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0월 25일  


--------------------------------------------------------------------------------



5장. 누군가를 위해 울어 준다는 것 (2)



리오를 재워놓고 나오면서 나다는 문 옆에 쭈그려앉은 시케를 보았다.

'으휴,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됐지?'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시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시케야. 니가 이해해 줘. 저 녀석 저 꼴 된지 얼마 안됐잖아. 성격이 많이 변했어."

"아니오. 전 섭섭해할 자격이 없어요. 전 가짜 진짜도 구별 못한 걸요. 난 자격이 없어요."

"엄청 자학하고 있군 그래. 그렇지만 말이지. 어떻게 알아봤겠어?"

시케를 달래던 나다는 그녀가 화창한 봄 풍경을 보면 기분이 풀어질까 하여 억지로 데리고 나갔다. 그랬더니 저 구석에서 주근깨 반이 툭 튀어나왔다. 그는 내내 시케를 주시하고 있었다.
셋은 화창한 봄날에 피어나는 숲 속으로 걸어갔다. 지금 리오가 요양하는 곳은 잃어버린 엘프들의 숲. 마법사 라니는 리오를 인간마을에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요양하는데는 뭐니뭐니해도 숲이 최고다. 게다가 엘프들은 리오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함부로 동정하지도 않았다. 민감한 리오에게는 마음이 거친 인간들보다는 이곳이 더 나았다.
반과 나다는 한마디씩 시케를 달래주면서 산책했다. 자신을 거부하는 리오를 보며 자책에 빠진 시케에게, 나다는 그의 진심을 말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케, 리오를 이해해 줘. 사실 말이지, 리오는 널 좋아했대."

우뚝 멈춰선 시케의 얼굴에 발그레하니 화색이 돌았다. 반대로 주근깨 반의 얼굴은 시커멓게 굳었다.

'내가 이런 얘길 시케한테 한 줄 알면 리오는 또 나한테 신경질을 부리겠지. 흠.'

하지만 나다는 절망스러워하는 시케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녀는 갑자기 차갑게 자신을 대하는 리오에 대한 당혹감과 가짜리오를 알아보지 못한 죄책감, 그리고 끔찍하게 변해버린 리오에게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감으로 야위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너한테 흉한 자기모습을 보여주기 싫대. 그러니 녀석이 좀 진정될 때까지..."

"도대체 무슨 소릴하는 거야!"

반이 버럭 소리질렀다.

"지금 저 모습이 된 리오가 시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뭐야! 나다, 이 징그럽도록 잔머리 굴리는 녀석! 너 리오를 시케한테 떠맡기려고 그러는 거지? 시케의 미래는 생각해 봤어?"

"반!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분노로 얼굴이 벌개진 시케가 반을 윽박질렀다.

"떠맡기다니! 리오가 짐이야? 리오가 짐이냐구!"

나다는 화가 났다.

"흥, 호의를 오해하는 거 정도껏 하라고. 좋아, 난 떠넘길 생각 없어. 둘이서 잘해봐!"

"나다!"

나다는 뒤꼭지에서 부르는 시케의 외침을 무시하고 방안에 텅 들어갔다. 그런데...

"시케! 시케! 이리 좀 와봐! 빨리!"

시케가 급히 달려왔다. 나다가 잠깐 나간 사이 잠에서 깬 리오는 나다를 찾기 위해 몸을 비척이다가 침대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이 떨어진 벼게에 얼굴이 막혀 질식해 죽어가고 있었다. 부들부들 떠느라 회복마법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케대신 반이 회복마법을 걸고 인공호흡에 들어갔다. 잠시 후, 리오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모두들 다행이라고 안도하는데, 나다는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절망에 다시 섬뜩해졌다.

'이렇게.. 아무 쓸모도 없는... 짐덩이로...난..난...앞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나다는 리오를 안고 춥지 않도록 잘 싸주었다. 그리고 아직도 좀 징그러웠지만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꼭 안아주었다. 그렇지만 리오는 여전히 그를 사로잡은 절망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나다는 시원한 바람이라도 뺨을 스치면 좀 나아질까 해서 리오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몸통하고 머리만 있다 해도 좀 무겁긴 했다. 나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아빠가 된다면 말이야, 애 하나는 잘 볼 거 같아.'

먹이지 입히지 목욕시키지 게다가 용변까지! 나다는 질색팔색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리오도 굉장히 수치스러워했다.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어깨를 부르르 떠는 것을 보면 나다도 리오가 불쌍해졌다. 하지만 나다가 리오를 수발하면서 뭔가 한 가지를 하고 나면 시케는 그를 마구 닥달했다. 전에 목욕시킬 때 리오를 물 속에 빠뜨린 후로 시케는 나다를 못미더워했다. 그렇게 닥달할 때면 그 소리를 들으면서 리오는 더 비참해했다. 그렇게 리오가 수치심과 절망감에 우울해졌을 때 나다는 리오를 안아주었다. 그러면 리오는 비참함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다는 리오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방 바깥으로 나왔다. 리오도 크게 싫어하진 않았다. 그러나 나다는 일단 안고 나오긴 했지만, 어떻게 할지 몰라 문밖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에구 무거워.'

그 때 멀리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오 저 녀석 왜 저렇게 됐지? 금방 웃으면서 다 털어버릴 것 같았는데."

야크의 목소리다. 그리고 곧이어 마법사 라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오랫동안 무적의 몸으로 살아서 잊었어. 그 고통과 절망을 말이야. 하지만 먼 기억을 더듬어보게. 수련하기 이전 이전 아주 먼 옛날을... 아무 능력도 없던 때를. 지금은 성자님이 미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라고 봐야 될걸세."

"흐음. 그런가?"

실제 라니의 본체인 현룡은 동방에서 함께 건너온 다섯 용중 지(智)를 상징하는 지혜로운 용이었다. 청룡은 인(仁), 적룡은 의(義), 백룡은 예(禮), 현룡은 지(智), 황금룡은 신(信)을 상징했다. 그러나 상징한다지만 상징일 뿐, 개개의 개성에 따라 해석도 틀리고 행동도 달랐다. 그렇긴 해도 현룡이 지혜로운 것은 있는 그대로 사실이었다. 천방지축인 야크도 현룡의 지혜는 높이 샀다. 아무리 라니가 인간모습을 한 화신일 뿐이지만 그래도 야크로서는 드물게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지혜가 가득한 음성으로 라니가 말했다.

"몸이 갑자기 저렇게 된 것에 대해 그는 충격을 받았어. 하지만 저토록 강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니 곧 극복할걸세. 그러나 지금 당장 마음을 정리하길 바란다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야. 조금 더 기다려 보세나."

리오는 나다의 귀를 통해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라니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리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판단하고 이해해주고 있었다. 라니의 리오에 대한 이해는 무조건적인 동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내린 객관적인 이해였다. 리오는 나이 많은 마법사 라니에게 깊은 존경심을 느끼고 감동했다.
그때 라니의 지혜로운 말과는 다른 거친 야크의 말이 튀어나왔다.

"제길!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승천한 신룡으로써, 인간의 몸 복구시켜주는 것 따위,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뭐라고? 나다는 귀가 확 뜨였다. 마법사는 물끄러미 야크를 쳐다보았다.

"안돼."

"왜 안돼."

"백룡이 그랬다면서? 나다를 죽인다면 한쪽이 소멸될 때까지 싸운다고. 그 녀석 한번 내뱉은 말은 꼭 지킨다는 거 알잖나. 나다의 심장을 갈라서 마룡석 꺼낼 생각은 절대 지 말게."

헉, 놀라서 나다는 숨을 잠시 멈추었다.

"형제끼리 싸우는 건 다섯 용 중 누구도 원치 않아. 아무리 그럴싸한 대의명분이 있더라도. 자네가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한다면 나머지 세 형제들과도 의절해야 할걸세."

야크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리오는 좋은 녀석이었어."

늙은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극복하리라 믿네."



나다는 다음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 이야기를 들은 리오는,
나다가 죽기를 바라고있었다!
순간에 번개처럼 스친 느낌이었지만, 리오와 민감하게 연결된 나다에게는 바로 그것이 느껴졌다.

"이, 이 자식이!"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나다는 리오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이 나쁜 자식! 죽어! 너나 죽으라구!"

갑자기 튀어나온 저주의 외침에 놀란 마법사 라니와 야크는 그들을 그제야 돌아보고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나다는 그들을 뒤로하고 마구 달려갔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 올라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속으로 마구 저주하며 욕하며 달려갔다. 화가 난다, 화가 난다!
분노에 휩싸여 생각없이 방으로 들어간 나다는 어두운 방안에서 침대 위에 오그리고 앉아있는 시케를 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다는 그녀를 보고 외쳤다.

"왜 울어! 그 자식은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야! 그놈은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돼! 그럼, 그럼..."

슬픔에 잠겨 놀라지도 않는 시케를 향해 나다가 마구 외쳤다.

"그럼, 그럼.. 그럼 좋은 기억이라도 남을 거 아니야. 좋은 추억이라도!"

시케의 퉁퉁 부은 볼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나다는 눈알을 불안하게 굴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왜, 왜... 그 자식을 죽여야겠어! 아니, 아니야.. 난 이해할 수 있어. 나라면 더 했을 거야... 난 잘 알아, 절망이 어떤 건지... 아니야, 아니야.."

그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음속에는 증오와 허탈과 절망, 그리고, 자신도 미처 몰랐던 리오에 대한 연민이 마구 소용돌이쳤다. 이렇게까지 그에 대한 정이 쌓여있음을 나다 자신도 미처 몰랐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생각과 느낌을 민감하게 공유한 경험은 그만큼 특별했다. 나다는 왠지 저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슬픔을 감춘 리오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진심 어린 리오의 깊은 속내를 마음깊이 좋아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러나 다음순간 나다는 해일처럼 몰아닥친 고통과 절망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리오였다. 그의 고통과 절망이 나다를 지옥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엎드려 고통스러워하던 나다는 증오에 가득차 이를 갈았다.

"이 자식을 죽여야돼... 평생 이렇게 살순 없어.... 이 자식을.."

드와인이 선물한 예리한 단검을 쥔 나다는 단숨에 뛰쳐나갔다. 밖에서는 마법사 라니와 리오를 안은 야크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고개 숙인 리오의 얼굴은 아까 패대기쳐진 덕에 피투성이였다.
살기등등하게 단검을 쥔 나다와 맞닥뜨려지자 라니는 모든 사태를 짐작했다. 그는 야크에게 눈짓해 리오를 내려놓게 했다. 야크는 분노로 눈이 뒤집힌 나다를 보고 망설였다. 그러자 라니는 조용히 야크를 다그쳤다. 야크는 리오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야야악!"

나다는 단검을 들고 리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단검을 들어 리오에게 내리치려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죽이고 싶은 마음,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
그를 이해하는 마음, 이렇게 된 그를 원망하는 마음,
모든 것을 넘어서 그를 좋아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이 소용돌이 쳤다.


그리고 그 순간 리오는 모든 절망과 고통을 잊고
자신을 죽이고싶도록 사랑하는 나다에 대해 감사하면서
미련 없이 그의 손에 세상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리오는 차라리 나다의 손에 죽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는 쓸쓸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 자신도 몸뿐이 아니라
마음마저 망가진 자신에 대해 견딜 수 없었다.


나다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파도와 같이 밀려왔다가 사라지는
거품이란 것을.
자신이 리오를 죽이고 싶고, 연민에 잠기기도 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거품처럼 들끓듯이
아까 리오의 마음에 떠오른 것도 그런 수많은 거품 중에 하나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잘못일수는 결코 없다는 것을.
그도 인간이란 것을, 나다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웃으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나 같이 여관에 묵으면서 느꼈던, 그를 꿈속에서 보면서 느꼈던, 그리고 간호하면서 느꼈던 그 따듯한 마음,
그 순수하고 맑은,
나다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리오의 마음처럼.....
그리고 그 순간에 나다는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라니는 뜻밖의 사태에 놀라서 입을 벌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새 나다는 남은 힘을 다해 단검을 뽑았다. 퍽! 하고 피가 분수처럼 튄다. 나다는 갈라진 상처에 손을 넣고 마룡석을 꺼내려고 했지만 더 이상 기운이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천천히...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나다는 피묻은 손으로 야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빼내...그 지랄 같은 돌뎅..이... ..그럼...그럼 백룡이....나..타..."

"이...이런 미친놈! 그럴 수 없어! 아까 못 들었어?"

야크는 당황해서 마구 소리쳤다.

"반! 빨리 와봐! 이 자식 미쳤다!"

라니는 금새 냉정을 되찾았다. 마법주문을 중얼거린 그는 나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다는 몸이 갑자기 붕 뜬 듯한 기분을 느꼈다. 피가 일순 멎는다.

"나다. 자네 뜻을 알겠네. 자네가 자랑스럽네. 하지만 자네 의도대로 하려면 자네가 해야하네. 그대의 심장에서 스스로 마룡석을 꺼내게."

마법사의 눈에 처량함이 감돌았다.

"난 목숨을 조금 연장해 줄 수밖에 없어. 그대는 죽을 걸세..."

나다는 기운 없이 웃었다.

"키...키킥, 그래? 유감..이군....그치만...됐어..크큭...."

무슨 마법을 걸었는지 다시 나다의 손에 기운이 돌아왔다.

'아까보단 기분이 좋아. 아주 좋아.... 무지 아프지만 말이지...키킥...'

나다는 갈라진 상처 안에 손을 넣었다. 뒤적뒤적... 그리고 그 빌어먹을 마룡석을 꺼냈다. 그리고 다음순간, 몸은 땅으로 꺼지는데 의식은 갑자기 공중으로 수욱 들어올려져 약간 어리둥절했다.
나다는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자신이 보였다. 심장에서 피가 콸콸 나오는데, 한 손에는 핏덩이를 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놀란 비명소리. 그 모든 것이 무심하게 보여졌다. 나다는 그냥 공중을 맴돌고 있었다. 아래를 보니 무슨 꼬리 같은 것이 가늘게 자신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

-친구를 위해서였나?

나다처럼 공중에서 사람들을 내려보는 자. 그는 가끔 보였던 그 백의검사였다. 사람들은 공중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나다와 백의검사를 보지 못했다.

=아니. 난 그렇게 좋은 녀석이 못돼. 날 위해서야.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애. 난 리오 병수발이나 하고 살 녀석이 아니야. 언젠간 또 일을 저지르고 말테니까. 이편이 더 깨끗하고 안 찜찜해.

시케가 비명을 지르며 나다의 몸을 흔들어댔다. 드와인이 시케를 붙잡았다.
백의검사의 말투는 수면같이 고요했다.

-용기를 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야크는 마룡석을 그냥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냥 집으면 그는 다시 최고의 신룡이 될텐데. 그렇지만 그는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오래 생각하면 안돼. 분위기 잡혔을 때 해버려야지.

피투성이 나다의 손에 쥐어진 마룡석을 라니가 집어 올려, 공중에 쳐들며 외쳤다.

"백룡이여! 시간이 없다, 어서 그 모습을 드러내라!"

백의검사가 무심하게 나다에게 물었다.

-어떤가. 지금 가늘게 연결되어있는 영혼의 끈은 곧 끊어질 것이다.

=....

갑자기 공기가 심상찮아졌다. 우우우, 공기가 울린다. 그리고 눈부신 빛이 공중을 가득 채웠다. 백룡 크리차크라, 거대한 백룡의 신형이 외로운 산의 허공에 눈부신 자수를 수놓았다.

[야크, 네가 나다를 죽인 것인가?]

백룡의 말투가 자못 험악했다. 나다가 그에게 말했다.

=아니야, 회색눈깔. 내가 그랬어.

사람들에겐 나다가 보이지 않았지만 백룡은 역시 신룡이었다. 그는 영혼인 나다도 볼 수 있었다.

"차이, 부탁이 있다! 내 친구들을 살려다오!"

야크가 우렁차게 하늘을 쳐다보며 외치자, 백룡이 엄숙하게 답했다.

[함부로 인간의 운명의 수레바퀴를 거스르지 마라. 야크.]

나다는 전 같으면 화가 났겠지만 이렇게 공중에 떠서 보니 아무 생각도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동방도 아니고 서방의 인간이다. 또 서방 신계에 간섭하려는가?]

얼굴이 붉어진 야크가 버럭 소리질렀다.

"일단 저지르고 보겠다! 너와 나의 빚은 나중에 갚자!"

그러더니 그는 마룡석을 집었다. 라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룡의 음성이 엄해졌다.

[난 식언은 하지 않는다. 야크, 너와 나의...]

야크가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어쨌든, 내가 능력을 찾지 못하면 되는거 아니냐. 그렇지?"

백룡의 음성이 떨렸다.

[너.. 너.. 설마...]

야크가 마룡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룡석은 퍽! 하고 부스러지더니 하얀빛을 품는 가루로 변하여 야크의 손위에서 맴돌았다. 라니가 소리질렀다.

"야크! 이런 어리석은! 그걸 부수면, 그걸 부수면 너는!"

"승천할 때 여의주 하나 버리던 거 기억 나냐."

야크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라니와 백룡 차이는 묵묵히 야크의 손에서 가루가 된 마룡석을 바라보았다. 차이는 폴리모프하여 회색 눈의 은발 청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야크에게 뭐라고 말하려했으나, 야크는 차이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야크는 원래 자질구레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왠지 말을 많이 하고 싶어졌다. 왠지 모를 서글픔과, 인정치 못할 아쉬움과, 알 수 없는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야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셀 수 없는 세월동안 수련해서 만든 두개의 여의주, 만드는 것도 힘들었지만 탐내는 놈도 많았지. 하지만 승천할 때는 하나를 버렸어야 했어. 그걸 지키려고 그렇게 모든 걸 걸었는데... 기억 나는가 말이야. 너희도 그때 버렸으니까 승천했겠지."

"기억난다."

백룡 차이가 쉰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야크의 손에서 떠돌아다니는 반딧불같은 마룡석의 가루에 멈춰져있었다. 라니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야크. 하지만 너는 마지막 여의주를 부수었다. 아니, 그건 여의주가 아니다. 셀 수 없는 세월에 걸친 수련을 한 너 자신이었어. 리오는, 인간은, 인간은 백년도 살지 못해. 그런데 왜, 왜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이냐."

야크는 껄껄 웃었다.

"그때도 모든 것을 버렸기에, 난 그렇기 때문에 승천할 수 있었으니까."

차이도 라니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썽을 피우는데도 여전히 그들이 적룡 야크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그런 면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시케가 안고 있던 리오에게서 흰빛이 감싸이더니 이내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짤막하게 잘린 팔과 다리가 보인다. 빛이 그의 몸을 한번 통과하더니 하나씩 하나씩 새로운 몸이 재구성되었다. 빛이 그의 뭉개지고 태워진 어깨 도막에서 하얀 팔을 그리고 다시 붓으로 그려내듯이 다리를 그리고, 마침내는 뭉개진 눈도 떠졌다. 그리고 깃털이 떨어지듯이 가볍게 시케의 품안으로 떨어졌다. 그의 몸에 남겨졌던 조그마한 흉터도 남김없이 지워지고 하얗게 새로 태어난 듯한 몸이었다.
나다는 기뻤다. 그리고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돌아서려는 나다의 어깨를 백의검사가 붙잡았다.
그때 갑자기 가늘게 떨어질 듯한 영혼의 끈이 쑤욱 잡아당겨졌다. 그리고 저 답답한 자신의 육체로 쑤우욱 들어간다. 순간이지만 백의검사가 미소짓는 것이 보였다.
백룡 차이는 야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혼자 멋 부리지 마라, 형제여. 저 나다 녀석은 내 선물이다."

나다는 끄응, 신음했다.

"제길.. 아파 뒤지겠네... "

그때 나다의 귀에 와장창 거리는 야크의 말이 들렸다.

"너 괜찮겠냐? 저딴 놈은 안 살려줘도 돼!"

나다는 저도 모르게 으윽, 신음했다. 차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가 어이없는 것은 나다를 괜히 살려줬다는 말때문이 아니라 괜찮겠냐고 걱정해주는 말 때문이었다. 솔직히 백룡도 나다가 살든지 말든지 별 관심이 없었다. 백룡 차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여의주 부숴 버린 놈이 남 걱정하는가? 걱정 마라. 난 오백년만 자면 돼."

차이의 몸은 점점 허공으로 투명하게 사라져갔다.

"대책없는 놈. 난 그래서 니 놈이 좋다, 야크!"

야크는 어색하게 웃더니 차이가 다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배웅했다. 라니가 야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늙고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져있었다.
나다는 그 마룡석, 아니 봉인석으로 변해버린 여의주가 야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야크가 얼마나 큰 것을 버렸는지 전혀 사정을 알지도 못했다. 단지 돌맹이 하나가지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동양의 쫀쫀한 용들이 이해가 안 갔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야크에게 감탄하기보다는 이제 제 모습을 되찾은 리오에게만 관심이 갔다.
리오의 표정이 왠지 이상했다.

'표정이 왜 저래? 무언가 믿기지 않는다는? 아니, 화가 난듯한? 아니..'

나다는 벌떡 일어나서 리오에게 달려갔다. 심장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지금 그런 것 따질 때인가. 나다는 리오의 팔을 꼬집어 만졌다.

"우와, 신기하다!"

야크가 나다의 머리를 쿵 쳤다.

"가려가며 장난쳐!"

"우씨 이게 감히 내 머릴 쳐?"

리오는 금새 방금 전까지의 심각한 상황을 잊어버리고 투닥거리는 단순한 두 멍청이들을 꼭 껴안았다. 야크나 나다나 이런 식은 생소했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다. 나다는 어색하게 빈정댔다.

"야, 리오, 이렇게 사람들 많은데, 빨가벗고, 엉? 안 챙피하냐?"

"흠! 마, 맞어. 감기 걸리겠다."

감동에 가득 찬 사람들에 둘러싸인 야크는 어색해서 킁킁 헛기침을 했다. 그로서는 마계와의 전쟁터보다 더 껄끄러웠다. 그러더니 그는 리오를 번쩍 안고는 방안으로 휭 들어가 버렸다. 나다도 그 뒤를 쫑쫑거리며 뛰어갔다.

Posted by 리오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