식구가 많으므로 양도 많다. 그렇게 한참 준비하다보니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리오는 식사당번에게 음식준비를 넘기고는 세숫물을 한 통 가득 담아 환자들에게 갔다. 제 손으로 일어날수 있는 사람은 세숫대야에 물을 채워주고 거동할 수 없는 환자들은 직접 씻겼다. 물론 혼자 다할 수는 없다. 리오의 빛을 보고 기적적으로 나은 사람들이 함께 일을 도왔다.

"야, 나다, 일어나!"

깨우다 못해 반이 나다의 궁둥이를 찼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씨 좀 더 자자..."

요란벅적하게 세수를 마치고 나서 아침식사를 나누어주었다. 물론 스스로 먹지 못하는 사람은 먹여주었다.
퍽!
접시가 날아왔다. 때그르르르... 나무접시는 바닥에 요란하게 굴렀다.

"저리 꺼져! 이 못된 녀석, 지옥에나 가버려!"

어떤 노파의 거친 욕설이었다. 스파크가 음식을 먹여주다가 노파의 비위를 거슬렸다. 몸이 아픈 환자들 중에는 신경질이 심한 사람이 많았다.

"아니 이 할망구가! 떠먹여 주면 고마운 줄 알고 받아나 먹지, 이이!"

"아니 이 놈이!"

새 음식그릇을 들고 다가간 리오가 웃으면서 끼어 들었다.

"할머님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죠. 나이드신 분께서 이해해 주세요."

"으윽! 성자님! 이 할망구가 성자님을 욕했다구요!"

스파크가 리오에게 마구 변명했다. 그러자 리오가 낮게 말했다.

"그런데요."

"네?"

"욕할 만 하지요. 욕할 만 하니까 욕한 겁니다. 잘하셨어요."

리오는 다시 웃으며 노파에게 말했다.

"드셔야지 욕할 기운도 나지 않겠어요?"

빈 그릇을 들고 지나가던 나다가 또 쫑알거렸다.

"자학해라 자학해. 으이구 답답한 놈, 그래 너 성자다. 아이구 성자님!"

리오는 나다를 장난삼아 노려보았다.

"당신이 성자님이야?"

노파의 험악한 질문에 리오가 웃으며 돌아보았다.

"전 성자님은 아니고, 리오라고?"

갑자기 노파가 그릇을 그의 얼굴에 집어던져 리오는 음식물을 온통 뒤집어쓴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에 바로 맞았기에 그는 한참동안 고통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 아들 살려내! 내 아들 살려내란 말이다!"

노인이 악을 썼다.

"왜 사람 차별하는 거야! 저 스파큰지 하는 녀석은 살려주고, 왜 내 아들은 죽였어! 살려내!"

리오는 순간 얼굴의 고통도 잊고 멍하니 노파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인은 리오의 가슴을 여윈 손으로 쿵쿵 치더니 붙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녀석이 감기에 걸려서.. 그래서 성자님 왔다고 뛰쳐나가려는 녀석 붙잡고 못 나가게 했는데... 내가 잡지 않았으면 그 녀석도 낫는 건데.. 결국 그 감기를 못이기고 죽고 말았어..당신은 성자님이니까 내 아들 살려줘요...제발 살려주세요..."

통곡하는 노인을 안은 리오는 멍한 얼굴로 내내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침식사시간이 끝나고 밤새동안 대소변을 흘린 사람들을 모아 대대적으로 씻겼다. 사람들을 씻기면서 내내 침울한 리오에게 나다가 다가가서 한마디 물었다.

"괜찮냐?"

"...네."

얼굴에 시커멓게 멍이 든 리오는 나다에게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는 몸이 복구된 후 피부가 몹시 약해져서 금새 멍이 들었다. 조금만 부딪혀도 시커먼 멍이 든다.
나다가 보기엔 리오의 태도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저렇게 마음이 약해서 세상은 어떻게 살았지?'

그리고 또 점심식사. 그리고 빨래. 빨래가 정말 큰일이었다. 산더미같이 쌓인 빨래를 일일이 다 삶아야하고 게다가..

"으윽! 또 똥이야! 이게 옷이냐 똥걸레지?"

옷은 원래가 말이 아니었다. 빨래에 진력난 나다가 청소를 자청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봐! 또 똥쌌니?"

나다는 질려버렸다. 거기다 차라리 대변이면 낫지. 고름이나 혹은 나병으로 떨어진 손가락 등이 나올 때면 나다는 거품물고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체를 볼 때와는 또 다른 기분나쁨이었다.

"빨래 짜는 거나 도와줘요."

"건 깨끗하겠군."

그렇지만 그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물을 흠뻑 머금은 무거운 빨래를 양쪽에서 짜대는데, 원래 기운이 딸리는 나다는 몇 번 짜자 온몸에 아프지 않은데가 없었다.

"겨우 빨래짜는 거 가지구."

야크는 나다의 손에서 빨래를 빼앗아 들고 한쪽을 발로 밟고 한 팔로 돌려 짰다. 우두둑! 하더니 빨래는 걸레가 되어버렸다.

"무식한 놈! 찢어라 찢어잉?"

투덜대던 나다는 물에 젖은 빨래가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체험해야만 했다.
그리고 또 저녁식사다.

"제길 하루종일 쳐 먹고 싸대기만 하니.."

그리 고상하지 못한 나다의 말에 시케가 잠시 흘겨보았다. 나다를 붙잡고 구석으로 간 리오는 모처럼 심각하게 주의를 주었다.

"나다, 저분들에게도 귀가 있어요. 그런 말은 좀 삼가해줘요."

"으이구 정말! 저것들이 가만히 앉아서 먹어대고 싸대고.. 지겨워 지겨워!"

리오는 나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다는 불평을 멈췄다.

"내 몸이 불편할 때도.. 나다는 저에게 밥도 먹여주고 대소변도 치워줬잖아요."

부드러운 리오의 말에 왠지 부끄러워진 나다가 쫑알댔다.

"그건 너니까.. 제길!"

감사의 눈길로 나다를 보던 리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내키지 않으면 일 하지 마세요."

"증말?"

나다가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난 정말 안한다. 알지?"

"네."

그렇게해서 나다는 병수발 반나절만에 두손 두발 다 들고 핑핑 놀았다. 반을 비롯해서 모두들 노려보고 째려보고 난리가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다가 일할 것은 아니었다. 그날 저녁식사도 끝내고 청소 등을 마치고 나자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하루만에 모두 녹초가 되었다. 거기다가 체계적으로 간호와 치료를 아는 사람은 반과 시케, 그리고 리오뿐이었으므로, 서툰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는 일로도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리오는 피곤에 지친 얼굴에 즐거운 미소를 떠올리며 반과 시케를 격려했다.

"다른 분들이 일에 익숙해지시면 오늘보다는 훨씬 나을 거에요."

저녁식사가 다 끝난뒤 취침시간이 지나서도, 리오는 몇 채씩이나 되는 곳을 다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살펴보았다. 의자며 책상 등 살림살이를 대패질하며 만드느라 바쁜 드와인에게 쿵쿵거리며 뛰어간 나다는 그를 쿡쿡 찌르며 투덜댔다.

"쟤 여기 눌러살건갑다. 드와인, 외로운 산의 저주고 뭐고 쫑이다. 흥."

드와인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리오는 떠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성자님, 조금만 더 있다가 가주시면 안되나요?"

"저 잠들 때까지만.."

"형, 자장가 불러줘!"

환자들에게 이래저래 붙들리는 리오를 보고 야크가 한 마디 했다.

"저러다 쓰러진다. 저 자식 엄청나게 성자 흉내내네?"

말투는 그렇지만 걱정하느라 그렇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나다는 한숨을 쉬었다. 드와인의 얼굴표정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그렇게 해서 천사가 내려와 예언자에게 말했습니다. '신이 그대를 돌볼 것이니 조금도 두려워 말라.' ...그러자 예언자이자 ....성자이신 주난님께서 ....말씀...."

어디선가 겨우 구한 어린이용 경서를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리오는 꾸벅꾸벅 졸았다. 리오는 몰랐지만 그를 주시하고 있는 다른 환자들도 듣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던 리오는 침대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들었다.

"성자님! 샤니한테도 읽어줘요!"

계집아이의 앙칼진 외침에 리오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멍한 얼굴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나병에 녹아 온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아놓고 있었다. 한쪽 눈은 이미 녹아내려 붕대로 칭칭 감아놓았다. 리오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아이의 손가락은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시케가 나다에게 말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과의 접촉이에요. 아기들은 정을 그리워하지요."

"나도 알아. 저번에 내가 고아원에 갔었는데, 누구 하나 안아줬다가 땀뺐다니까."

무슨 소린가 하여 나다를 쳐다본 시케에게 그가 덧붙여 설명했다.

"공평하게 안아달라고, 하나 안으니까 줄을 쫙 서더라구. 그럼 다 안아줘야 된대. 내가 도망가니까 지들끼리 싸우고 울고 난리가 나더라구."

조금 있다가 나다는 턱에 손을 대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난 동정 안해. 그럴만큼 잘나지도 못했고. 그 대신 뭘 해줘야 한다는 생각도 안 해. 저놈이 저러는 거 되게 건방져 보인다. 흥, 지가 진짜 성잔줄 아나봐. 건방진 놈..."

"그런......."

시케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봤자 알아들을 나다도 아니었다. 그냥 시케는 어깨를 으쓱하고 어린 소녀와 이야기하는 리오를 쳐다보았다. 작은 소녀 샤니가 리오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성자님! 노래불러줘요!"

"노래?"

리오는 잠시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그는 음치였다...
그때 나다가 다가가서 리오를 붙잡더니 노래했다.


작은 천사가 어느날 소녀를 찾아와
작은 수호천사가 되었네


"누가 댁보구 불러달랬어요?"

샤니의 앙칼진 일침에 나다는 등골에 식은땀이 좍 났다. 갑자기 어색해진다.

'으윽! 이렇게 쪽팔릴 데가!'

얼굴이 시뻘개진 나다는 괜히 옆에 있던 리오를 쿡쿡 찔러대며 신경질을 냈다.

"야! 내일도 새벽에 일어날거면서, 왜 아직도 안 자냐? 너 죽을래?"

"어, 나다 목소리 좋은데.. 아가야, 이 아저씨가 불러준대, 응?"

"뭐시라? 아저씨?"

"싫어! 싫어!"

고개를 힘차게 돌려 나다를 더욱 무안하게 만든 샤니는 리오를 붙잡고 계속 칭얼대었다.

"그럼 옛날얘기라도 해줘요. 네?"

곰곰 생각하던 리오가 난처하게 웃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 이타냐의 종단의 예언자이신 주난님의 제자중 한 분인 성 마르치니님의 이야기를 해줄께."

"경전얘긴 싫어요!"

또 삐질삐질 땀이 흘러내렸다. 리오는 경전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그가 어릴 때 들은 얘기가 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다. 나중에 책을 많이 읽어서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지만, 당황한 리오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모두 경전이야기 뿐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학술적이고 딱딱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재미있게 풀어서 아이에게 이야기 해줄것인지, 그것도 난감한 노릇이었다. 설사 머리를 싸매고 연구한다 해도 리오에겐 그럴 재주가 없었다. 그는 재미없는 학문을 하는, 재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제였다.
그렇게 리오가 우물쭈물할 때 샤니가 또 한번 재촉했다.

"뭐에요! 노래도 안해주고 이야기도 안해주고! 나만 미워해! 잉잉.."

"아앗! 아니야, 아니야! 그게 그러니까.. 음...."

리오는 당황해서 이야기를 빨리 생각해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머릿속은 하얘지고 어린이용 경전의 이야기만 오락가락 할 뿐이었다.

'으윽, 차라리 노래를? 안돼, 여깄는 사람들을 다 고문할 수는 없어....'

리오가 이렇게 별 생각을 다할 때 샤니가 앙증맞게 웃더니 말했다.

"성자님 바보같애! 그럼 내가 벌 내릴 거에요."

"무슨 벌?"

리오는 함박 웃었다. 차라리 벌받자.

"나 잘때 옆에서 안아줘요."

리오는 웃음을 멈추고 샤니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얼굴엔 간절함이 묻어있었다. 나다는 이 영악한 소녀 샤니가 애초부터 그런 목적으로 리오를 괴롭혔음을 알았다. 아이는 어른의 품에 안겨 자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자기 몸의 붕괴로도 괴로운 어른 병자들이 아이들을 안고 얼레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멀쩡한 어른이라면 나병에 걸린 소녀를 안고 잠을 자기란 불가능했다.
리오는 샤니의 이마를 쓸어주며 웃었다.

"진작 말하지."

웃음을 터트린 샤니는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리오는 샤니의 침대로 들어갔다. 나다가 당황하여 외쳤다.

"야! 임마! 너 미쳤냐!"

"잘자요, 나다. 나갈 때 불 좀 꺼줘요."

"문둥병 옮으면 어쩌려 그래! 너 미쳤어?"

나다의 외침은 너무 컸다. 아니, 아무리 작게 말했어도 이곳의 나환자들은 모두 들었을 것이다. 순간 사방이 싸늘해졌다. 리오는 침착하게 나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다. 내가 병이 옮으면... 난 이미 나다의 친구가 아닌 것이 되어버리나요?"

진지한 리오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할말을 잃은 나다가 우물쭈물거렸다.

"몰라!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리오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때 가서 생각하렵니다. 잘 자요, 나다."
Posted by 리오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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