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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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인만을 위한 세상 (2)
마차는 다시 베이리크린를 향했다. 실의에 빠진 리오는 멍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케는 그런 그를 계속 위로하고 있었고, 반은 말없이 마차를 몰았다. 드워프는 씩씩거리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드워프 말로 뭐라 중얼거리고 있고, 야크는 또 잠만 잤다. 나다는 리오와 계속 다니는 것이 과연 좋은지 곰곰이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찔찔 짜는 여행이라면, 차라리 굶는 게 낫다. 문득 그는 지난 몇 달간을 되돌아보았다. 나다는 혼자였고 나름대로 홀가분했다. 그런데 마룡석을 줍고 리오를 만난 뒤부터 그다지 평화롭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다는 '앞에 앉아 계신 성자'를 바라보았다.
'흥, 성자라니, 웃기는 일이야.'
물론 그 자신도 부인한다. 오히려 그것을 부담스러워한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나다가 리오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은 왔다가 사라지고 들끓다가 가라앉는다. 좋아하는데는 생소하다. 하지만 미워하는데는 익숙하다. 만약에 리오가 나다의 적이었다면 이렇게 나다의 마음이 이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넌 누구냐."
멍하니 있던 리오는 나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내 인생에 뛰어들어서 와장창 흔들어버리는 너는 누구냐구."
리오는 웃으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가 상태인지라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긴요, 나다의 친구지요. 나다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나는 나다의..."
그러더니 리오는 말을 멈췄다. 나다가 독살스레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친구같은 거 없어. 그리고 너랑 나랑 가장 친한 친구랄 수가 있을까? 너랑 나랑 얼굴맞대고 있은 지 며칠이지?"
잠든 줄 알았던 야크가 여전히 눈은 감은 채로 거친 말을 툭 던졌다.
"왜 또 시비야? 며칠 잠잠하더니."
"그럼 제가 묻겠어요. 전 나다의 무엇이지요?"
리오는 나다를 빤히 쳐다보았다.
'으, 이런 기습을!'
당황한 나다는 우물쭈물,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 글쎄, 음, 난 널 작은 마을에서 만났고...그 뒤론 꿈속에서 봤고... 또 그 뒤론... 던전에서 본 뒤로 같이 있었지. 아, 진짜 얼굴 본 기간은 짧구나. 그런데...음..."
"시간에 상당히 집착하는군."
여전히 눈을 감은 야크가 다시 퉁명스레 말을 뱉았다. 리오는 눈을 반짝이며 나다를 쳐다보았다.
"아직 답하지 않았어요."
나다는 쪽팔려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 그냥, 그냥 널 보면 답답해."
"왜지요?"
돌을 밟은 마차가 덜컹, 요동을 쳤다. 평소같으면 욕을 나발나발 했을 나다는 지금 한숨만 푹 쉬었다.
"언제나 슬픈 일만 당하니까. 언제나 자기가 다 짐을 지려고 하니까. 난 니가 그만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하는 김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줄줄 말했다.
"그리고 날 좋아해 주니까, 신뢰해주니까 싫지는 않지. 왜 그런지 몰라서 혼란스럽지만 말이야. 그리고 넌 좋은 녀석이야. 네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좋아...."
이런 낯뜨거운 소리를 하는 자신이 이상하다. 그의 옆으로 바싹 다가온 리오는 얼굴을 올려다보며 약하게 미소지었다.
"난 내 칭찬을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말해봐요. 난 나다의 무엇이지요?"
우물쭈물거리는 것이 답답해진 야크는 누운자리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호통치듯이 말했다.
"어이구 답답해라. 그게 친구지 뭐야! 거참 복잡하네."
"그, 래, 리오. 넌 내 친구야."
나다는 쪽팔려 했지만 리오는 너무나 기뻐서 저도 모르게 빙긋 미소지었다. 드디어 나다가 자신을 친구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미소에도 슬픔이 담겨 있어 지금 리오의 미소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는 그 특유의 아름다운 미소가 되었다. 나다는 리오의 미소가 참 다양하다고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리오, 어느날 내가 말없이 떠나도 날 용서해주겠니? 어느날 내가 널 이유없이 싫어해도, 날 용서해주겠니?"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나다가 속으로 중얼거릴 때 리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다는 그때 깨달았다. 쓰지도 못하는 귀한 마룡석을 심장에서 꺼내버렸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한 보석을 얻었다는 것을. 언제나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위해주고 기도해줄, 아무리 심한 짓을 해도 용서해주고, 슬플 때 위로해줄, 세상에 다시없는 친구를 얻었다는 것을.
그렇지만 나다는 스스로가 그런 보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나다."
리오의 말에 의아해진 나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리오의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지려 했지만 그는 억지로 얼굴을 폈다. 고통스러운 미소를 지은 리오가 나다에게 말했다.
"나를 위로하려고 일부러 다른 화제를 꺼낸 거지요?"
'음.'
나다는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었지만, 리오는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하늘에 계신 그분들도 제가 이런 못난 모습 보이는 것 좋아하시지 않겠지요. 힘내겠습니다. 그분들도..."
목이 메여 더이상 말은 하지 못했다. 리오는 맑은 초록빛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풍경은 힘차게 뒤로 물러갔다.
"네가 울어주었으니 그들도 기쁠거다. 이제 그만 울어, 이 찔찔아!"
장난인지 진심인지, 야크가 커다랗게 말했다. 그리고 두꺼운 손으로 리오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웃어!"
리오는 야크를 보고 마치 보여주듯이 환하게 웃다가 그 모양 그대로 눈에서 커다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런 모양으로 웃는답시고 하, 하.. 하다가 그만 웃음인지 울음인지 끅끅거렸다.
"아이구, 차라리 관둬라! 젠장할, 울어, 울어!"
그러자 리오는 진짜로 바닥을 짚고 대성통곡을 했다. 얼마나 격렬하게 울어대는지 야크가 후회할 정도였다. 너무 울어서 탈진할 때까지 통곡하고 통곡했다.
일행은 다시 베이리크린에 도착했다. 도착할 때 즈음 리오는 탈진해서 잠들어있었다.
마차를 여관에 맡긴 후 일행은 축 늘어진 리오를 데리고 일치감치 숙소에 들어갔다. 그를 침대에 뉘인 뒤 다같이 모여 앉는다. 한참의 침묵 후 나다가 말했다.
"빨리 이 기분 나쁜 도시를 떠나자."
그의 말에 모두들 말없이 동의했다. 베이리크린은 케이와이단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황인은 소집되어 노예가 된다는 말에 나다는 잠시 하인흉내를 내기로 했다. 하지만 드와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열등한' 드워프족이라고 역시 하인흉내를 내야했다. 자존심 높은 드와인이 펄펄 뛰었지만 하룻밤은 자고 가야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하루만 참아요. 지금 리오상태로는 노숙할 수 없어요."
시케의 간곡한 부탁에 드와인은 얼굴만 벌개가지고 말을 못했다. 나다는 사제들의 수발을 드는 것으로 정하고, 드와인은 야크의 몸종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뿐이었다. 그래도 드와인은 굉장히 자존심 상해했다.
"신룡의 몸종이면 출세한거지 뭐."
나다는 드와인의 속을 재미로 긁다가 엄청나게 후회했다. 커다란 배틀액스를 휘두르면서 마구 쫓아왔기 때문이다.
다음날이 되자 걱정과 달리 리오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저, 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리오의 말에 다들 재빨리 떠날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빨리 떠나기 위해 간단한 행장조차 풀지 않았다. 그러나 괜히 서두르다가 병사들의 눈길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차를 타고 갈 때는 일부러 천천히 몰았다.
이곳은 완벽한 백인종의 도시였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모두 단정한 머리모양과 깨끗한 의상, 걸음걸이조차 마치 병사들처럼 절도 있었다. 나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놈들....'
갑자기 한 켠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호통소리와 애원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다.
"끌고 가!"
"사, 살려줘, 난 몰랐다구! 난 몰랐어!"
갑자기 리오의 표정이 변했다.
"잠깐! 반, 세워요!"
"?"
마차가 서자마자 리오는 서둘러 뛰어내려 그 소동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다른 일행들은 영문을 모르고 쫓아갔다. 소란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호통소리.
"이 더러운 문둥이가 화장실을 더럽히다니!"
"난 문둥이가 아니야! 다 나았다구!"
그는 나환자촌에서 만난 붕대산적 스파크였다. 병사들과 옥신각신하던 스파크는 달려오는 일행을 보고 외쳤다.
"아, 아! 성자님! 성자님 살려주세요!"
스파크는 일행 쪽으로 재빠르게 뛰어왔다. 일행도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스파크가 일행에게 가까이 왔을 즈음, 병사가 던진 칼이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스파크는 달려오던 기운에 못 이겨 앞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던 스파크를 리오가 받아 안았다. 그의 피가 리오의 사제복을 붉게 물들였다.
"읍... 서, 성자님..."
"스파크님!"
스파크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전하려 애썼다.
"와..두목...브, 브라이언..... 영주에게.... 지...하..감옥에....."
"이봐! 비켜, 그건 더러운 문둥이라고!"
병사의 거친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왜, 왜...왜!"
병사들은 거센 리오의 기세에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창을 꼬나 잡고 으르렁댔다.
"사제로군! 끝내 도시의 종단이 영주에게 대항하겠다?"
소란이 커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행과 병사, 죽어가는 스파크를 중심으로 사람들은 둥글게 모였다. 일행은 주변을 보며 긴장했다. 병사들을 말없이 응원하는 베이리크린의 시민들이 점점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마치 벽처럼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리오는 또 야크가 사람들을 학살할까봐 걱정되었지만 쿨럭이며 쏟아지는 스파크의 피에 응급조치를 하느라 뭐라 말할 시간이 없었다. 야크가 자신의 거대한 칼 손잡이를 잡자 나머지 일행마저 안색이 변했다. 일행은 적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이 묘한 상황에 웃어야될지 울어야 될지 알수가 없었다.
"멈추시오!"
"멈춰라!"
양쪽에서 동시에 호령이 들렸다. 사람들이 갈라지면서 양쪽에서 각각 한사람씩 다가왔다. 한사람은 바로 나환자 마을의 기사였고 그는 병사들 쪽에 섰다. 다른 한쪽엔 화려한 복장의 사제가 걸어와 리오 일행의 앞을 섰다.
"케이와이단의 수석기사 그랜드 브룬하르트님에게 인사드립니다."
사제가 인사에 기사가 답했다.
"저 역시. 아미앙스 수도단의 주교이신 빅터 슈텔터 사제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마어마한 명함에 나다는 입을 딱 벌리고 이들을 쳐다보았다. 다른 일행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분들은 여행자라 도시의 규칙을 잘 모르십니다. 브룬하르트 경께서 널리 양해해주시기를."
빅터 주교의 정중한 말에 기사 또한 정중하게 말했다.
"저 여행자 분들이 여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자, 그걸 들고 따라 왓!"
병사가 리오의 품에 안겨 죽어 가는 스파크에게 손대려하자, 야크와 시케가 양쪽에서 앞을 가로막았다.
"흠, 이제 보니까 당신이 바로 그 문둥이들의 성자라는 자로군. 흥! 주교님의 얼굴을 봐서 이번에는 놓아주겠다."
기사 브룬하르트가 리오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소문도 소문이었지만, 브룬하르트가 가장 기분 나빴던 것은 나환자촌에서 죽어가던 나환자들이 열이면 열 죽어가면서 자신들의 '성자님'을 불렀다는 점이었다. 비록 나환자들이지만 무언가의 계기로 마음이 모인다면 무시 못할 힘을 발휘한다. 브룬하르트는 그 점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는 리오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오는 그의 싸늘한 눈길에 맞받아 노려보았다. 브룬하르트는 병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시민들도 흩어졌다. 빅터주교가 리오를 보고 쾌활하게 말했다.
"자, 우리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성자님. 제 이름은 빅터 슈텔터, 이곳 베이리크린의 교구를 맡은 아미앙스 소속 주교입니다."
브룬하르트가 사라지자 리오는 평소의 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몹시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주, 주교님, 전 성자가 아닙니다. 그,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전 평사제입니다. 아, 이름은 리오 크리프너입니다. 아차차, 예, 아미앙스 소속이구요."
종단의 높으신 어른 앞에서 리오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시케와 반은 견습사제였고, 리오는 사제, 그 다음 단계는 대사제이고 그 다음이 주교이다. 빅터주교는 리오가 감히 그 앞에 앉아있지도 못할 만큼 높은 위치였다.
지금 리오의 앞에 선 빅터주교는 서른이 안되어 보이는 몹시 젊은 나이였다. 아미앙스 수도단은 치유력을 중시하기에 다른 교단과는 달리 젊은 사람이 주교가 될 수 있었다.
빅터 주교는 리오의 두 손을 잡고 경모의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정말,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으윽. 나다는 소름끼치는 감동의 도가니를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주교는 성화속의 사람이 예언자를 바라보는 듯한 감격의 표정을 지으며 리오에게 말했다.
"사원으로 가시지요! 수도원의 형제들도 모두 성자님을 뵐 영광을 가질 수 있도록!"
리오는 안되겠다 싶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전 성자가 아닙니다, 주교님. 자꾸 그러시면 정말 불편합니다."
"정말 겸손하시군요!"
리오는 아예 포기해버렸다. 그는 나다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행은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파크는 겨우 목숨은 붙었으나 언제 죽을지 모를 혼수상태속에서 계속 껄떡거렸다. 그의 옆에 앉아 걱정스레 바라보던 리오가 나다를 향해 말했다.
"브라이언님이 살아 계신가 봅니다. 그런데 영주님의 지하감옥에 갇히다니... "
빅터 주교가 리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요새 갑자기 영주님이 이상해지셨습니다. 분명히 케이와이단의 협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 전에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분이셨으나, 요즘 갑자기 케이와이단의 브룬하르트와 긴밀해지시더니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폐혜는 이미 여러분들도 보셨을 테지요."
동료들은 그의 말에 모두 벌레 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낭랑한 주교의 목소리는 발음도 똑똑했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빅터 주교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갈색머리에 푸른 눈, 하얀 피부. 전형적인 백인이다. 눈은 커다랗고 눈썹은 짙었으며 속눈썹은 길었다. 성직자로서 평생 독신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에 비해 옆에 선 리오는 초라한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고생으로 지친 듯한 얼굴, 표정 자체가 웃는 모양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일자로 직 그어놓은 듯한 눈, 헝크러진 머리.. 한마디로 누군가에게 '저 중에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열이면 열 빅터주교를 찍을 정도였다.
빅터주교는 웅변가의 기질도 있는 듯, 좌중을 압도하며 설명했다. 그 모습 또한 버버거리는 어눌한 리오의 말과 비교되었다.
"케이와이단이 도시에 오기 전 까진 그래도 인심이 야박하진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인이나 장애인에게 너그러운 사람들이었기에 오히려 우리 도시엔 그런 뒷골목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죠. 그런데 케이와이단이 영주님과 친해지자,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인간청소'가 시작된 것이죠."
주교는 한숨을 쉬었다.
"거기다.. 이건 소문이지만, 저 깊은 지하감옥에서는 끔찍한 생체실험들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입니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영주님이 그렇게 까지 변하셨다고는... 하지만..."
'생체실험'이란 단어에 리오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쳤다.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서스턴의 던전에서의 일이 나다의 마음에도 비치려 했다. 기겁을 한 나다는 일부러 리오의 마음을 읽지 않고 무심하게 끊어버렸다.
이젠 그게 된다. 나다는 스스로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사로잡혀 들어간 사람들이 한 명도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심장이 갈라져있었습니다. 끔찍한 일이죠. 도시의 교단과 케이와이단의 반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영주님께서는 사원에도 나오지 않으십니다. 현재 교단은 위험합니다. 지금 사제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고 여기는 몇 명밖에 남지 않았죠."
야크가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수상해. 영주의 성이 저기 저 커다란 거냐?"
빅터 주교는 야크의 무례한 반말에 조금 움찔했지만 이내 웃음을 어색하게 짓고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영주가 갑자기 변했다면, 악령에 홀렸거나 뭐 그럴 가능성이 짙다. 저 기운으로 봐서는."
빅터 주교는 그 큰 눈을 더욱더 크게 뜨며 야크에게 말했다.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실은 저도 이상한 기운을 느낍니다. 종단에 여러 번 탄원하였습니다만, 아무래도 지원이 오기 전에 늦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을 만난 것은 신의 은총입니다."
"우리만 갖고 뭘 하겠어? 괜히 목숨만 위태롭겠군."
나다의 말에 동료들이나 주교나 모두 거슬려했지만 옳은 말인데 어쩌겠는가? 잠깐 침묵.
빅터 주교는 침묵을 뚫고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잠시 흥분했군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귀한 손님입니다. 수도원에서 푹 쉬어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주교님."
다음날 나다는 늦잠을 잤다.
'아 피곤해.....'
그것은 리오 때문이었다. 리오는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를 하고 새벽기도를 올린 뒤 수도사들의 아침을 준비하는 등 나다의 생각으로는 '난리 법석을 폈다'. 나환자촌에서도 그렇듯, 꿈속에서 리오가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나다는 새벽잠을 설치고 말았다.
수도사들이 그런 리오를 말렸지만 그는 빙그레 웃으며 여기저기 바쁘게 오갔다.
'난 저런 놈들이 이해가 안가. 잠자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쩝.'
투덜거리면서 한참 늦잠을 자는데 또 밖이 벅적지글해서 잠에서 깼다.
"에잇! 저리 비켜! 내가 걸어갈 수 있다구!"
드워프 드와인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그는 아예 악을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밖으로 나간 나다는 그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바깥은 난장판이었다. 수도원의 창문은 깨어져 있었고 대문에도 도끼가 찍혀 있었다. 수도원의 하얀 벽에는 시뻘건 글자로 '지옥에나 가라!'고 쓰여있었다. 그 뿐이 아니라 해골이나 신성 모독적인 그림도 검게 칠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수도원의 본당이 모두 파괴되었고 대대로 내려온 성자의 상이 부서져있었다. 구타당한 수도사 두셋이 다른 수도사들에 의해 실려갔다. 다들 침울한 얼굴이었다.
"습격입니다. 과격 극우청년들이 수도원을 습격했어요."
다른 수도사의 설명을 듣고 나다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온통 피투성이가 된 드와인에 그의 눈에 들어왔다.
"드와인! 어떻게 된 거야?"
강건한 드워프는 핏덩이를 퉤! 뱉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수도원 밖으로 나가자마자 당했어. 이런 제길! 갑자기 덤비는데 도리가 없더군."
"이건 케이와이단의 사주에 의한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가서 항의해야겠습니다!"
급히 행장을 챙긴 빅터 주교는 결연한 얼굴로 문을 나섰다. 그가 걱정되어 반이 따라나섰다. 용병출신 사제이니 호위가 될 것이다. 나다는 드와인을 노려보았다.
"야이 멍청한 드워프야. 위험한데 밖엔 왜나갔어?"
"흥, 멍청한 나다야. 영주의 지하감옥 설계는 우리 선조의 작품이야. 외로운 산 창고엔 선대의 설계도가 많이 보관되어있어. 설계도를 본적이 있어서, 내 기억과 실제가 맞나 맞춰보러 간 거야."
"너....지하감옥 진짜 가볼 거야?"
드워프는 수염을 휘날리며 화를 냈다.
"당연하지! 브라이언은 괜찮은 인간이야! 친구가 잡혀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어?"
'으윽. 의리의 드워프로군.'
그때 야크가 불쑥 끼어 들었다.
"맞어. 맞어. 지 혼자 살려고 도망갈 궁리만 하는 누구랑은 틀리지. 흥."
'으윽! 야크, 이 뻘건 지렁이 녀석!'
야크의 말에 시케가 나다를 옹호했다.
"너무 나다를 몰아세우지 마세요. 나다는 말만 그럴 뿐이라구요, 그쵸?"
'윽... 저런 말이 더 무서워. 난 진짜 상관하고 싶지 않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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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인만을 위한 세상 (2)
마차는 다시 베이리크린를 향했다. 실의에 빠진 리오는 멍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케는 그런 그를 계속 위로하고 있었고, 반은 말없이 마차를 몰았다. 드워프는 씩씩거리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드워프 말로 뭐라 중얼거리고 있고, 야크는 또 잠만 잤다. 나다는 리오와 계속 다니는 것이 과연 좋은지 곰곰이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찔찔 짜는 여행이라면, 차라리 굶는 게 낫다. 문득 그는 지난 몇 달간을 되돌아보았다. 나다는 혼자였고 나름대로 홀가분했다. 그런데 마룡석을 줍고 리오를 만난 뒤부터 그다지 평화롭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다는 '앞에 앉아 계신 성자'를 바라보았다.
'흥, 성자라니, 웃기는 일이야.'
물론 그 자신도 부인한다. 오히려 그것을 부담스러워한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나다가 리오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은 왔다가 사라지고 들끓다가 가라앉는다. 좋아하는데는 생소하다. 하지만 미워하는데는 익숙하다. 만약에 리오가 나다의 적이었다면 이렇게 나다의 마음이 이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넌 누구냐."
멍하니 있던 리오는 나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내 인생에 뛰어들어서 와장창 흔들어버리는 너는 누구냐구."
리오는 웃으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가 상태인지라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긴요, 나다의 친구지요. 나다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나는 나다의..."
그러더니 리오는 말을 멈췄다. 나다가 독살스레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친구같은 거 없어. 그리고 너랑 나랑 가장 친한 친구랄 수가 있을까? 너랑 나랑 얼굴맞대고 있은 지 며칠이지?"
잠든 줄 알았던 야크가 여전히 눈은 감은 채로 거친 말을 툭 던졌다.
"왜 또 시비야? 며칠 잠잠하더니."
"그럼 제가 묻겠어요. 전 나다의 무엇이지요?"
리오는 나다를 빤히 쳐다보았다.
'으, 이런 기습을!'
당황한 나다는 우물쭈물,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 글쎄, 음, 난 널 작은 마을에서 만났고...그 뒤론 꿈속에서 봤고... 또 그 뒤론... 던전에서 본 뒤로 같이 있었지. 아, 진짜 얼굴 본 기간은 짧구나. 그런데...음..."
"시간에 상당히 집착하는군."
여전히 눈을 감은 야크가 다시 퉁명스레 말을 뱉았다. 리오는 눈을 반짝이며 나다를 쳐다보았다.
"아직 답하지 않았어요."
나다는 쪽팔려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 그냥, 그냥 널 보면 답답해."
"왜지요?"
돌을 밟은 마차가 덜컹, 요동을 쳤다. 평소같으면 욕을 나발나발 했을 나다는 지금 한숨만 푹 쉬었다.
"언제나 슬픈 일만 당하니까. 언제나 자기가 다 짐을 지려고 하니까. 난 니가 그만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하는 김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줄줄 말했다.
"그리고 날 좋아해 주니까, 신뢰해주니까 싫지는 않지. 왜 그런지 몰라서 혼란스럽지만 말이야. 그리고 넌 좋은 녀석이야. 네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좋아...."
이런 낯뜨거운 소리를 하는 자신이 이상하다. 그의 옆으로 바싹 다가온 리오는 얼굴을 올려다보며 약하게 미소지었다.
"난 내 칭찬을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말해봐요. 난 나다의 무엇이지요?"
우물쭈물거리는 것이 답답해진 야크는 누운자리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호통치듯이 말했다.
"어이구 답답해라. 그게 친구지 뭐야! 거참 복잡하네."
"그, 래, 리오. 넌 내 친구야."
나다는 쪽팔려 했지만 리오는 너무나 기뻐서 저도 모르게 빙긋 미소지었다. 드디어 나다가 자신을 친구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미소에도 슬픔이 담겨 있어 지금 리오의 미소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는 그 특유의 아름다운 미소가 되었다. 나다는 리오의 미소가 참 다양하다고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리오, 어느날 내가 말없이 떠나도 날 용서해주겠니? 어느날 내가 널 이유없이 싫어해도, 날 용서해주겠니?"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나다가 속으로 중얼거릴 때 리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다는 그때 깨달았다. 쓰지도 못하는 귀한 마룡석을 심장에서 꺼내버렸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한 보석을 얻었다는 것을. 언제나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위해주고 기도해줄, 아무리 심한 짓을 해도 용서해주고, 슬플 때 위로해줄, 세상에 다시없는 친구를 얻었다는 것을.
그렇지만 나다는 스스로가 그런 보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나다."
리오의 말에 의아해진 나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리오의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지려 했지만 그는 억지로 얼굴을 폈다. 고통스러운 미소를 지은 리오가 나다에게 말했다.
"나를 위로하려고 일부러 다른 화제를 꺼낸 거지요?"
'음.'
나다는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었지만, 리오는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하늘에 계신 그분들도 제가 이런 못난 모습 보이는 것 좋아하시지 않겠지요. 힘내겠습니다. 그분들도..."
목이 메여 더이상 말은 하지 못했다. 리오는 맑은 초록빛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풍경은 힘차게 뒤로 물러갔다.
"네가 울어주었으니 그들도 기쁠거다. 이제 그만 울어, 이 찔찔아!"
장난인지 진심인지, 야크가 커다랗게 말했다. 그리고 두꺼운 손으로 리오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웃어!"
리오는 야크를 보고 마치 보여주듯이 환하게 웃다가 그 모양 그대로 눈에서 커다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런 모양으로 웃는답시고 하, 하.. 하다가 그만 웃음인지 울음인지 끅끅거렸다.
"아이구, 차라리 관둬라! 젠장할, 울어, 울어!"
그러자 리오는 진짜로 바닥을 짚고 대성통곡을 했다. 얼마나 격렬하게 울어대는지 야크가 후회할 정도였다. 너무 울어서 탈진할 때까지 통곡하고 통곡했다.
일행은 다시 베이리크린에 도착했다. 도착할 때 즈음 리오는 탈진해서 잠들어있었다.
마차를 여관에 맡긴 후 일행은 축 늘어진 리오를 데리고 일치감치 숙소에 들어갔다. 그를 침대에 뉘인 뒤 다같이 모여 앉는다. 한참의 침묵 후 나다가 말했다.
"빨리 이 기분 나쁜 도시를 떠나자."
그의 말에 모두들 말없이 동의했다. 베이리크린은 케이와이단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황인은 소집되어 노예가 된다는 말에 나다는 잠시 하인흉내를 내기로 했다. 하지만 드와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열등한' 드워프족이라고 역시 하인흉내를 내야했다. 자존심 높은 드와인이 펄펄 뛰었지만 하룻밤은 자고 가야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하루만 참아요. 지금 리오상태로는 노숙할 수 없어요."
시케의 간곡한 부탁에 드와인은 얼굴만 벌개가지고 말을 못했다. 나다는 사제들의 수발을 드는 것으로 정하고, 드와인은 야크의 몸종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뿐이었다. 그래도 드와인은 굉장히 자존심 상해했다.
"신룡의 몸종이면 출세한거지 뭐."
나다는 드와인의 속을 재미로 긁다가 엄청나게 후회했다. 커다란 배틀액스를 휘두르면서 마구 쫓아왔기 때문이다.
다음날이 되자 걱정과 달리 리오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저, 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리오의 말에 다들 재빨리 떠날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빨리 떠나기 위해 간단한 행장조차 풀지 않았다. 그러나 괜히 서두르다가 병사들의 눈길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차를 타고 갈 때는 일부러 천천히 몰았다.
이곳은 완벽한 백인종의 도시였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모두 단정한 머리모양과 깨끗한 의상, 걸음걸이조차 마치 병사들처럼 절도 있었다. 나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놈들....'
갑자기 한 켠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호통소리와 애원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다.
"끌고 가!"
"사, 살려줘, 난 몰랐다구! 난 몰랐어!"
갑자기 리오의 표정이 변했다.
"잠깐! 반, 세워요!"
"?"
마차가 서자마자 리오는 서둘러 뛰어내려 그 소동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다른 일행들은 영문을 모르고 쫓아갔다. 소란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호통소리.
"이 더러운 문둥이가 화장실을 더럽히다니!"
"난 문둥이가 아니야! 다 나았다구!"
그는 나환자촌에서 만난 붕대산적 스파크였다. 병사들과 옥신각신하던 스파크는 달려오는 일행을 보고 외쳤다.
"아, 아! 성자님! 성자님 살려주세요!"
스파크는 일행 쪽으로 재빠르게 뛰어왔다. 일행도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스파크가 일행에게 가까이 왔을 즈음, 병사가 던진 칼이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스파크는 달려오던 기운에 못 이겨 앞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던 스파크를 리오가 받아 안았다. 그의 피가 리오의 사제복을 붉게 물들였다.
"읍... 서, 성자님..."
"스파크님!"
스파크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전하려 애썼다.
"와..두목...브, 브라이언..... 영주에게.... 지...하..감옥에....."
"이봐! 비켜, 그건 더러운 문둥이라고!"
병사의 거친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왜, 왜...왜!"
병사들은 거센 리오의 기세에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창을 꼬나 잡고 으르렁댔다.
"사제로군! 끝내 도시의 종단이 영주에게 대항하겠다?"
소란이 커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행과 병사, 죽어가는 스파크를 중심으로 사람들은 둥글게 모였다. 일행은 주변을 보며 긴장했다. 병사들을 말없이 응원하는 베이리크린의 시민들이 점점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마치 벽처럼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리오는 또 야크가 사람들을 학살할까봐 걱정되었지만 쿨럭이며 쏟아지는 스파크의 피에 응급조치를 하느라 뭐라 말할 시간이 없었다. 야크가 자신의 거대한 칼 손잡이를 잡자 나머지 일행마저 안색이 변했다. 일행은 적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이 묘한 상황에 웃어야될지 울어야 될지 알수가 없었다.
"멈추시오!"
"멈춰라!"
양쪽에서 동시에 호령이 들렸다. 사람들이 갈라지면서 양쪽에서 각각 한사람씩 다가왔다. 한사람은 바로 나환자 마을의 기사였고 그는 병사들 쪽에 섰다. 다른 한쪽엔 화려한 복장의 사제가 걸어와 리오 일행의 앞을 섰다.
"케이와이단의 수석기사 그랜드 브룬하르트님에게 인사드립니다."
사제가 인사에 기사가 답했다.
"저 역시. 아미앙스 수도단의 주교이신 빅터 슈텔터 사제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마어마한 명함에 나다는 입을 딱 벌리고 이들을 쳐다보았다. 다른 일행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분들은 여행자라 도시의 규칙을 잘 모르십니다. 브룬하르트 경께서 널리 양해해주시기를."
빅터 주교의 정중한 말에 기사 또한 정중하게 말했다.
"저 여행자 분들이 여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자, 그걸 들고 따라 왓!"
병사가 리오의 품에 안겨 죽어 가는 스파크에게 손대려하자, 야크와 시케가 양쪽에서 앞을 가로막았다.
"흠, 이제 보니까 당신이 바로 그 문둥이들의 성자라는 자로군. 흥! 주교님의 얼굴을 봐서 이번에는 놓아주겠다."
기사 브룬하르트가 리오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소문도 소문이었지만, 브룬하르트가 가장 기분 나빴던 것은 나환자촌에서 죽어가던 나환자들이 열이면 열 죽어가면서 자신들의 '성자님'을 불렀다는 점이었다. 비록 나환자들이지만 무언가의 계기로 마음이 모인다면 무시 못할 힘을 발휘한다. 브룬하르트는 그 점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는 리오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오는 그의 싸늘한 눈길에 맞받아 노려보았다. 브룬하르트는 병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시민들도 흩어졌다. 빅터주교가 리오를 보고 쾌활하게 말했다.
"자, 우리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성자님. 제 이름은 빅터 슈텔터, 이곳 베이리크린의 교구를 맡은 아미앙스 소속 주교입니다."
브룬하르트가 사라지자 리오는 평소의 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몹시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주, 주교님, 전 성자가 아닙니다. 그,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전 평사제입니다. 아, 이름은 리오 크리프너입니다. 아차차, 예, 아미앙스 소속이구요."
종단의 높으신 어른 앞에서 리오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시케와 반은 견습사제였고, 리오는 사제, 그 다음 단계는 대사제이고 그 다음이 주교이다. 빅터주교는 리오가 감히 그 앞에 앉아있지도 못할 만큼 높은 위치였다.
지금 리오의 앞에 선 빅터주교는 서른이 안되어 보이는 몹시 젊은 나이였다. 아미앙스 수도단은 치유력을 중시하기에 다른 교단과는 달리 젊은 사람이 주교가 될 수 있었다.
빅터 주교는 리오의 두 손을 잡고 경모의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정말,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으윽. 나다는 소름끼치는 감동의 도가니를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주교는 성화속의 사람이 예언자를 바라보는 듯한 감격의 표정을 지으며 리오에게 말했다.
"사원으로 가시지요! 수도원의 형제들도 모두 성자님을 뵐 영광을 가질 수 있도록!"
리오는 안되겠다 싶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전 성자가 아닙니다, 주교님. 자꾸 그러시면 정말 불편합니다."
"정말 겸손하시군요!"
리오는 아예 포기해버렸다. 그는 나다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행은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파크는 겨우 목숨은 붙었으나 언제 죽을지 모를 혼수상태속에서 계속 껄떡거렸다. 그의 옆에 앉아 걱정스레 바라보던 리오가 나다를 향해 말했다.
"브라이언님이 살아 계신가 봅니다. 그런데 영주님의 지하감옥에 갇히다니... "
빅터 주교가 리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요새 갑자기 영주님이 이상해지셨습니다. 분명히 케이와이단의 협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 전에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분이셨으나, 요즘 갑자기 케이와이단의 브룬하르트와 긴밀해지시더니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폐혜는 이미 여러분들도 보셨을 테지요."
동료들은 그의 말에 모두 벌레 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낭랑한 주교의 목소리는 발음도 똑똑했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빅터 주교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갈색머리에 푸른 눈, 하얀 피부. 전형적인 백인이다. 눈은 커다랗고 눈썹은 짙었으며 속눈썹은 길었다. 성직자로서 평생 독신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에 비해 옆에 선 리오는 초라한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고생으로 지친 듯한 얼굴, 표정 자체가 웃는 모양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일자로 직 그어놓은 듯한 눈, 헝크러진 머리.. 한마디로 누군가에게 '저 중에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열이면 열 빅터주교를 찍을 정도였다.
빅터주교는 웅변가의 기질도 있는 듯, 좌중을 압도하며 설명했다. 그 모습 또한 버버거리는 어눌한 리오의 말과 비교되었다.
"케이와이단이 도시에 오기 전 까진 그래도 인심이 야박하진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인이나 장애인에게 너그러운 사람들이었기에 오히려 우리 도시엔 그런 뒷골목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죠. 그런데 케이와이단이 영주님과 친해지자,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인간청소'가 시작된 것이죠."
주교는 한숨을 쉬었다.
"거기다.. 이건 소문이지만, 저 깊은 지하감옥에서는 끔찍한 생체실험들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입니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영주님이 그렇게 까지 변하셨다고는... 하지만..."
'생체실험'이란 단어에 리오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쳤다.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서스턴의 던전에서의 일이 나다의 마음에도 비치려 했다. 기겁을 한 나다는 일부러 리오의 마음을 읽지 않고 무심하게 끊어버렸다.
이젠 그게 된다. 나다는 스스로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사로잡혀 들어간 사람들이 한 명도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심장이 갈라져있었습니다. 끔찍한 일이죠. 도시의 교단과 케이와이단의 반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영주님께서는 사원에도 나오지 않으십니다. 현재 교단은 위험합니다. 지금 사제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고 여기는 몇 명밖에 남지 않았죠."
야크가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수상해. 영주의 성이 저기 저 커다란 거냐?"
빅터 주교는 야크의 무례한 반말에 조금 움찔했지만 이내 웃음을 어색하게 짓고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영주가 갑자기 변했다면, 악령에 홀렸거나 뭐 그럴 가능성이 짙다. 저 기운으로 봐서는."
빅터 주교는 그 큰 눈을 더욱더 크게 뜨며 야크에게 말했다.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실은 저도 이상한 기운을 느낍니다. 종단에 여러 번 탄원하였습니다만, 아무래도 지원이 오기 전에 늦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을 만난 것은 신의 은총입니다."
"우리만 갖고 뭘 하겠어? 괜히 목숨만 위태롭겠군."
나다의 말에 동료들이나 주교나 모두 거슬려했지만 옳은 말인데 어쩌겠는가? 잠깐 침묵.
빅터 주교는 침묵을 뚫고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잠시 흥분했군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귀한 손님입니다. 수도원에서 푹 쉬어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주교님."
다음날 나다는 늦잠을 잤다.
'아 피곤해.....'
그것은 리오 때문이었다. 리오는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를 하고 새벽기도를 올린 뒤 수도사들의 아침을 준비하는 등 나다의 생각으로는 '난리 법석을 폈다'. 나환자촌에서도 그렇듯, 꿈속에서 리오가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나다는 새벽잠을 설치고 말았다.
수도사들이 그런 리오를 말렸지만 그는 빙그레 웃으며 여기저기 바쁘게 오갔다.
'난 저런 놈들이 이해가 안가. 잠자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쩝.'
투덜거리면서 한참 늦잠을 자는데 또 밖이 벅적지글해서 잠에서 깼다.
"에잇! 저리 비켜! 내가 걸어갈 수 있다구!"
드워프 드와인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그는 아예 악을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밖으로 나간 나다는 그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바깥은 난장판이었다. 수도원의 창문은 깨어져 있었고 대문에도 도끼가 찍혀 있었다. 수도원의 하얀 벽에는 시뻘건 글자로 '지옥에나 가라!'고 쓰여있었다. 그 뿐이 아니라 해골이나 신성 모독적인 그림도 검게 칠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수도원의 본당이 모두 파괴되었고 대대로 내려온 성자의 상이 부서져있었다. 구타당한 수도사 두셋이 다른 수도사들에 의해 실려갔다. 다들 침울한 얼굴이었다.
"습격입니다. 과격 극우청년들이 수도원을 습격했어요."
다른 수도사의 설명을 듣고 나다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온통 피투성이가 된 드와인에 그의 눈에 들어왔다.
"드와인! 어떻게 된 거야?"
강건한 드워프는 핏덩이를 퉤! 뱉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수도원 밖으로 나가자마자 당했어. 이런 제길! 갑자기 덤비는데 도리가 없더군."
"이건 케이와이단의 사주에 의한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가서 항의해야겠습니다!"
급히 행장을 챙긴 빅터 주교는 결연한 얼굴로 문을 나섰다. 그가 걱정되어 반이 따라나섰다. 용병출신 사제이니 호위가 될 것이다. 나다는 드와인을 노려보았다.
"야이 멍청한 드워프야. 위험한데 밖엔 왜나갔어?"
"흥, 멍청한 나다야. 영주의 지하감옥 설계는 우리 선조의 작품이야. 외로운 산 창고엔 선대의 설계도가 많이 보관되어있어. 설계도를 본적이 있어서, 내 기억과 실제가 맞나 맞춰보러 간 거야."
"너....지하감옥 진짜 가볼 거야?"
드워프는 수염을 휘날리며 화를 냈다.
"당연하지! 브라이언은 괜찮은 인간이야! 친구가 잡혀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어?"
'으윽. 의리의 드워프로군.'
그때 야크가 불쑥 끼어 들었다.
"맞어. 맞어. 지 혼자 살려고 도망갈 궁리만 하는 누구랑은 틀리지. 흥."
'으윽! 야크, 이 뻘건 지렁이 녀석!'
야크의 말에 시케가 나다를 옹호했다.
"너무 나다를 몰아세우지 마세요. 나다는 말만 그럴 뿐이라구요, 그쵸?"
'윽... 저런 말이 더 무서워. 난 진짜 상관하고 싶지 않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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