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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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외로운 산의 불화 (3)
드워프들은 리오를 성대하게 환영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외로운 산의 오래된 동굴을 보수하고 새로운 금맥을 찾아서 새로 캐야 하는데 나무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손은 놓고 있을 정도이지요. 그런데 저 엘프들이.."
드와인은 아도니스를 노려보았다. 아도니스도 질세라 드와인을 노려본다.
".. 마치 모든 숲의 나무들이 제것인양 굽니다. 버팀목이 모자라 많은 드워프들이 광산사고로 죽었소. 그리고 인간들은 동굴로 숨어 들어와 금을 훔치거나 드워프들을 습격하여 보석들을 훔쳐가고 살해합니다."
드와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심지어, 그 마법사는... 아직 건설중이라 불완전한 광산에 지진을 일으켜, 수많은 드워프들이 땅에 생매장되어 살해되었습니다. 그자는...."
리오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인간'이기 이전에 '성자'로서 대해주었지만, 스스로 성자가 아니라고 여기기에 '인간'으로서 부끄러웠다.
"누대에 걸쳐 당신네 드워프들은 우리 숲을 이렇게까지 심하게 훼손하진 않았소. 요즈음 왜 갑자기.."
아도니스가 묻자 드와인이 고개를 저었다.
"외로운 산의 나무들이 모두 말라죽었소. 당신도 눈이 있으면 보시오! 벌거벗은 산을."
"그거야 당신들이 두더지처럼 땅을 파헤치고 나무를 모두 베어버려서...."
"뭐라고?"
엘프와 드워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나다가 투덜거렸다.
'아도니스란 녀석 배짱이 두둑하군. 여긴 드워프의 동굴인데 말이야. 살아나가기 싫은가보지?'
리오가 얼른 질문했다.
"아도니스님, 엘프는 나무와 숲에 대해 정통하다던데, 그렇다면 이곳의 산들이 갑자기 말라죽은 이유도 금새 아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일리가 있다 싶어 드와인은 음, 하고 아도니스의 눈치를 보았다. 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일행은 외로운 산으로 올라갔다.
휘이잉
산은 벌건 민둥산이었다. 암석만 보일 뿐, 말 그대로 외로운 산이다. 흙을 조금 집어 손으로 만져본 아도니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심할 줄이야. 이런 토양에선 나무가 살 수 없다. 우리는 드워프들이 욕심을 부려 마구 베어내어 산에 나무가 사라진 것으로 알았는데."
"흥, 너희는 항상 그런 식이지!"
아도니스와 드와인은 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리오는 어떻게든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막아보려고 아도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아도니스님, 왜 갑자기 땅이 이렇게 됐을까요?"
서로 눈싸움하던 아도니스와 드와인은 고개를 돌려 다시 그 문제에 골몰했다. 아도니스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눈을 감고 주변의 생명을 느끼려고 애썼다.
"이상하군요. 이곳에서는 어느 생명체의 속삭임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다시 엘프가 드워프를 노려보았다.
"산을 배회하는 어둠의 몬스터와 두더지처럼 땅을 파대는 드워프들의 소리만이 들릴 뿐이지! 분명히 당신들이 산을 마구 파헤쳐서 토지가 이렇게 변한 거야!"
"뭐얏!"
야크는 오히려 조용했다. 그는 바위 위에 앉아 뭔가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 갑자기
쾅
적룡이 그의 큰 칼로 내려쳐서 바위는 산산조각이 났다.
"마법이다, 얘들아."
엘프와 드워프와 인간은 붉은 머리의 신룡을 쳐다보았다.
"이건 마법이야. 마법이라기보다는 저주로군. 이런 지독한 저주를 받은 땅에서 뭐가 살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더니 그는 드와인을 보고 말했다.
"야, 난쟁이. 너희는 어떻게 살아남았지? 땅속이라도 온전하진 못할텐데."
드와인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마법, 아니 저주? 그럼 그 동안 많은 드워프들이 죽어나간 것이...."
"흥, 생명력 질기기가 바퀴벌레같은 드워프들이 그래 죽어나가면서 그 이유도 의심해보지 않은 거냐?"
야크가 비웃었으나 충격을 받은 드와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야크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당신은 마법사요? 그걸 어떻게 안 거요? 해결방법은 아는 거요?"
"흥, 미안하군. 난 마법사가 아니야. 난 동방의 신룡이다."
"신룡? 신룡이시라면 동방에서 건너온 신의 사자가 아니십니까?"
순식간에 정중하게 바뀐 드와인의 태도에 야크는 순간 감동해버렸다. 동방의 신룡들은 서방 신마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고 한때 야크도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인계에서 드워프들을 괴롭히는 마룡을 퇴치하기도 했다. 그래서 야크를 쫓겨난 반역자나 말썽꾼으로 보는 엘프와 달리 이 순박한 드워프 전사 드와인은 야크를 '동방 신의 사자'로서 대우해주었다.
"동방의 신룡이시여!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당신의 위대한 힘으로 우리 외로운 산을 구해주십시오!"
드와인은 야크에게 외쳤다. 야크는 여태껏 서방에서 냉대만 받다가 이렇게 떠받들어지니 순간 우쭐한 마음이 들면서 감동까지 받았다. 야크가 눈물마저 글썽이자 나다는 순간 순박한 드와인이 불쌍해졌다.
'안됐군.. 저런 자식을 믿는다니...'
"당연하지! 나만 믿으라구! 내가 다 정상으로, 아니 그전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주지!"
드워프들은 기뻐하며 야크에게 고마워했다. 그래서 리오와 야크는 아도니스와 드와인의 안내를 받으며 산과 숲을 지나왔다. 그러자 멀리에 한창 번성해 가는 인간의 마을이 보였다.
"저희는 여기까지만 안내해 드리지요. 그럼 성자님, 부탁드립니다."
아도니스가 리오에게 부탁했다. 드와인은 야크에게 작지만 단단한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말했다.
"신룡이시여, 그 사악한 마법사를 꼭 응징해주십시오!"
"음! 걱정 말라구!"
드와인은 벌써 일이 다 해결된 듯 감격한 얼굴로 야크를 배웅했다.
야크는 리오를 덥석 옆구리에 메더니 또 와아아 달려나갈 기세다. 나다가 급히 리오에게 말했다.
'잠깐! 리오, 야크 좀 말려.'
"왜지요? 아참, 야크님, 나다가 야크님을 좀 말리라는데요?"
"무슨 소리야? 단번에 쳐들어가서 그 괘씸한 마법사 놈을!"
무식한 야크는 무시해버리고 나다는 리오에게 계속 충고했다.
'먼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한다 이거야. 그리구, 상대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아야지? 지금 무작정 쳐들어가지 말고, 일단 여행자를 위장해서 들어가. 그리고 상황을 알아보라구.'
"음, 나다 말이 맞아요. 참.. 나다가 여기 있었다면 정말 든든했을 텐데..."
야크는 궁시렁댔다.
"답답하게.... 참 내, 그냥 싹 쓸어버리는 것이 ... 험."
그의 옆구리에 매달린 리오가 성질 급한 동방의 신룡에게 나다의 말을 설명했다.
"야크님, 나다가 그러는데요. 온통 봉인당해 능력 쥐뿔없는 뻘건 지렁이가 대책도 없이 어쩌겠다는 건지 한심하다고..으악!"
갑자기 야크가 놓아버려서 리오는 바닥에 굴렀다. 야크는 온통 얼굴이 시뻘개지고 머리가 솟아올랐지만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나다를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다의 말은 일리가 있었기에 야크는 더 이상 군말을 하지 않았다.
리오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나다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어,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음.. 여행자처럼 들어가라면서요?"
'아이구 이 바보야, 이 길은 외로운 산과 엘프의 숲을 지나온 길이라구. 거길 무사히 지나온 게 의심살 거 아니야? 저쪽 길 보이지? 눈치채지 못하게 그리로 가서, 그쪽 길로 온 거처럼 하라구. 알겠지?'
"음, 그도 그렇군요. 알겠어요."
마을의 거리는 활기찼다. 번화한 것이 꼭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생기가 가득 차 있었다. 리오는 무척 즐거운 얼굴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야크와 리오가 펍에 들어가서 맥주를 시키자 주인장이 말을 걸었다.
"사제님이 아니십니까?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드디어 교단에서 우리 마을로 사제님을 보내주신 건가요? 이렇게 외진 마을에 정식사제 분이 오시다니 정말 주난님의 은총이시로군요."
"엇? 사제님이 오셨다고?"
펍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웅성웅성 쳐다보자 리오는 난처하여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아닙니다. 저는 어떤 분을 찾아 여행을 다니고 있지요."
사람들은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장도 실망했지만 곧 밝은 얼굴로 리오에게 물었다.
"사람을 찾고 계신다구요? 이 마을사람이라면 제가 다 압니다만."
머뭇거리던 리오가 물었다.
"혹시, 짧은 백발에 눈빛이 맑은 나이 드신 분을 보신 적이 없나요? 피부는 약간 검지만 황인이시죠. 말이 없으시고 나이에 비해 몹시 정정하십니다."
주인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정도만 가지고는 정부가 부족하군요. 나이 드신 분이 여행하기엔 세상이 좀 험악하지 않나요? 게다가 황인이라니, 글쎄요 못 본 것 같군요."
리오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 자신이 떠났던 여행의 목적인, 그가 찾고 있는 '스승'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다.
둘은 식사를 시키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였다.
"어때, 엘프들하고 드워프들이 또 싸웠다며?"
"쯧쯧, 허구한날 싸우지."
"웃기는 종족들이야"
그 때 펍 안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복장만 보아도 이 마을의 경호대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앞에 앞장선 사람은 마치 집사의 옷 같은 깔끔한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는데 목에는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야크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리오가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볼 때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들 앞에 멈춰 섰다.
"대마법사님의 부탁입니다. 두 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예에?"
리오는 깜짝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비넥타이의 남자를 보았다.
'허걱, 이게 뭔 일이대냐? 시치미 떼! 빨리!'
나다의 말에 리오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이시죠? 저흰 여기 초행이고, 에, 또.."
그때 야크가 벌떡 일어났다.
"제길! 야, 리오야, 그만해. 그 쥐새끼같은 마법사 놈이 어떻게 우릴 안 거야? 가잰다고 범아가리로 곱게 들어갈 줄 알아?"
거칠게 말하며 검을 뽑자 펍 안은 순식간에 냉기가 흘렀다. 와글거리던 마을사람들이 모두 험악한 얼굴로 야크를 쏘아보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우리 위대한 대마법사님을 욕하다니!"
"저 자식 매달아버려!"
"감히 어디서!"
그러나 나비넥타이가 손을 들자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오해가 있나보군요. 저희 대마법사께서는 부탁을 하신 겁니다. 사실, 대마법사님을 뵈러 오신 것이 아닌지요?"
이미 다 들통나버리자 시치미 떼는 것을 포기한 리오가 물었다.
"맞습니다. 저희는 마법사님을 뵈러왔지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하네요."
"따라오십시오."
앞서가는 나비넥타이를 따라 리오와 야크는 밖으로 나갔다. 일행은 마을을 가로질러 한참 가다가 비교적 숲에 가까운 외딴 집에 들어갔다. 그 집은 겉보기도 내부도 초라했지만 벽을 온통 메운 책장에는 각양각색의 서적이 가득했다. 그리고 검소한 침대 위에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긴 흰 수염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검은 색의 로브를 입은 그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대마법사님!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나비넥타이는 리오가 깜짝 놀랄 정도로 노인의 귀에다가 크게 소리질렀다. 늙은 마법사는 졸린 눈을 껌뻑이다가 기지개를 폈다. 할 일없는 시골노인같이 행동하는 '대마법사'를 보자 나다는 기가막혔다. '대마법사'는 하품을 한 뒤 말했다.
"그런가..? 손님이 오셨는데.. 어디.."
그렇게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늙은 마법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졸았다.
"뭐 저런 늙은이가..? 확 그냥!"
야크가 검집을 높이 들자 리오는 말리느라 땀을 뺐다. 그때 갑자기 낯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방 신룡 크리아미드. 추방당한 뒤에도 그 성질 못 버렸군."
눈을 감고 졸고 있던 노인의 말에 야크와 리오는 얼어붙은 듯 잠시 몸이 굳어버렸다. 눈을 뜨고 다시 하품하는 늙은 마법사의 모습은 ,아까와 같이 카랑한 목소리의 주인이라고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 늙은이가 낮에는 식곤증이 심해서... 잠시 산책이나 할까요?"
리오와 야크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늙은 마법사는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았다. 길가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밝게 인사했다.
"대마법사님! 지금 낮잠 주무실 시간일텐데요?"
"응. 일이 좀 있다네. 조니, 방충망은 다 달았나?"
"영감님! 봄나물 뜯어놨는데 스프 끓여드시게 좀 드릴까요?"
"앤디, 영감님이라니! 버릇없이!"
"허허허, 영감님이란 호칭이 뭐 어때서. 나물이라, 거참 향긋하겠구먼. 이따가 메리한테 좀 주시게."
활기찬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애정을 가지고 노마법사에게 인사했다. 마법사도 또한 부드럽게 일일이 다 답변했다. 그렇게 마을을 한바퀴 돌고 나서, 노마법사는 조그만 호수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떠시오, 성자님. 마을을 보신 소감이..?"
늙은 마법사가 호수를 무심히 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질문에 리오가 웃으며 답했다.
"아주 활기차고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참, 그리고 전 성자가 아닙니다!"
늙은 마법사는 웃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해도 사과지요. 적룡 크리아미드가 능력을 모두 봉인당해도 여전히 신룡이듯이...."
그러더니 그는 품속에서 과자봉지를 꺼내어 오리들에게 부스러기를 던져주었다. 오리들은 익숙한 상황인 듯 늙은 마법사가 호수에 나타날 때 즈음 벌써 가맣게 몰려있었다. 야크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엘프의 숲에 불을 지르고 드워프의 광산에 지진을 일으킨 녀석이 아무리 선한 척 가장해도 소용없지. 수작부리지 말고 본론으로 가시지 그래?"
마법사는 야크를 돌아보더니 장난스럽게 얼굴을 찌그리며 말했다.
"거 누가 적룡 아니랠까봐 급하기는... "
그러더니 다시 느긋하게 하품을 한다.
"넌 뭐야? 어떻게 그 사실을.. 오호라, 첩자를 심어논 거냐? 아니면, 마법으로?"
"크리아미드님,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리오는 노마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우없는 분 같진 않습니다.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늙은 마법사는 무심하게 호수를 바라보았다. 야크가 지겨워 하품할 때 즈음, 그가 입을 열었다.
"크리아미드, 나는 동방에서 넘어온 그대의 의형제인 현룡(=흑룡) 크리뚜리야의 화신일세."
크리아미드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현룡 크리뚜리야...? 니가 왜...? 너두 봉인 당했냐..? 아냐, 아냐, 거짓..."
늙은 마법사가 한숨을 쉬었다.
"물론 난 현룡이 아니야. 나는 현룡의 화신인 마법사 라니일세. 난 현룡의 분신이자 화신일 뿐이지. 지금 서방으로 넘어온 동방룡들은 자네 외엔 모두 깊은 잠에 들어갔으니까."
"...무..무슨 일이 난거냐? 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야크의 말꼬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뭐 알 필요 없네. 자네 일이나 신경쓰라구. 하여튼... 성자님, 제가 외로운 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설명을 드리지요."
"엘프고 드워프고 인간이고 다 필요 없어! 빨리 말해, 형제들이 어떻게 된 거냐!"
야크가 버럭버럭 소리지르자 늙은 마법사 라니는 귀를 막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참 시끄럽기도 하다... 알 필요 없어! 말썽이나 피우지 마! 크리아트만이 말하지 말랬다. 이 망나니야, 큰형 말도 안들을 거냐?"
야크는 멍해져서 비틀거리며 나무 앞에 쓰러지듯 앉았다. 늙은 마법사 라니가 야크를 쏘아보았다.
"다 네 녀석 탓이야! 형제들이 네 녀석 하나 복권시켜주려고 고생한단 말이다. 더 이상은 알려고 하지마! 말썽꾸러기녀석."
그러더니 라니는 다시 졸았다. 나다는 어이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조냐?
리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봄바람은 새풀 향기를 머금고 리오의 이마를 스쳤다. 호수에는 잘게 파문이 일어난다. 늙은 마법사 라니는 꼬꾸라질 뻔하다가 번득 정신을 차렸다.
"허허.. 미안하구면. 늙은이가 주책이지...참, 설명해주기로 했지..."
라니는 다시 봉지를 보스락거리며 오리에게 과자부스러기를 던져주었다.
"성자님, 나는 현룡의 화신이지 현룡은 아니라오. 이를테면 이런 거지... 난 부모님밑에서 태어나 잘 자라서 기연을 얻어 마법을 익히고.. 그렇게 늙어갔지.. 그러다가..."
라니의 눈이 반짝였다.
"어느날 깨달았지. 번개처럼. 난 현룡 크리뚜리야의 화신이였어. 그리고 내가 이런 모습으로 자라고 마법을 익힌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지."
리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화신이시면, 현룡 자체는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허허.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우리는 모두 신의 부분이지만 신 자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성자님은 지금 스스로 신이라고 자신할 수 있소?"
"그..그런, 감히 제가 신이라고는..."
리오는 얼굴이 또 빨개졌다. 마법사 라니는 히죽 웃었다.
"우리는 신의 일부이자 신일세. 그렇게 본다면 나도 또한 현룡이지. 그렇지만 난 독립된 개체로서 세상을 살아왔어. 나는 생각해보면..."
마법사 라니는 아련한 눈초리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조금씩 떠오르고 있어. 난 현룡의 화신으로서 여러 몸을 거쳐왔지. 인간부터 벌레까지. 목적은 하나였지만 내 스스로 자라서 어느 정도 의식수준에 이르기 전까진 화신이란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죽었지."
마법사는 눈을 감았다. 나다는 저 늙은이가 또 자는가 싶었다.
"...크리아트만이 말하지 말랬는데 그냥 말해야겠구먼. 그래야 설명이 되니까."
라니의 말에 야크가 소리나게 꼴깍거렸다. 나다는 그런 야크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짜식... 되게 긴장되나보군...'
"성자님, 크리아미드가 왜 추방당했는지 아시오?"
느닷없이 늙은 마법사 라니가 야크의 과거를 들먹이자 리오는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아니오, 설명해주시지 않았어요."
늙은 마법사 라니는 적룡 야크를 다시 째려보고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이 그 오랜 옛날 봉인된 누군가를 풀어줬기 때문이지. 그것도 아주 난장판을 쳐가면서..."
"그가 봉인된 건 당연히 풀어줬어야 했어!"
마법사 라니는 야크의 외침을 무시했다.
"그런데 멍청한 야크녀석이 풀어놓은 건 그 잘난 녀석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이었단 말이지. 그 동안 서방 신계에서 모아놓았던 자잘한 요괴들이었어... 크크.. 몰랐지?"
야크는 얼굴이 온통 붉어졌다.
"그..그게 정말이냐?"
마법사 라니는 다시 한번 야크를 째려보고 여전히 무시하며 리오에게 말했다.
"야크녀석 추방당했지만 지 승질 못 버리고 인계에서 난동을 부렸지요. 그래서 백룡 차이가 기를 써서 녀석을 대지에 봉인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인계에서 금제도 치지 않고 날뛰던 녀석을, 인계에 영향이 가지 않게 처리하느라 차이녀석 기운을 다 써버렸구요. 거기다 이타냐의 천사들이 모르게 하느라.. 죽을 맛이었겠지. 차이는 그래서 잠이 들었지요."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그는 백룡 차이와 적룡 야크의 마지막 싸움을 목격했다.
"다른 형제들은 왜 잠든 건데?"
마법사 라니는 또 야크를 한차례 째려보고 또 무시하며 리오에게 정답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얘기 하듯이.
"야크녀석을 복권시키려면 원상복귀 시켜야 하는데, 원상복귀만으로는 안 돼지요. 본래 죄란 세네 배로 갚아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황룡 청룡 그리고 나 현룡은 무한정 잠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선 밝힐 수 없는 서방 신계의 문제때문에 우리의 능력을 모두 쏟아 부어줘야 했거든요."
야크의 얼굴이 떨렸다.
"그래도 요괴들을 다시 모아야 하는 건 여전히 남아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각기 화신을 만들어서 여기 인계에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난 여기에 있는 거지요."
늙은 마법사 라니는 또 하품을 했다. 굉장히 졸린 표정으로, 또 존다.
야크는 생각에 잠겼다. 충격이 너무나 커서 눈가가 벌겋게 되어 있었다. 리오는 마법사 라니가 떨어뜨린 과자봉지를 주워 오리들에게 부스러기를 던져주었다. 마법사 라니는 또 깜짝거리며 깼다.
"아이구 이런.. 성자님한테 마을이야기를 한다는 게... 저 망나니 녀석때문에.... 미안하외다."
"아닙니다, 위대한 현룡이시여. 저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라니는 따뜻한 눈길로 리오를 보며 허허, 웃었다.
"그럼 마을일을 설명해 드리지요..."
"대마법사님! 대마법사님!"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리오를 안내한 나비넥타이다.
"또다시 틈이 갈라지려 합니다! 급합니다!"
라니는 벌떡 일어섰다. 나다는 깜짝 놀랐다.
'어? 여태까지랑 분위기가 틀린데?'
꾸벅꾸벅 졸던 늙은이는 어디 가고, 그는 날카로운 눈매와 지혜와 위엄이 찬 대마법사의 풍모로 변해있었다. 그는 빠른 몸놀림으로 넥타이를 따라갔다. 야크와 리오는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열심히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달려간 곳은 외로운 산 뒤쪽, 황황한 바위투성이 공터였다. 그 공터 가운데는 거대한 칼에 찔린 듯한 틈이 있었다. 그 갈라진 틈에서 땅이 흔들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굉음이 토해져 나왔다. 주위에서는 여러 명의 마을사람들이 손에 손 무기를 들고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지반의 틈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요?"
리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지옥의 틈. 저놈이 저렇게 숨을 쉬면 괴물들이 뛰쳐나오지요."
나비넥타이는 리오에게 간단히 설명한 뒤 라니에게 외쳤다.
"대마법사님! 부탁합니다!"
"거기 나무를 빨리 쌓아!"
분명히 엘프들의 숲에서 베어왔을 아름드리 나무들이 '지옥의 틈'앞에 쌓여졌다.
"생명의 불꽃 어둠과 추위를 몰아내고 빛과 생기를 ..."
마법사 라니는 눈을 감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스펠을 외웠다. 그리고 뭐라 외치자, 나무들은 살아 꿈틀대며 대지로 파고 들어가 그 틈을 마치 박음질해버리듯 촘촘하게 막아버렸다. 넥타이는 기뻐하며 외쳤다.
"아!.. 이제 일주일은 멀쩡하겠는데요? 아앗!"
요란한 진동과 함께 지옥의 틈에서 불꽃이 콰쾅! 화산처럼 퍼쳐오르며 허공을 태웠다. 불똥은 마구 튀어 올라 마을의 집에 옮겨 붙었다. 마을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갔다. 상황에 전혀 놀라지도 않는 그들의 일처리는 상당히 능숙했다.
"금과 구리를!"
노마법사가 호령하자 마을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많은 양의 구리와 약간의 황금을 지반의 틈 앞에 쌓았다.
"형태를 띠며 자유를 속박하는 질서의 균형..."
또다시 라니는 분명히 드워프의 광산에서 훔쳐왔을 구리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스펠에 들어갔다.
"..이제 그 광기를 잠재워라. 골드 커버링!"
늙은 마법사의 박력 있는 스펠에 구리와 황금은 그 틈을 순식간에 메워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안전한 것이 확인되자,
"와아아아!"
마을사람들은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라니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비넥타이에게 일렀다.
"황금이 모자라. 아무래도 드워프 광산을 몇 번 더..."
"대단했습니다! 대마법사님! 오늘은 괴물녀석들이 한 마리도 뛰쳐나오지 못했군요!"
"으음, 그래, 자네들도 수고했어."
리오는 엄청난 광경을 목격한 충격에 더듬거리며 물었다.
"현룡의 화신이시여... 그럼.. 엘프의 숲과 드워프의 광산을 습격하시는 것은...?"
"어흠!"
라니의 헛기침에 리오는 이 늙은 현룡의 화신이 자신의 정체를 마을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소동이 끝난 뒤 라니는 리오와 야크를 데리고 마을의 복구상황을 둘러보며 설명했다.
"보시다시피야. 내가 볼 땐 ..."
라니는 다시 야크를 째려보고는 리오를 보고 말했다.
"내가 맡은 요괴 할당량의 절반이 저기 다 있어. 완전히 행운인 셈이지. 내가 그 절반 모으는데 니가 봉인된 몇백 년이 걸렸어! 멍청한 크리아미드! "
그런데 그는 별안간 우뚝 서더니 선채로 졸았다. 나다는 또 중얼거렸다.
'잠보 아니야? 완전히...'
나비넥타이가 와서 선채로 잠든 늙은 마법사를 가만히 업었다.
"요새 와서 심하시지요. 아무래도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음.. 억? 아니 아니야.. 성자님에게 더 설명해야해...벌써 어두워져 가는데 아직 시작도 못했는걸..."
"왜,"
리오가 늙은 마법사를 보고 외쳤다.
"왜 레이디 엘 다온과 드워프들에게 설명하지 않으셨죠? 그들이라면 기꺼이 도와줄텐데요! 왜 서로 오해를...!"
"초기에 마을 건설자들은 거의 죄수들이었어. 그들은 자신들의 정착을 도와준 엘프를 살해하고 금을 훔치기 위해 드워프들을 학살했다네. 배신한 인간에 대한 증오는 뿌리깊어서 지옥의 틈에서 나온 불길이 엘프의 숲을 불태우고 틈이 만든 지진이 드워프의 광산을 무너뜨렸을때...."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 라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째서 내가 엘프나 드워프 따위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난 그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어. 구질구질 설명하고싶지 않아!"
그러더니 그는 심하게 기침했다. 나비넥타이는 거친 기침에 자기몸을 가누지 못하는 늙은 마법사를 부축해 갔다.
"야크님, 야크님?"
야크는 리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를 으득! 갈더니 자기 뺨을 쩍! 갈겼다.
"야크님!"
그리고 야크는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자책이 심하군.. 야크녀석...'
나다의 중얼거림에 리오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리오는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외로운 산 쪽으로 달려갔다.
'야! 너 엘프하고 드워프한테 알려주려 가니? 내일 알려줘도 될 거 아냐?'
"아니에요, 나다. 오해는 빨리 풀어야지요. 그리고 힘을 합치면 더 쉽게 해결될지도 몰라요."
그는 헐렁한 로브를 펄렁거리며 허적허적 뛰어갔다.
'쩝. 산길은 어두울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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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외로운 산의 불화 (3)
드워프들은 리오를 성대하게 환영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외로운 산의 오래된 동굴을 보수하고 새로운 금맥을 찾아서 새로 캐야 하는데 나무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손은 놓고 있을 정도이지요. 그런데 저 엘프들이.."
드와인은 아도니스를 노려보았다. 아도니스도 질세라 드와인을 노려본다.
".. 마치 모든 숲의 나무들이 제것인양 굽니다. 버팀목이 모자라 많은 드워프들이 광산사고로 죽었소. 그리고 인간들은 동굴로 숨어 들어와 금을 훔치거나 드워프들을 습격하여 보석들을 훔쳐가고 살해합니다."
드와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심지어, 그 마법사는... 아직 건설중이라 불완전한 광산에 지진을 일으켜, 수많은 드워프들이 땅에 생매장되어 살해되었습니다. 그자는...."
리오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인간'이기 이전에 '성자'로서 대해주었지만, 스스로 성자가 아니라고 여기기에 '인간'으로서 부끄러웠다.
"누대에 걸쳐 당신네 드워프들은 우리 숲을 이렇게까지 심하게 훼손하진 않았소. 요즈음 왜 갑자기.."
아도니스가 묻자 드와인이 고개를 저었다.
"외로운 산의 나무들이 모두 말라죽었소. 당신도 눈이 있으면 보시오! 벌거벗은 산을."
"그거야 당신들이 두더지처럼 땅을 파헤치고 나무를 모두 베어버려서...."
"뭐라고?"
엘프와 드워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나다가 투덜거렸다.
'아도니스란 녀석 배짱이 두둑하군. 여긴 드워프의 동굴인데 말이야. 살아나가기 싫은가보지?'
리오가 얼른 질문했다.
"아도니스님, 엘프는 나무와 숲에 대해 정통하다던데, 그렇다면 이곳의 산들이 갑자기 말라죽은 이유도 금새 아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일리가 있다 싶어 드와인은 음, 하고 아도니스의 눈치를 보았다. 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일행은 외로운 산으로 올라갔다.
휘이잉
산은 벌건 민둥산이었다. 암석만 보일 뿐, 말 그대로 외로운 산이다. 흙을 조금 집어 손으로 만져본 아도니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심할 줄이야. 이런 토양에선 나무가 살 수 없다. 우리는 드워프들이 욕심을 부려 마구 베어내어 산에 나무가 사라진 것으로 알았는데."
"흥, 너희는 항상 그런 식이지!"
아도니스와 드와인은 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리오는 어떻게든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막아보려고 아도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아도니스님, 왜 갑자기 땅이 이렇게 됐을까요?"
서로 눈싸움하던 아도니스와 드와인은 고개를 돌려 다시 그 문제에 골몰했다. 아도니스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눈을 감고 주변의 생명을 느끼려고 애썼다.
"이상하군요. 이곳에서는 어느 생명체의 속삭임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다시 엘프가 드워프를 노려보았다.
"산을 배회하는 어둠의 몬스터와 두더지처럼 땅을 파대는 드워프들의 소리만이 들릴 뿐이지! 분명히 당신들이 산을 마구 파헤쳐서 토지가 이렇게 변한 거야!"
"뭐얏!"
야크는 오히려 조용했다. 그는 바위 위에 앉아 뭔가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 갑자기
쾅
적룡이 그의 큰 칼로 내려쳐서 바위는 산산조각이 났다.
"마법이다, 얘들아."
엘프와 드워프와 인간은 붉은 머리의 신룡을 쳐다보았다.
"이건 마법이야. 마법이라기보다는 저주로군. 이런 지독한 저주를 받은 땅에서 뭐가 살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더니 그는 드와인을 보고 말했다.
"야, 난쟁이. 너희는 어떻게 살아남았지? 땅속이라도 온전하진 못할텐데."
드와인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마법, 아니 저주? 그럼 그 동안 많은 드워프들이 죽어나간 것이...."
"흥, 생명력 질기기가 바퀴벌레같은 드워프들이 그래 죽어나가면서 그 이유도 의심해보지 않은 거냐?"
야크가 비웃었으나 충격을 받은 드와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야크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당신은 마법사요? 그걸 어떻게 안 거요? 해결방법은 아는 거요?"
"흥, 미안하군. 난 마법사가 아니야. 난 동방의 신룡이다."
"신룡? 신룡이시라면 동방에서 건너온 신의 사자가 아니십니까?"
순식간에 정중하게 바뀐 드와인의 태도에 야크는 순간 감동해버렸다. 동방의 신룡들은 서방 신마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고 한때 야크도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인계에서 드워프들을 괴롭히는 마룡을 퇴치하기도 했다. 그래서 야크를 쫓겨난 반역자나 말썽꾼으로 보는 엘프와 달리 이 순박한 드워프 전사 드와인은 야크를 '동방 신의 사자'로서 대우해주었다.
"동방의 신룡이시여!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당신의 위대한 힘으로 우리 외로운 산을 구해주십시오!"
드와인은 야크에게 외쳤다. 야크는 여태껏 서방에서 냉대만 받다가 이렇게 떠받들어지니 순간 우쭐한 마음이 들면서 감동까지 받았다. 야크가 눈물마저 글썽이자 나다는 순간 순박한 드와인이 불쌍해졌다.
'안됐군.. 저런 자식을 믿는다니...'
"당연하지! 나만 믿으라구! 내가 다 정상으로, 아니 그전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주지!"
드워프들은 기뻐하며 야크에게 고마워했다. 그래서 리오와 야크는 아도니스와 드와인의 안내를 받으며 산과 숲을 지나왔다. 그러자 멀리에 한창 번성해 가는 인간의 마을이 보였다.
"저희는 여기까지만 안내해 드리지요. 그럼 성자님, 부탁드립니다."
아도니스가 리오에게 부탁했다. 드와인은 야크에게 작지만 단단한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말했다.
"신룡이시여, 그 사악한 마법사를 꼭 응징해주십시오!"
"음! 걱정 말라구!"
드와인은 벌써 일이 다 해결된 듯 감격한 얼굴로 야크를 배웅했다.
야크는 리오를 덥석 옆구리에 메더니 또 와아아 달려나갈 기세다. 나다가 급히 리오에게 말했다.
'잠깐! 리오, 야크 좀 말려.'
"왜지요? 아참, 야크님, 나다가 야크님을 좀 말리라는데요?"
"무슨 소리야? 단번에 쳐들어가서 그 괘씸한 마법사 놈을!"
무식한 야크는 무시해버리고 나다는 리오에게 계속 충고했다.
'먼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한다 이거야. 그리구, 상대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아야지? 지금 무작정 쳐들어가지 말고, 일단 여행자를 위장해서 들어가. 그리고 상황을 알아보라구.'
"음, 나다 말이 맞아요. 참.. 나다가 여기 있었다면 정말 든든했을 텐데..."
야크는 궁시렁댔다.
"답답하게.... 참 내, 그냥 싹 쓸어버리는 것이 ... 험."
그의 옆구리에 매달린 리오가 성질 급한 동방의 신룡에게 나다의 말을 설명했다.
"야크님, 나다가 그러는데요. 온통 봉인당해 능력 쥐뿔없는 뻘건 지렁이가 대책도 없이 어쩌겠다는 건지 한심하다고..으악!"
갑자기 야크가 놓아버려서 리오는 바닥에 굴렀다. 야크는 온통 얼굴이 시뻘개지고 머리가 솟아올랐지만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나다를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다의 말은 일리가 있었기에 야크는 더 이상 군말을 하지 않았다.
리오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나다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어,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음.. 여행자처럼 들어가라면서요?"
'아이구 이 바보야, 이 길은 외로운 산과 엘프의 숲을 지나온 길이라구. 거길 무사히 지나온 게 의심살 거 아니야? 저쪽 길 보이지? 눈치채지 못하게 그리로 가서, 그쪽 길로 온 거처럼 하라구. 알겠지?'
"음, 그도 그렇군요. 알겠어요."
마을의 거리는 활기찼다. 번화한 것이 꼭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생기가 가득 차 있었다. 리오는 무척 즐거운 얼굴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야크와 리오가 펍에 들어가서 맥주를 시키자 주인장이 말을 걸었다.
"사제님이 아니십니까?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드디어 교단에서 우리 마을로 사제님을 보내주신 건가요? 이렇게 외진 마을에 정식사제 분이 오시다니 정말 주난님의 은총이시로군요."
"엇? 사제님이 오셨다고?"
펍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웅성웅성 쳐다보자 리오는 난처하여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아닙니다. 저는 어떤 분을 찾아 여행을 다니고 있지요."
사람들은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장도 실망했지만 곧 밝은 얼굴로 리오에게 물었다.
"사람을 찾고 계신다구요? 이 마을사람이라면 제가 다 압니다만."
머뭇거리던 리오가 물었다.
"혹시, 짧은 백발에 눈빛이 맑은 나이 드신 분을 보신 적이 없나요? 피부는 약간 검지만 황인이시죠. 말이 없으시고 나이에 비해 몹시 정정하십니다."
주인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정도만 가지고는 정부가 부족하군요. 나이 드신 분이 여행하기엔 세상이 좀 험악하지 않나요? 게다가 황인이라니, 글쎄요 못 본 것 같군요."
리오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 자신이 떠났던 여행의 목적인, 그가 찾고 있는 '스승'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다.
둘은 식사를 시키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였다.
"어때, 엘프들하고 드워프들이 또 싸웠다며?"
"쯧쯧, 허구한날 싸우지."
"웃기는 종족들이야"
그 때 펍 안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복장만 보아도 이 마을의 경호대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앞에 앞장선 사람은 마치 집사의 옷 같은 깔끔한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는데 목에는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야크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리오가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볼 때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들 앞에 멈춰 섰다.
"대마법사님의 부탁입니다. 두 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예에?"
리오는 깜짝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비넥타이의 남자를 보았다.
'허걱, 이게 뭔 일이대냐? 시치미 떼! 빨리!'
나다의 말에 리오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이시죠? 저흰 여기 초행이고, 에, 또.."
그때 야크가 벌떡 일어났다.
"제길! 야, 리오야, 그만해. 그 쥐새끼같은 마법사 놈이 어떻게 우릴 안 거야? 가잰다고 범아가리로 곱게 들어갈 줄 알아?"
거칠게 말하며 검을 뽑자 펍 안은 순식간에 냉기가 흘렀다. 와글거리던 마을사람들이 모두 험악한 얼굴로 야크를 쏘아보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우리 위대한 대마법사님을 욕하다니!"
"저 자식 매달아버려!"
"감히 어디서!"
그러나 나비넥타이가 손을 들자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오해가 있나보군요. 저희 대마법사께서는 부탁을 하신 겁니다. 사실, 대마법사님을 뵈러 오신 것이 아닌지요?"
이미 다 들통나버리자 시치미 떼는 것을 포기한 리오가 물었다.
"맞습니다. 저희는 마법사님을 뵈러왔지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하네요."
"따라오십시오."
앞서가는 나비넥타이를 따라 리오와 야크는 밖으로 나갔다. 일행은 마을을 가로질러 한참 가다가 비교적 숲에 가까운 외딴 집에 들어갔다. 그 집은 겉보기도 내부도 초라했지만 벽을 온통 메운 책장에는 각양각색의 서적이 가득했다. 그리고 검소한 침대 위에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긴 흰 수염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검은 색의 로브를 입은 그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대마법사님!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나비넥타이는 리오가 깜짝 놀랄 정도로 노인의 귀에다가 크게 소리질렀다. 늙은 마법사는 졸린 눈을 껌뻑이다가 기지개를 폈다. 할 일없는 시골노인같이 행동하는 '대마법사'를 보자 나다는 기가막혔다. '대마법사'는 하품을 한 뒤 말했다.
"그런가..? 손님이 오셨는데.. 어디.."
그렇게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늙은 마법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졸았다.
"뭐 저런 늙은이가..? 확 그냥!"
야크가 검집을 높이 들자 리오는 말리느라 땀을 뺐다. 그때 갑자기 낯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방 신룡 크리아미드. 추방당한 뒤에도 그 성질 못 버렸군."
눈을 감고 졸고 있던 노인의 말에 야크와 리오는 얼어붙은 듯 잠시 몸이 굳어버렸다. 눈을 뜨고 다시 하품하는 늙은 마법사의 모습은 ,아까와 같이 카랑한 목소리의 주인이라고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 늙은이가 낮에는 식곤증이 심해서... 잠시 산책이나 할까요?"
리오와 야크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늙은 마법사는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았다. 길가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밝게 인사했다.
"대마법사님! 지금 낮잠 주무실 시간일텐데요?"
"응. 일이 좀 있다네. 조니, 방충망은 다 달았나?"
"영감님! 봄나물 뜯어놨는데 스프 끓여드시게 좀 드릴까요?"
"앤디, 영감님이라니! 버릇없이!"
"허허허, 영감님이란 호칭이 뭐 어때서. 나물이라, 거참 향긋하겠구먼. 이따가 메리한테 좀 주시게."
활기찬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애정을 가지고 노마법사에게 인사했다. 마법사도 또한 부드럽게 일일이 다 답변했다. 그렇게 마을을 한바퀴 돌고 나서, 노마법사는 조그만 호수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떠시오, 성자님. 마을을 보신 소감이..?"
늙은 마법사가 호수를 무심히 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질문에 리오가 웃으며 답했다.
"아주 활기차고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참, 그리고 전 성자가 아닙니다!"
늙은 마법사는 웃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해도 사과지요. 적룡 크리아미드가 능력을 모두 봉인당해도 여전히 신룡이듯이...."
그러더니 그는 품속에서 과자봉지를 꺼내어 오리들에게 부스러기를 던져주었다. 오리들은 익숙한 상황인 듯 늙은 마법사가 호수에 나타날 때 즈음 벌써 가맣게 몰려있었다. 야크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엘프의 숲에 불을 지르고 드워프의 광산에 지진을 일으킨 녀석이 아무리 선한 척 가장해도 소용없지. 수작부리지 말고 본론으로 가시지 그래?"
마법사는 야크를 돌아보더니 장난스럽게 얼굴을 찌그리며 말했다.
"거 누가 적룡 아니랠까봐 급하기는... "
그러더니 다시 느긋하게 하품을 한다.
"넌 뭐야? 어떻게 그 사실을.. 오호라, 첩자를 심어논 거냐? 아니면, 마법으로?"
"크리아미드님,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리오는 노마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우없는 분 같진 않습니다.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늙은 마법사는 무심하게 호수를 바라보았다. 야크가 지겨워 하품할 때 즈음, 그가 입을 열었다.
"크리아미드, 나는 동방에서 넘어온 그대의 의형제인 현룡(=흑룡) 크리뚜리야의 화신일세."
크리아미드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현룡 크리뚜리야...? 니가 왜...? 너두 봉인 당했냐..? 아냐, 아냐, 거짓..."
늙은 마법사가 한숨을 쉬었다.
"물론 난 현룡이 아니야. 나는 현룡의 화신인 마법사 라니일세. 난 현룡의 분신이자 화신일 뿐이지. 지금 서방으로 넘어온 동방룡들은 자네 외엔 모두 깊은 잠에 들어갔으니까."
"...무..무슨 일이 난거냐? 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야크의 말꼬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뭐 알 필요 없네. 자네 일이나 신경쓰라구. 하여튼... 성자님, 제가 외로운 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설명을 드리지요."
"엘프고 드워프고 인간이고 다 필요 없어! 빨리 말해, 형제들이 어떻게 된 거냐!"
야크가 버럭버럭 소리지르자 늙은 마법사 라니는 귀를 막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참 시끄럽기도 하다... 알 필요 없어! 말썽이나 피우지 마! 크리아트만이 말하지 말랬다. 이 망나니야, 큰형 말도 안들을 거냐?"
야크는 멍해져서 비틀거리며 나무 앞에 쓰러지듯 앉았다. 늙은 마법사 라니가 야크를 쏘아보았다.
"다 네 녀석 탓이야! 형제들이 네 녀석 하나 복권시켜주려고 고생한단 말이다. 더 이상은 알려고 하지마! 말썽꾸러기녀석."
그러더니 라니는 다시 졸았다. 나다는 어이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조냐?
리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봄바람은 새풀 향기를 머금고 리오의 이마를 스쳤다. 호수에는 잘게 파문이 일어난다. 늙은 마법사 라니는 꼬꾸라질 뻔하다가 번득 정신을 차렸다.
"허허.. 미안하구면. 늙은이가 주책이지...참, 설명해주기로 했지..."
라니는 다시 봉지를 보스락거리며 오리에게 과자부스러기를 던져주었다.
"성자님, 나는 현룡의 화신이지 현룡은 아니라오. 이를테면 이런 거지... 난 부모님밑에서 태어나 잘 자라서 기연을 얻어 마법을 익히고.. 그렇게 늙어갔지.. 그러다가..."
라니의 눈이 반짝였다.
"어느날 깨달았지. 번개처럼. 난 현룡 크리뚜리야의 화신이였어. 그리고 내가 이런 모습으로 자라고 마법을 익힌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지."
리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화신이시면, 현룡 자체는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허허.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우리는 모두 신의 부분이지만 신 자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성자님은 지금 스스로 신이라고 자신할 수 있소?"
"그..그런, 감히 제가 신이라고는..."
리오는 얼굴이 또 빨개졌다. 마법사 라니는 히죽 웃었다.
"우리는 신의 일부이자 신일세. 그렇게 본다면 나도 또한 현룡이지. 그렇지만 난 독립된 개체로서 세상을 살아왔어. 나는 생각해보면..."
마법사 라니는 아련한 눈초리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조금씩 떠오르고 있어. 난 현룡의 화신으로서 여러 몸을 거쳐왔지. 인간부터 벌레까지. 목적은 하나였지만 내 스스로 자라서 어느 정도 의식수준에 이르기 전까진 화신이란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죽었지."
마법사는 눈을 감았다. 나다는 저 늙은이가 또 자는가 싶었다.
"...크리아트만이 말하지 말랬는데 그냥 말해야겠구먼. 그래야 설명이 되니까."
라니의 말에 야크가 소리나게 꼴깍거렸다. 나다는 그런 야크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짜식... 되게 긴장되나보군...'
"성자님, 크리아미드가 왜 추방당했는지 아시오?"
느닷없이 늙은 마법사 라니가 야크의 과거를 들먹이자 리오는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아니오, 설명해주시지 않았어요."
늙은 마법사 라니는 적룡 야크를 다시 째려보고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이 그 오랜 옛날 봉인된 누군가를 풀어줬기 때문이지. 그것도 아주 난장판을 쳐가면서..."
"그가 봉인된 건 당연히 풀어줬어야 했어!"
마법사 라니는 야크의 외침을 무시했다.
"그런데 멍청한 야크녀석이 풀어놓은 건 그 잘난 녀석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이었단 말이지. 그 동안 서방 신계에서 모아놓았던 자잘한 요괴들이었어... 크크.. 몰랐지?"
야크는 얼굴이 온통 붉어졌다.
"그..그게 정말이냐?"
마법사 라니는 다시 한번 야크를 째려보고 여전히 무시하며 리오에게 말했다.
"야크녀석 추방당했지만 지 승질 못 버리고 인계에서 난동을 부렸지요. 그래서 백룡 차이가 기를 써서 녀석을 대지에 봉인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인계에서 금제도 치지 않고 날뛰던 녀석을, 인계에 영향이 가지 않게 처리하느라 차이녀석 기운을 다 써버렸구요. 거기다 이타냐의 천사들이 모르게 하느라.. 죽을 맛이었겠지. 차이는 그래서 잠이 들었지요."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그는 백룡 차이와 적룡 야크의 마지막 싸움을 목격했다.
"다른 형제들은 왜 잠든 건데?"
마법사 라니는 또 야크를 한차례 째려보고 또 무시하며 리오에게 정답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얘기 하듯이.
"야크녀석을 복권시키려면 원상복귀 시켜야 하는데, 원상복귀만으로는 안 돼지요. 본래 죄란 세네 배로 갚아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황룡 청룡 그리고 나 현룡은 무한정 잠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선 밝힐 수 없는 서방 신계의 문제때문에 우리의 능력을 모두 쏟아 부어줘야 했거든요."
야크의 얼굴이 떨렸다.
"그래도 요괴들을 다시 모아야 하는 건 여전히 남아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각기 화신을 만들어서 여기 인계에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난 여기에 있는 거지요."
늙은 마법사 라니는 또 하품을 했다. 굉장히 졸린 표정으로, 또 존다.
야크는 생각에 잠겼다. 충격이 너무나 커서 눈가가 벌겋게 되어 있었다. 리오는 마법사 라니가 떨어뜨린 과자봉지를 주워 오리들에게 부스러기를 던져주었다. 마법사 라니는 또 깜짝거리며 깼다.
"아이구 이런.. 성자님한테 마을이야기를 한다는 게... 저 망나니 녀석때문에.... 미안하외다."
"아닙니다, 위대한 현룡이시여. 저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라니는 따뜻한 눈길로 리오를 보며 허허, 웃었다.
"그럼 마을일을 설명해 드리지요..."
"대마법사님! 대마법사님!"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리오를 안내한 나비넥타이다.
"또다시 틈이 갈라지려 합니다! 급합니다!"
라니는 벌떡 일어섰다. 나다는 깜짝 놀랐다.
'어? 여태까지랑 분위기가 틀린데?'
꾸벅꾸벅 졸던 늙은이는 어디 가고, 그는 날카로운 눈매와 지혜와 위엄이 찬 대마법사의 풍모로 변해있었다. 그는 빠른 몸놀림으로 넥타이를 따라갔다. 야크와 리오는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열심히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달려간 곳은 외로운 산 뒤쪽, 황황한 바위투성이 공터였다. 그 공터 가운데는 거대한 칼에 찔린 듯한 틈이 있었다. 그 갈라진 틈에서 땅이 흔들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굉음이 토해져 나왔다. 주위에서는 여러 명의 마을사람들이 손에 손 무기를 들고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지반의 틈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요?"
리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지옥의 틈. 저놈이 저렇게 숨을 쉬면 괴물들이 뛰쳐나오지요."
나비넥타이는 리오에게 간단히 설명한 뒤 라니에게 외쳤다.
"대마법사님! 부탁합니다!"
"거기 나무를 빨리 쌓아!"
분명히 엘프들의 숲에서 베어왔을 아름드리 나무들이 '지옥의 틈'앞에 쌓여졌다.
"생명의 불꽃 어둠과 추위를 몰아내고 빛과 생기를 ..."
마법사 라니는 눈을 감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스펠을 외웠다. 그리고 뭐라 외치자, 나무들은 살아 꿈틀대며 대지로 파고 들어가 그 틈을 마치 박음질해버리듯 촘촘하게 막아버렸다. 넥타이는 기뻐하며 외쳤다.
"아!.. 이제 일주일은 멀쩡하겠는데요? 아앗!"
요란한 진동과 함께 지옥의 틈에서 불꽃이 콰쾅! 화산처럼 퍼쳐오르며 허공을 태웠다. 불똥은 마구 튀어 올라 마을의 집에 옮겨 붙었다. 마을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갔다. 상황에 전혀 놀라지도 않는 그들의 일처리는 상당히 능숙했다.
"금과 구리를!"
노마법사가 호령하자 마을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많은 양의 구리와 약간의 황금을 지반의 틈 앞에 쌓았다.
"형태를 띠며 자유를 속박하는 질서의 균형..."
또다시 라니는 분명히 드워프의 광산에서 훔쳐왔을 구리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스펠에 들어갔다.
"..이제 그 광기를 잠재워라. 골드 커버링!"
늙은 마법사의 박력 있는 스펠에 구리와 황금은 그 틈을 순식간에 메워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안전한 것이 확인되자,
"와아아아!"
마을사람들은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라니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비넥타이에게 일렀다.
"황금이 모자라. 아무래도 드워프 광산을 몇 번 더..."
"대단했습니다! 대마법사님! 오늘은 괴물녀석들이 한 마리도 뛰쳐나오지 못했군요!"
"으음, 그래, 자네들도 수고했어."
리오는 엄청난 광경을 목격한 충격에 더듬거리며 물었다.
"현룡의 화신이시여... 그럼.. 엘프의 숲과 드워프의 광산을 습격하시는 것은...?"
"어흠!"
라니의 헛기침에 리오는 이 늙은 현룡의 화신이 자신의 정체를 마을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소동이 끝난 뒤 라니는 리오와 야크를 데리고 마을의 복구상황을 둘러보며 설명했다.
"보시다시피야. 내가 볼 땐 ..."
라니는 다시 야크를 째려보고는 리오를 보고 말했다.
"내가 맡은 요괴 할당량의 절반이 저기 다 있어. 완전히 행운인 셈이지. 내가 그 절반 모으는데 니가 봉인된 몇백 년이 걸렸어! 멍청한 크리아미드! "
그런데 그는 별안간 우뚝 서더니 선채로 졸았다. 나다는 또 중얼거렸다.
'잠보 아니야? 완전히...'
나비넥타이가 와서 선채로 잠든 늙은 마법사를 가만히 업었다.
"요새 와서 심하시지요. 아무래도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음.. 억? 아니 아니야.. 성자님에게 더 설명해야해...벌써 어두워져 가는데 아직 시작도 못했는걸..."
"왜,"
리오가 늙은 마법사를 보고 외쳤다.
"왜 레이디 엘 다온과 드워프들에게 설명하지 않으셨죠? 그들이라면 기꺼이 도와줄텐데요! 왜 서로 오해를...!"
"초기에 마을 건설자들은 거의 죄수들이었어. 그들은 자신들의 정착을 도와준 엘프를 살해하고 금을 훔치기 위해 드워프들을 학살했다네. 배신한 인간에 대한 증오는 뿌리깊어서 지옥의 틈에서 나온 불길이 엘프의 숲을 불태우고 틈이 만든 지진이 드워프의 광산을 무너뜨렸을때...."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 라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째서 내가 엘프나 드워프 따위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난 그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어. 구질구질 설명하고싶지 않아!"
그러더니 그는 심하게 기침했다. 나비넥타이는 거친 기침에 자기몸을 가누지 못하는 늙은 마법사를 부축해 갔다.
"야크님, 야크님?"
야크는 리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를 으득! 갈더니 자기 뺨을 쩍! 갈겼다.
"야크님!"
그리고 야크는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자책이 심하군.. 야크녀석...'
나다의 중얼거림에 리오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리오는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외로운 산 쪽으로 달려갔다.
'야! 너 엘프하고 드워프한테 알려주려 가니? 내일 알려줘도 될 거 아냐?'
"아니에요, 나다. 오해는 빨리 풀어야지요. 그리고 힘을 합치면 더 쉽게 해결될지도 몰라요."
그는 헐렁한 로브를 펄렁거리며 허적허적 뛰어갔다.
'쩝. 산길은 어두울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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