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0월 15일
--------------------------------------------------------------------------------
3장. 외로운 산의 불화 (2)
다음날, 엘프들의 환송을 받으며 리오와 야크, 그리고 안내자인 아도니스가 길을 떠났다. 나다는 계속 리오에게 쫑알거렸다.
'야, 리오, 너 엘프들이 성자라고 추어올려 주니까 착각하나본데. 사람들이 니 말을 듣겠냐?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꼬질꼬질한 사제 말을 듣고 '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숲에 들어오는걸 그만 두겠냐구! 이 멍청아!'
"하, 하지만.. 얘기는 해보아야지요. 그들도 조리 있게 설명하면 옳고 그른걸 잘 판단하여..."
'조오리? 이 주리를 틀 자식! 니가 참 조리 있게 말하겠다. 자식아!'
그렇게 리오와 나다가 속으로 투닥거리는 동안, 옆에서 보던 아도니스는 혼자 중얼거리는 리오의 모습이 이상하여 말을 건넸다.
"무얼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시지요? 성자님."
그의 질문에 리오의 얼굴은 금새 벌개졌다. 리오는 '성자'라는 칭호를 들을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저, 아도니스님, 저, 전 성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아도니스의 질문에 리오 대신 야크가 답했다.
"흠, 리오녀석은 저어기 워페어에 있는 나다란 거지녀석과 이야기하는 중이다. 녀석들은 그게 된다는군."
그러나 야크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스는 그를 흘끗 쳐다보곤 무시했다. 그리고 그 태도와 백팔십도 다른 공손함으로 다시 리오에게 물었다.
"어떻게 호칭할까요?"
"저, 그냥 리오라고 부르세요. 그게 편한 걸요."
"안됩니다. 숲의 레이디께서 함부로 부르지 못하시는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제가 그냥 부르겠습니까?"
"음... 음...."
난처하여 리오는 계속 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잡담하며 가는데, 리오의 눈을 통해 상황을 보고 있는 나다의 눈에 뭔가 쓱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 리오, 저기 니 앞에 뭐가 지나간 거 못 봤니?'
"아니요? 다람쥔가요?"
그러나 둔감한 리오와 달리 아도니스와 야크는 이미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들은 재빠르게 리오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경계하며 무기를 잡았다.
와아아아아아
어느새 주위는 조그만 드워프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손에 손 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 두더지 같은 도적들! 또 나무를 베어가고 있었군!"
아도니스의 꾸짖음에 우글거리는 드워프들 사이로 누군가 당당히 걸어나오며 외쳤다.
"두더지? 독 안에 든 쥐새끼 같은 녀석이 입만 살았구나! 감히 우리 명예로운 드워프를 모욕하다니!"
앞으로 나선 드워프는 두 다리를 당당하게 벌리고 어깨를 쫙 편 채 거대한 전투용 도끼인 배틀액스를 내밀었다. 키는 작지만 드워프는 그 강인한 체력과 강한 정신력으로 인해 훌륭한 전사로 인정받았다.
아도니스는 앞으로 나선 드워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드와인 프리브램, 당신이었군."
"아도니스, 당신이군. 당신이 내게 보낸 선물은 잊지 않고 있지."
드와인이라 불린 드워프는 소매를 걷어붙여 팔뚝의 흉터를 보여주었다. 활에 맞은 흉터가 깊게 새겨져 있다.
"비겁하게 독화살을..."
"뭐라고?"
아도니스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곧 감정을 자제했다. 드워프가 가득한 숲 속에서 리오까지 데리고 몸을 빼내기는 쉽지 않다. 함부로 도발할 수는 없었다.
드워프 드와인은 리오와 야크를 돌아보더니 빈정거렸다.
"흥, 이젠 인간하고 손을 잡았나? 타락할 대로 타락했군!"
다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 아도니스는 이를 악물었다. 야크는 말싸움보다는 한바탕 싸움을 바랬기에 지루한 듯 하품했다.
그러나 아도니스는 활을 내렸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드와인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도니스는 드와인을 보며 말했다.
"..나 자신의 일이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적을 쓰러뜨리겠지만, 지금 나의 임무는 안전한 호위다. 지금 이분은 아무 잘못이 없으시다. 이분만 풀어다오. 나머지는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다."
그러나 드와인은 아도니스의 비장한 제의를 거절했다.
"그건 우리가 결정할 일이다. 묶어라!"
셋 아니 둘은 전투에 들어갔다. 아도니스는 리오를 지키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했지만, 야크는 신난다는 듯 칼을 휘두르며 마구 날뛰었다. 리오는 주변을 보며 외쳤다.
"잠깐! 제발, 제발 그만두세요! 그만 하시라구요!"
그런 리오에게 나다가 충고했다.
'리오야, 아무리 외쳐 봤자야. 니가 친구들을 도울 길은 어떻게 해서든 토끼는 거라구!'
그때 한 드워프가 도끼를 치켜들고 리오의 머리를 찍으려 휘둘렀다. 아도니스는 급히 막으려 했지만 정신을 판 사이 드와인의 도끼에 팔을 맞고는 겨우 몸만 피했다. 리오는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도끼의 빛나는 날을 보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으아아아악!"
나다는 이것이 악몽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악몽이다.
'세상에 엘프가 어딨어! 드워프가 어딨어! 마법사는 또 뭐람!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라구!'
그러나 눈을 감은 나다의 귓전에는 조금 전과 같은 시끌시끌한 소리가 사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듯 사방은 조용했다. 챙, 하고 무기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린다. 비록 꿈속이지만 나다는 리오가 도끼에 머리를 맞고 죽은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망설이다가, 조금 뒤 겨우 눈을 떴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방은 초록빛에 온통 물들어 있고 드워프들은 입을 쩍 벌리며 무기를 놓아버리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오 역시 주저앉은 채로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록빛 후광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으윽!"
신음하던 드와인은 배틀액스를 다시 바로 쥐고는 동족들에게 외쳤다.
"놀랄 것 없다! 인간의 사제들은 초록빛 마법을 쓴다고 들었다. 저건 치유마법이야!"
하지만 인간사제들의 치유마법을 본적이 없는 드워프들은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빛에 감히 도끼를 들이대지 못했다. 리오를 죽이려고 했던 드워프는 그의 앞에 엎어져서 머리를 감싸쥐고 벌벌 떨고 있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드와인은 부아가 치밀어서 도끼를 휘두르려 했으나 그때 리오의 어눌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드워프님, 어떻게 된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전 싸움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전 치유력을 잃었기 때문에 여기 있는 분들이 다치시면 고쳐드릴 수도 없어요. 여기는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데 왜 싸우려고 하지요? 저 밖의 인간들의 전쟁터는 정말 끔찍해요. 이곳은 이대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채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립니다. 제가 만약 잘못한 것이 있다면 사과 드릴께요."
리오는 드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엎드렸다. 나다는 리오의 말이 전혀 설득력이 없고 게다가 유치하기까지 해서 그만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리오는 몹시 간절하게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외로운 산의 드워프들은 거침없이 솔직하고 정직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훌륭한 말과 대단한 언변보다는 리오의 이런 어눌한 솔직함이 더욱 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드와인은 엎드린 리오를 한참 보더니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킨 채 아도니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자는 누구지?"
아도니스는 리오에게서 나오는 성스러운 초록빛 후광에 취해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엄숙하게 말했다.
"이것은 사제들의 치유마법이 아니다. 보면 모르겠는가 드와인? 이분은 레이디께서 인정하신 인간의 성자이시다."
"저기 아도니스님.. 저 성자 아닌데요.."
리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도니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당황하여 우물쭈물거리는 리오의 말은 야크의 멍한 말에 묻혀졌다.
"이게 뭐야? 정말 성잔가? 이건 그저 마법의 빛이 아닌데... 다른 녀석들도 그럴 것이다, 마음속의 전의가 사라졌다. 이건 마법이 아니야."
드와인은 방금까지도 야크와 치열하게 싸웠던 것을 잊고 멀거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야크는 당혹감이 가득찬 목소리로 여전히 우레처럼 말했다.
"성자의 후광 특징이 그거야. 마법사의 빛 같은 건 그냥 빛일 뿐이지. 사제들의 치유력에 의한 빛도 성스러운 느낌이 들긴 하지만 조금 마음이 편한 정도지 적의를 사라지게 하진 못해. 그러나 지금의 빛은 마법의 빛 따위와는 다르다. 빛은 보조일뿐이고 '무언가'가 있기에 그 '무언가'가 내뿜는 빛. 그게 후광이란거지."
"오오.."
드워프들이 신음하며 자신을 쳐다보자 리오는 질색하여 뒤로 넘어졌다. 그러자 주변을 푸르게 물들이던 빛이 사라졌다. 혼란스러워진 야크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다는 지금의 상황이 황당하기도 하고 너무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보기가 고통스러웠다. 꿈을 통해 보고 있는 그로서는 아도니스나 드워프들이 받은 느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전 성자가 아니라구요!"
조용한 가운데 리오의 공허한 외침만이 숲을 울렸다.
"그것은 일종의 파장입니다."
아도니스는 드워프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면서 엘 다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의 일이다. 당시 아도니스는 자신이 존경하는 레이디 엘 다온이 이름 모를 한 인간을 그토록 흠모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엘다온은 빙긋 웃으며 아도니스에게 질문했다.
"신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도니스."
갑작스런 질문에 당혹한 아도니스는 잠시 생각했다. 엘 다온은 굳이 그에게서 답을 받아내려 하진 않았다.
"아름다운 진리와 함께하는 자. 일단 저는 신성을 그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진리, 침묵, 평화... 어느 피조물에게나 고유의 파장이 있습니다. 화를 내면 그 독한 파장이 상대방과 나를 해치고, 순수한 신성의 파장은 사람을 편안케 합니다. 일단 제가 생각하기로는, 신성의 파장이 강한 자를 신성한 자라고 부르고 싶군요."
"그것은 타고나는 것입니까?"
엘 다온은 빙긋 웃었다. 아도니스는 자신의 질문이 왠지 조악한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세상의 피조물들은 모두가 신성을 타고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을 잊고 삽니다. 제가 그 사제님을 흠모하는 것은 이타냐에서 본 중 가장 신성에 가까운 분이기 때문이죠. 그분을 직접 뵈었으면 좋겠군요. 그분의 파장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요."
아도니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인계에 온 후 엘프들의 라임 숲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엘 다온이 언제 그 사제를 보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도 또한 엘 다온의 옆에 있으면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니, 그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나다는 배가 너무 고파서 잠에서 깼다. 깨어보니 옆에서는 시케가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다, 리오는요? 무사한가요?"
하품을 먼저 늘어지게 한 나다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나 배고파!"
시케는 씨근거리더니 벼게로 나다의 얼굴을 팍 쳤다.
"애태우지 좀 말아욧!"
잠시 후, 나다는 밀려나오는 코피를 솜뭉치로 막으며 계속 빵과 수프를 입에 우겨 넣었다. 시케는 리오가 무사하다는 말에 싱글벙글이었다. 나다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건 그냥 꿈일지도 몰라, 알겠지?"
그는 숟가락을 입에 물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야, 시케.. 리오녀석이 진짜 성자냐?"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곧 후회했다.
'윽! 나까지 왜이러지?'
그러나 시케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답했다.
"그으럼요!"
나다는 뻔한 질문을 한 자신을 자책했다.
그날 하루종일 나다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제들의 숙소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그는 문득 멈춰 섰다.
'신성이란 무엇일까? 그 동안 나는 단지 휘황찬란한 능력, 권능, 이런 것을 두고 신성이라고 해온 걸까? 우리가 신에 관해 얘기할 때도 신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성이란 능력을 일컬음인가? 신룡은? 오래 살아서?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나다는 신성 따윈 모른다. 그는 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다가 영문도 모르고 찾아다니는 것,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어쩐지 리오와 같이 다니다보면 알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리오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다는 깜짝 놀랐다.
'허억! 내가 미쳤나봐! 이게 꿈인가?'
그는 자신의 뺨을 미친 듯이 꼬집으며 잡아당겼다. 그러나 뺨만 얼얼할 뿐 정신은 말짱했다.
'나다, 제 목소리 들리나요?'
"으, 으응. 들려."
나다는 미친척하고 대답하기로 했다. 그러자 바로 답이 날아왔다.
'정말요? 와! 대단해요! 드디어 내 말에 응답해주는군요! 십 년이 넘게 난 이날을 기다렸다구요!'
나다는 저물어 가는 석양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풀밭 위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외쳤다.
"난 안 미쳤어! 난 안 미쳤어!"
'에, 에엑?'
디굴거리기를 멈춘 나다는 사지를 쫙 벌린 채 풀밭 위에 누워서 붉게 물드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씩씩거리는 숨이 잦아들 때 즈음 조심스러운 리오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 들려왔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가요?'
나다는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되물었다.
"내 걱정하게 생겼냐 니가? 그래, 어떻게 됐어? 그 난쟁이들이 무사히 보내준대?"
그는 속으로 조마조마 했다. 만약 리오가 네, 하고 대답한다면 나다가 꾼 그 많은 리오에 관한 꿈이 다 현실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네, 곧 보내준대요. 그분들이 자신들의 동굴에 들러달라고 하셔서 지금 외로운 산에 있어요. 동굴이 참 아름답더군요. 아도니스님은 싫어하셨지만.'
나다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생각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진짜 나다가 미쳤을 경우와, 진짜 이것이 사실인 경우. 하지만 나다는 동방에서 왔다는 신룡도 본적이 있고, 리오는 실제 나다의 마음을 읽었다. 그래서 나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리오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고 그 꿈도 진짜라고.
사실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냥 인정해버렸다.
"그래,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다는 잠자코 리오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동안 리오는 말이 없었다. 갑자기 나다의 가슴에 묵직한 통증을 느껴졌다. 꿈속에서 나다가 시케에 대한 리오의 감정을 느꼈듯이, 지금 나다는 리오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뭐야? 너 슬프냐? 아니면 우울한 거냐?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이야?"
불쾌해진 나다가 시비걸듯이 물었다. 별로 좋은 감정도 아닌 것을 가슴속에 느껴버리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냥.. 부담되고 싫어서...'
"뭐가?"
리오는 한숨을 쉬었다.
'그분들이 자꾸 절 성자라고 하시는데.. 전 성자가 아니에요. 나다도 잘 알지요?'
"흠, 난 헤깔리는 중이다."
'어? 나다마저? 아니에요, 난 성자가 아니에요. 내가 잘 알아요. 난 그분들을 속이는 거에요. 그분들은 실망할 거에요,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알면 그분들은 날 경멸할 거에요!'
나다는 리오가 지나치게 흥분하자 조금 의아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왜 네가 그 녀석들을 속인다고 하는 거지? 지네들 마음대로 떠받들고 지네들 마음대로 실망할텐데 그런 거에 무슨 신경을 써? 그리고 경멸할거라니?"
'주변에서 그렇게 말해주고 잘해주면 나도 착각에 빠져버릴 거에요. 내가 정말로 잘난 줄 알고 교만에 빠질 거라구요. 성자라니요, 말도 안돼요. 어떻게 이럴 수가!'
어이가 없어서 나다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 정말 웃긴다? 마치 누군가 너에게 악마라고 말한 것처럼 흥분하는구나?"
'진실이 아니니까요! 난 성자가 아닌데 성자라고 부르며 나에게 성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싫어요!.'
"아하,"
나다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거구나? 기대하는 게 싫다 이거지..."
'내 진짜 모습을 알고 나면 날 경멸할 거에요. 날 경멸할 거에요. 날..'
"야,"
나다가 리오의 말을 막았다.
"쫀쫀하게 굴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신경 쓰지 말라고. 그냥 너는 너 스스로 존재할 뿐이야, 알겠니? 성자 건 악마 건 말이다."
오호라? 말해놓고 나니 자신이 왠지 대단한 말을 한 듯한 생각이 들어 나다는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트하하, 나도 가끔 이런 멋진 말을 한다 이거야, 트하하!'
리오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다시 명랑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정말 고마워요!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지요. 그리고 내 안에는 신께서 계시니 내가 왜 걱정을 하겠어요? 이제 마음이 편안해요. 고마워요.'
나다는 리오가 다시 명랑해진것은 기분 좋았지만 '지독하게도 사제다운' 말투가 거슬렸다.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음하하... 근데 웃긴다, 리오야?"
'뭐가요?'
"음.. 뭐랄까 잠잘 때는.. 네 주변 영상이 다 보이거들랑? 근데 눈 말짱히 뜰 땐 네 목소리만 들리는구나. 너는 어때?"
'...음.. 전 영상을 본적이 없어요. 항상 느낌과 목소리... 대단한데요, 나다. 수련을 조금만 하면 되겠어요. 조금 가르쳐 드릴게요. 어때요'
"수우련?"
잠시 나다의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다. 나다의 머릿속에 떠오른 수행이란, 불구덩이 위에 눕기, 땅에 몸을 묻고 머리만 내놓기, 칼 위에서 걸어다니기, 얼음을 깨고 영하의 물 안에서 목욕하기... 그리고.....
"싫어!"
'나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사제들이 하는..'
나다의 머릿속에는 다시 수련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제들이 하는 수련, 신에게 고해하며 자신의 등에 채찍을 내리치는..
'그게 아니라니깐요!'
"그만해 그만! 꺼져!"
나다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머리를 쥐어 싸고 풀밭 위를 디굴디굴 굴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다가 노려보자 그들은 '미친놈이다!'하며 도망갔다.
그러다가 나다는 문득 리오의 마음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리오?"
조심스레 불러봐도 대답이 없다. 나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제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
--------------------------------------------------------------------------------
3장. 외로운 산의 불화 (2)
다음날, 엘프들의 환송을 받으며 리오와 야크, 그리고 안내자인 아도니스가 길을 떠났다. 나다는 계속 리오에게 쫑알거렸다.
'야, 리오, 너 엘프들이 성자라고 추어올려 주니까 착각하나본데. 사람들이 니 말을 듣겠냐?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꼬질꼬질한 사제 말을 듣고 '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숲에 들어오는걸 그만 두겠냐구! 이 멍청아!'
"하, 하지만.. 얘기는 해보아야지요. 그들도 조리 있게 설명하면 옳고 그른걸 잘 판단하여..."
'조오리? 이 주리를 틀 자식! 니가 참 조리 있게 말하겠다. 자식아!'
그렇게 리오와 나다가 속으로 투닥거리는 동안, 옆에서 보던 아도니스는 혼자 중얼거리는 리오의 모습이 이상하여 말을 건넸다.
"무얼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시지요? 성자님."
그의 질문에 리오의 얼굴은 금새 벌개졌다. 리오는 '성자'라는 칭호를 들을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저, 아도니스님, 저, 전 성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아도니스의 질문에 리오 대신 야크가 답했다.
"흠, 리오녀석은 저어기 워페어에 있는 나다란 거지녀석과 이야기하는 중이다. 녀석들은 그게 된다는군."
그러나 야크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스는 그를 흘끗 쳐다보곤 무시했다. 그리고 그 태도와 백팔십도 다른 공손함으로 다시 리오에게 물었다.
"어떻게 호칭할까요?"
"저, 그냥 리오라고 부르세요. 그게 편한 걸요."
"안됩니다. 숲의 레이디께서 함부로 부르지 못하시는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제가 그냥 부르겠습니까?"
"음... 음...."
난처하여 리오는 계속 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잡담하며 가는데, 리오의 눈을 통해 상황을 보고 있는 나다의 눈에 뭔가 쓱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 리오, 저기 니 앞에 뭐가 지나간 거 못 봤니?'
"아니요? 다람쥔가요?"
그러나 둔감한 리오와 달리 아도니스와 야크는 이미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들은 재빠르게 리오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경계하며 무기를 잡았다.
와아아아아아
어느새 주위는 조그만 드워프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손에 손 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 두더지 같은 도적들! 또 나무를 베어가고 있었군!"
아도니스의 꾸짖음에 우글거리는 드워프들 사이로 누군가 당당히 걸어나오며 외쳤다.
"두더지? 독 안에 든 쥐새끼 같은 녀석이 입만 살았구나! 감히 우리 명예로운 드워프를 모욕하다니!"
앞으로 나선 드워프는 두 다리를 당당하게 벌리고 어깨를 쫙 편 채 거대한 전투용 도끼인 배틀액스를 내밀었다. 키는 작지만 드워프는 그 강인한 체력과 강한 정신력으로 인해 훌륭한 전사로 인정받았다.
아도니스는 앞으로 나선 드워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드와인 프리브램, 당신이었군."
"아도니스, 당신이군. 당신이 내게 보낸 선물은 잊지 않고 있지."
드와인이라 불린 드워프는 소매를 걷어붙여 팔뚝의 흉터를 보여주었다. 활에 맞은 흉터가 깊게 새겨져 있다.
"비겁하게 독화살을..."
"뭐라고?"
아도니스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곧 감정을 자제했다. 드워프가 가득한 숲 속에서 리오까지 데리고 몸을 빼내기는 쉽지 않다. 함부로 도발할 수는 없었다.
드워프 드와인은 리오와 야크를 돌아보더니 빈정거렸다.
"흥, 이젠 인간하고 손을 잡았나? 타락할 대로 타락했군!"
다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 아도니스는 이를 악물었다. 야크는 말싸움보다는 한바탕 싸움을 바랬기에 지루한 듯 하품했다.
그러나 아도니스는 활을 내렸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드와인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도니스는 드와인을 보며 말했다.
"..나 자신의 일이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적을 쓰러뜨리겠지만, 지금 나의 임무는 안전한 호위다. 지금 이분은 아무 잘못이 없으시다. 이분만 풀어다오. 나머지는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다."
그러나 드와인은 아도니스의 비장한 제의를 거절했다.
"그건 우리가 결정할 일이다. 묶어라!"
셋 아니 둘은 전투에 들어갔다. 아도니스는 리오를 지키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했지만, 야크는 신난다는 듯 칼을 휘두르며 마구 날뛰었다. 리오는 주변을 보며 외쳤다.
"잠깐! 제발, 제발 그만두세요! 그만 하시라구요!"
그런 리오에게 나다가 충고했다.
'리오야, 아무리 외쳐 봤자야. 니가 친구들을 도울 길은 어떻게 해서든 토끼는 거라구!'
그때 한 드워프가 도끼를 치켜들고 리오의 머리를 찍으려 휘둘렀다. 아도니스는 급히 막으려 했지만 정신을 판 사이 드와인의 도끼에 팔을 맞고는 겨우 몸만 피했다. 리오는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도끼의 빛나는 날을 보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으아아아악!"
나다는 이것이 악몽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악몽이다.
'세상에 엘프가 어딨어! 드워프가 어딨어! 마법사는 또 뭐람!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라구!'
그러나 눈을 감은 나다의 귓전에는 조금 전과 같은 시끌시끌한 소리가 사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듯 사방은 조용했다. 챙, 하고 무기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린다. 비록 꿈속이지만 나다는 리오가 도끼에 머리를 맞고 죽은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망설이다가, 조금 뒤 겨우 눈을 떴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방은 초록빛에 온통 물들어 있고 드워프들은 입을 쩍 벌리며 무기를 놓아버리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오 역시 주저앉은 채로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록빛 후광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으윽!"
신음하던 드와인은 배틀액스를 다시 바로 쥐고는 동족들에게 외쳤다.
"놀랄 것 없다! 인간의 사제들은 초록빛 마법을 쓴다고 들었다. 저건 치유마법이야!"
하지만 인간사제들의 치유마법을 본적이 없는 드워프들은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빛에 감히 도끼를 들이대지 못했다. 리오를 죽이려고 했던 드워프는 그의 앞에 엎어져서 머리를 감싸쥐고 벌벌 떨고 있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드와인은 부아가 치밀어서 도끼를 휘두르려 했으나 그때 리오의 어눌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드워프님, 어떻게 된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전 싸움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전 치유력을 잃었기 때문에 여기 있는 분들이 다치시면 고쳐드릴 수도 없어요. 여기는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데 왜 싸우려고 하지요? 저 밖의 인간들의 전쟁터는 정말 끔찍해요. 이곳은 이대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채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립니다. 제가 만약 잘못한 것이 있다면 사과 드릴께요."
리오는 드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엎드렸다. 나다는 리오의 말이 전혀 설득력이 없고 게다가 유치하기까지 해서 그만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리오는 몹시 간절하게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외로운 산의 드워프들은 거침없이 솔직하고 정직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훌륭한 말과 대단한 언변보다는 리오의 이런 어눌한 솔직함이 더욱 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드와인은 엎드린 리오를 한참 보더니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킨 채 아도니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자는 누구지?"
아도니스는 리오에게서 나오는 성스러운 초록빛 후광에 취해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엄숙하게 말했다.
"이것은 사제들의 치유마법이 아니다. 보면 모르겠는가 드와인? 이분은 레이디께서 인정하신 인간의 성자이시다."
"저기 아도니스님.. 저 성자 아닌데요.."
리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도니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당황하여 우물쭈물거리는 리오의 말은 야크의 멍한 말에 묻혀졌다.
"이게 뭐야? 정말 성잔가? 이건 그저 마법의 빛이 아닌데... 다른 녀석들도 그럴 것이다, 마음속의 전의가 사라졌다. 이건 마법이 아니야."
드와인은 방금까지도 야크와 치열하게 싸웠던 것을 잊고 멀거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야크는 당혹감이 가득찬 목소리로 여전히 우레처럼 말했다.
"성자의 후광 특징이 그거야. 마법사의 빛 같은 건 그냥 빛일 뿐이지. 사제들의 치유력에 의한 빛도 성스러운 느낌이 들긴 하지만 조금 마음이 편한 정도지 적의를 사라지게 하진 못해. 그러나 지금의 빛은 마법의 빛 따위와는 다르다. 빛은 보조일뿐이고 '무언가'가 있기에 그 '무언가'가 내뿜는 빛. 그게 후광이란거지."
"오오.."
드워프들이 신음하며 자신을 쳐다보자 리오는 질색하여 뒤로 넘어졌다. 그러자 주변을 푸르게 물들이던 빛이 사라졌다. 혼란스러워진 야크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다는 지금의 상황이 황당하기도 하고 너무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보기가 고통스러웠다. 꿈을 통해 보고 있는 그로서는 아도니스나 드워프들이 받은 느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전 성자가 아니라구요!"
조용한 가운데 리오의 공허한 외침만이 숲을 울렸다.
"그것은 일종의 파장입니다."
아도니스는 드워프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면서 엘 다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의 일이다. 당시 아도니스는 자신이 존경하는 레이디 엘 다온이 이름 모를 한 인간을 그토록 흠모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엘다온은 빙긋 웃으며 아도니스에게 질문했다.
"신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도니스."
갑작스런 질문에 당혹한 아도니스는 잠시 생각했다. 엘 다온은 굳이 그에게서 답을 받아내려 하진 않았다.
"아름다운 진리와 함께하는 자. 일단 저는 신성을 그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진리, 침묵, 평화... 어느 피조물에게나 고유의 파장이 있습니다. 화를 내면 그 독한 파장이 상대방과 나를 해치고, 순수한 신성의 파장은 사람을 편안케 합니다. 일단 제가 생각하기로는, 신성의 파장이 강한 자를 신성한 자라고 부르고 싶군요."
"그것은 타고나는 것입니까?"
엘 다온은 빙긋 웃었다. 아도니스는 자신의 질문이 왠지 조악한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세상의 피조물들은 모두가 신성을 타고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을 잊고 삽니다. 제가 그 사제님을 흠모하는 것은 이타냐에서 본 중 가장 신성에 가까운 분이기 때문이죠. 그분을 직접 뵈었으면 좋겠군요. 그분의 파장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요."
아도니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인계에 온 후 엘프들의 라임 숲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엘 다온이 언제 그 사제를 보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도 또한 엘 다온의 옆에 있으면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니, 그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나다는 배가 너무 고파서 잠에서 깼다. 깨어보니 옆에서는 시케가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다, 리오는요? 무사한가요?"
하품을 먼저 늘어지게 한 나다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나 배고파!"
시케는 씨근거리더니 벼게로 나다의 얼굴을 팍 쳤다.
"애태우지 좀 말아욧!"
잠시 후, 나다는 밀려나오는 코피를 솜뭉치로 막으며 계속 빵과 수프를 입에 우겨 넣었다. 시케는 리오가 무사하다는 말에 싱글벙글이었다. 나다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건 그냥 꿈일지도 몰라, 알겠지?"
그는 숟가락을 입에 물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야, 시케.. 리오녀석이 진짜 성자냐?"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곧 후회했다.
'윽! 나까지 왜이러지?'
그러나 시케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답했다.
"그으럼요!"
나다는 뻔한 질문을 한 자신을 자책했다.
그날 하루종일 나다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제들의 숙소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그는 문득 멈춰 섰다.
'신성이란 무엇일까? 그 동안 나는 단지 휘황찬란한 능력, 권능, 이런 것을 두고 신성이라고 해온 걸까? 우리가 신에 관해 얘기할 때도 신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성이란 능력을 일컬음인가? 신룡은? 오래 살아서?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나다는 신성 따윈 모른다. 그는 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다가 영문도 모르고 찾아다니는 것,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어쩐지 리오와 같이 다니다보면 알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리오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다는 깜짝 놀랐다.
'허억! 내가 미쳤나봐! 이게 꿈인가?'
그는 자신의 뺨을 미친 듯이 꼬집으며 잡아당겼다. 그러나 뺨만 얼얼할 뿐 정신은 말짱했다.
'나다, 제 목소리 들리나요?'
"으, 으응. 들려."
나다는 미친척하고 대답하기로 했다. 그러자 바로 답이 날아왔다.
'정말요? 와! 대단해요! 드디어 내 말에 응답해주는군요! 십 년이 넘게 난 이날을 기다렸다구요!'
나다는 저물어 가는 석양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풀밭 위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외쳤다.
"난 안 미쳤어! 난 안 미쳤어!"
'에, 에엑?'
디굴거리기를 멈춘 나다는 사지를 쫙 벌린 채 풀밭 위에 누워서 붉게 물드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씩씩거리는 숨이 잦아들 때 즈음 조심스러운 리오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 들려왔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가요?'
나다는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되물었다.
"내 걱정하게 생겼냐 니가? 그래, 어떻게 됐어? 그 난쟁이들이 무사히 보내준대?"
그는 속으로 조마조마 했다. 만약 리오가 네, 하고 대답한다면 나다가 꾼 그 많은 리오에 관한 꿈이 다 현실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네, 곧 보내준대요. 그분들이 자신들의 동굴에 들러달라고 하셔서 지금 외로운 산에 있어요. 동굴이 참 아름답더군요. 아도니스님은 싫어하셨지만.'
나다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생각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진짜 나다가 미쳤을 경우와, 진짜 이것이 사실인 경우. 하지만 나다는 동방에서 왔다는 신룡도 본적이 있고, 리오는 실제 나다의 마음을 읽었다. 그래서 나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리오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고 그 꿈도 진짜라고.
사실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냥 인정해버렸다.
"그래,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다는 잠자코 리오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동안 리오는 말이 없었다. 갑자기 나다의 가슴에 묵직한 통증을 느껴졌다. 꿈속에서 나다가 시케에 대한 리오의 감정을 느꼈듯이, 지금 나다는 리오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뭐야? 너 슬프냐? 아니면 우울한 거냐?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이야?"
불쾌해진 나다가 시비걸듯이 물었다. 별로 좋은 감정도 아닌 것을 가슴속에 느껴버리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냥.. 부담되고 싫어서...'
"뭐가?"
리오는 한숨을 쉬었다.
'그분들이 자꾸 절 성자라고 하시는데.. 전 성자가 아니에요. 나다도 잘 알지요?'
"흠, 난 헤깔리는 중이다."
'어? 나다마저? 아니에요, 난 성자가 아니에요. 내가 잘 알아요. 난 그분들을 속이는 거에요. 그분들은 실망할 거에요,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알면 그분들은 날 경멸할 거에요!'
나다는 리오가 지나치게 흥분하자 조금 의아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왜 네가 그 녀석들을 속인다고 하는 거지? 지네들 마음대로 떠받들고 지네들 마음대로 실망할텐데 그런 거에 무슨 신경을 써? 그리고 경멸할거라니?"
'주변에서 그렇게 말해주고 잘해주면 나도 착각에 빠져버릴 거에요. 내가 정말로 잘난 줄 알고 교만에 빠질 거라구요. 성자라니요, 말도 안돼요. 어떻게 이럴 수가!'
어이가 없어서 나다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 정말 웃긴다? 마치 누군가 너에게 악마라고 말한 것처럼 흥분하는구나?"
'진실이 아니니까요! 난 성자가 아닌데 성자라고 부르며 나에게 성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싫어요!.'
"아하,"
나다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거구나? 기대하는 게 싫다 이거지..."
'내 진짜 모습을 알고 나면 날 경멸할 거에요. 날 경멸할 거에요. 날..'
"야,"
나다가 리오의 말을 막았다.
"쫀쫀하게 굴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신경 쓰지 말라고. 그냥 너는 너 스스로 존재할 뿐이야, 알겠니? 성자 건 악마 건 말이다."
오호라? 말해놓고 나니 자신이 왠지 대단한 말을 한 듯한 생각이 들어 나다는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트하하, 나도 가끔 이런 멋진 말을 한다 이거야, 트하하!'
리오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다시 명랑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정말 고마워요!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지요. 그리고 내 안에는 신께서 계시니 내가 왜 걱정을 하겠어요? 이제 마음이 편안해요. 고마워요.'
나다는 리오가 다시 명랑해진것은 기분 좋았지만 '지독하게도 사제다운' 말투가 거슬렸다.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음하하... 근데 웃긴다, 리오야?"
'뭐가요?'
"음.. 뭐랄까 잠잘 때는.. 네 주변 영상이 다 보이거들랑? 근데 눈 말짱히 뜰 땐 네 목소리만 들리는구나. 너는 어때?"
'...음.. 전 영상을 본적이 없어요. 항상 느낌과 목소리... 대단한데요, 나다. 수련을 조금만 하면 되겠어요. 조금 가르쳐 드릴게요. 어때요'
"수우련?"
잠시 나다의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다. 나다의 머릿속에 떠오른 수행이란, 불구덩이 위에 눕기, 땅에 몸을 묻고 머리만 내놓기, 칼 위에서 걸어다니기, 얼음을 깨고 영하의 물 안에서 목욕하기... 그리고.....
"싫어!"
'나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사제들이 하는..'
나다의 머릿속에는 다시 수련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제들이 하는 수련, 신에게 고해하며 자신의 등에 채찍을 내리치는..
'그게 아니라니깐요!'
"그만해 그만! 꺼져!"
나다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머리를 쥐어 싸고 풀밭 위를 디굴디굴 굴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다가 노려보자 그들은 '미친놈이다!'하며 도망갔다.
그러다가 나다는 문득 리오의 마음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리오?"
조심스레 불러봐도 대답이 없다. 나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제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
'글 > (완결)장편-프리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리즘] 1부 3장 외로운 산의 불화 (4) (2) | 2009.11.19 |
---|---|
[프리즘] 1부 3장 외로운 산의 불화 (3) (0) | 2009.11.18 |
[프리즘] 1부 3장 외로운 산의 불화 (1) (0) | 2009.11.16 |
[프리즘] 1부 2장 무지개빛 구름 (4) (0) | 2009.11.15 |
[프리즘] 1부 2장 무지개빛 구름 (3) (4) | 2009.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