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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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마왕강림 (3)



반군은 놀라운 속도로 영주군을 제압해나갔다. 영주의 공포정치에 반군의 숫자는 급속도로 늘어 그 수가 엄청났으며 다들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이전의 평화로운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반대로 영주군은 왜 싸우는지 스스로도 알수 없는 상태였다. 병사들 역시 갑자기 변한 영주에게 당혹을 느끼며 그의 폭정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교단까지 영주에게 등을 돌리자, 영주 휘하의 관군들은 다들 앞으로의 앞날을 암담해했다.
그리하여 영주군은 앞다투어 도망가거나 오히려 반군에 합류했다.
전투 일선에서 케이와이단을 독려하던 브룬하르트는 점점 밀리는 대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꽤 버텼군. 죽음과 고통과 저주와 증오가 온 대기를 울리는구나."

그리고는 상황에 맞지 않게 시익 웃었다. 어울리지 않는 승리자의 미소였다.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애처로운 얼굴의 에밀리가 주변을 둘러보며 간절히 말했다.

"제가 이런 모습이 되고 나서, 아버지는 저와 같은 장애인과 약한 사람들을 성심성의껏 돌보셨다구요. 하지만.. "

빅터주교로부터 이전의 도시모습을 들었던 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밀리의 말을 경청했다. 나다는 그런 리오가 한심스러웠지만 어차피 혼자 난리 쳐봤자 꿈쩍도 안할 것이 뻔해서 내버려두었다.

"그 코트니란 여자와 브룬하르트란 기사가 오고나서, 저에게 말씀하셨죠. 제 팔다리를 다시 돋아나게 할 수 있는 기적을 그들이 일으켜 줄 것이라고..."

맑은 눈물방울들이 에밀리의 고운 뺨 위에 도르르 굴렀다. 나다는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에 그리 동요되지 않은듯, 생뚱스러운 말투로 퉁 짧은 말을 뱉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팔다리를 돋아나게?"

그렇게 말하다가, 그는 리오를 휙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여깄잖아, 팔다리 돋아난 사람. 팔다리만 돋아났나? 눈코입귀..'

리오는 에밀리를 무척 안쓰러워하며 쳐다보았다. 고통스러워하며 에밀리는 말을 이었다.

"저도, 저도, 낫고싶지만. 그렇지만! 그때문에.. 아버님이 팔다리 없는 장애인과 황인으로 비밀리에 실험하신다는 말을 듣고.. 전..."

다들 충격을 받았다. 생체실험이 있는 것 같다는, 빅터주교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조그만 소녀의 갸녀린 음성으로 듣기엔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팔다리없는 장애인은 코트니가 실험 뒤에 죽이고.. 황인들의 심장은 모두 가른다고 해요. 너무 끔찍해요.. 으흐흑..."

다들 가녀린 에밀리의 흐느낌에 소녀를 무척 가련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내용에 다들 놀라버렸다. 나다는 뭔가가 짚였다.

"이봐, 리오. 뭔가 이상해! 팔다리 없는 장애인과 심장이 갈리는 황인...."

그는 리오를 툭 건드렸다.

"어쩐지 너랑 날 찾고있는거 같지 않냐?"

"무슨 소리야? 리오는 멀쩡한데."

반의 말에 나다는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었다.

"생각해봐. 리오는 야크에 의해 나을 때까지 팔다리가 없었어. 그러니까 서스턴은 지금 리오가 팔다리가 있는지 몰라."

하지만 반은 계속 반박했다.

"서스턴은 외로운 산에 갇혀있어! 설마 서스턴에 의한 농간이라는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니겠지? 너무 미리 짚는거 아니야?"

소녀는 계속 흐느껴 울었다.

"흑! 아버님이 저때문에.. 저때문에 그런 악마와 같은 짓을... 으흐흑..."

리오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은 그는 소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부드러운 얼굴로 위로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아가씨. 아가씨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아버님은 그런 죄를 저지르셨나봅니다. 하지만 아가씨 탓이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판에 박힌 위로에 나다는 짜증이 났지만 다시 곰곰 생각에 들어갔다.

'뭔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어. 그치? 뭔가 말이지.. 그게 뭐지?'

에밀리는 구슬프게 울다가 훌쩍이며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리오..시라구요? 당신이 그 문둥이의 성자란 분인가요?"

에밀리의 말에 나다는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으, 또나왔다 성자타령! 어절씨구나~'

'성자'란 말을 몹시 싫어하는 리오는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오해..."

리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에밀리는 울먹이며 물었다.

"그럼 왜 흑.. 사람들이 당신보고 무지개의 성자라고도 하죠?"

반이 옆에서 거들었다.

"전에 리오의 머리 위에 무지개 빛 구름이 뜬 적이 있어서에요. 사드라는 악마 때문이었죠. 그만 우세요 에밀리 아가씨.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에밀리는 리오를 유심히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자, 리오는 또 선량한 사람이 '성자'라는 허명에 속아 자신을 선망에 차 바라보는 것인가 하여 불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저도 이야기책 속의 소녀처럼 성자님에게 사랑이 가득한 포옹과 축복을 받고 싶었어요. 그래도 될까요? 흑, 흑..."

에밀리의 격찬(?)에 얼굴이 발개진 리오는 그녀의 울음소리에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허명이면 어떤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리오는 소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에밀리는 두 팔을 벌려 리오를 꼭 껴안고는 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기분 좋은 냄새가 나요."

그 순간 나다의 머릿속에는 섬광처럼, 무엇때문에 자신이 불편한 느낌을 받고 있는 지에 대한 이유가 떠올랐다.

'제기랄! 어린 소녀에게 그런 실험을 한다고 아버지란 작자가 떠벌릴수가 없어! 그걸 에밀리가 어떻게 아냐구! 심장을 가르는지, 부르스를 추는지! 아무도 모르는걸! 그런 추악한 실험을 순진한 소녀조차 알도록 방치하는 바보가 어딨어!'

한꺼번에 많은 일들을 깨달은 나다가 리오에게 외쳤다.

"비켜서! 리오! 갇혀만 산 아가씨가 너무 잘 알아! 뭔가 이상해!"

하지만 나다는 그 긴 말을 다 뱉기도 전에, 리오와 에밀리의 주변에는 어두운 빛이 둥글게 감싸오르고 있었다. 순간 놀란 동료들은 뒤로 물러섰다. 리오는 등을 감싼 에밀리의 손에, 연약한 소녀의 것이라고는 믿을수 없는 강한 힘이 조여지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몸을 뒤러 빼려 했어나 조금도 움직일수 없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반이 뛰쳐들어 둘을 떼어내려 했지만 곧 무형의 힘에 퉁겨져 나왔다.
눈을 감은 에밀리는 리오의 품에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비볐다.

"아, 이 냄새 맞아... 당신... 당신은... 팔다리, 어떻게 나았지?"

어두운 빛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에밀리 주변에 빨려들어, 그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에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나무는 미친듯이 춤을 추고 풀이 뿌리채 뽑혀나갔다. 나다는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제길! 제길!"

다른 이들에게 아랑곳없이 리오에게 말하는 에밀리의 말투는 더이상 청순한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눈은 어떻게 나았지? 귀는? 혀도 다 잘라냈을텐데?"

목소리는 섬뜩하고 차가웠다. 리오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 애썼지만 그 팔힘은 그가 떨칠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연약해보였던 그녀의 손은 힘줄이 돋은 거친 모양으로 변했다. 거칠게 틀어 쥔 그녀의 손아귀 힘에 리오는 살이 떨어져 나갈듯한 통증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힘껏 발버둥쳐 에밀리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자 그녀의 등에서 가늘게 마디진, 관절뿐인 팔이 돋아나 순식간에 덩굴처럼 그를 칭칭 감아 꼭 죄었다. 리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후후후, 문둥이성자? 이렇게 멀쩡한걸 모르고 팔다리 없는 병신들만 찾아다녔으니 발견할 수가 없지! 그럼, 어디보자, 저 호랑이였던 황인의 심장에 적룡 크리아미드의 마룡석이 있겠군?"
에밀리, 아니 에밀리였던 괴물의 목소리는 소녀의 음성에서 괴물의 소리로 점점 변해갔다. 그 섬뜩한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쓰라렸다. 말을 마치자 마자, 에밀리의 덩쿨같은 팔이 하나 더 돋아나 무서운 속도로 나다를 향했다. 나다는 정신없이 도망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괴물이다! 괴물!"

"나다!"

반은 칼도 없이 맨손으로 그 넝쿨 같은 팔을 쳐냈다. 그러자 팔은 다섯 개로 늘어나 세개는 반을 공격하고 두개는 나다를 휘감았다. 나다가 높이 공중으로 올라가자 리오가 외쳤다.

"지금 나다의 심장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를 해치지 말아요!"

거대해진 에밀리는 말 그대로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조그만 얼굴만은 여전히 예뻤기에 더욱더 괴기스러웠다. 리오는 에밀리를 안아주다가 잡혔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에 바짝 다가가 있었다. 에밀리의 조용한 숨결이 리오의 얼굴에 느껴질 정도였다.  코앞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리오의 얼굴을 보며 에밀리는 이상하게 변형된 소녀의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없어?"

덩굴과 같이 억센 에밀리의 팔에 몸이 팽팽하게 조인 리오는 그녀가 질문하면서 몸을 더욱 조이자 고통스러워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어가며 겨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다의, 심장에 있던, 야크님의,  마룡석은... 으, 으.... 야, 야크님이, 나를 위해, 부수었으니까.."

에밀리의 고운 얼굴이 약간 찌푸려졌다.

"뭐야? 그럼, 그 마룡석으로 겨우 니 몸 하나 복구시켜주고 부쉈단 말이야? 하! 하? 뭐 그런 멍청한 용새끼가 다있어?"

그러더니 그녀는 리오의 팔 하나를 잡아올렸다.

"이런 인간의 몸따위, 다시 잘라버리면 끝인데! 겨우 그걸 위해서 자신의 평생의 수련을 부숴버려? 똘아이 아니야? 동방신룡은 다 그렇게 멍청한가?"

곤충의 팔을 꺾듯 에밀리가 리오의 팔을 간단히 비틀자 우두둑! 소리가 났다.

"아아악!"

"그만해 언니!"

코트니였다. 빵빵한 몸매가 다 드러나는 검은 가죽옷을 입은 코트니는 손에 단검을 들고있었다.

"내가 왜 그만둬? 재밌는데?"

그렇게 무심히 말한 에밀리는 다시 리오의 팔을 비틀었다. 비명과 함께 팔이 탈골되자, 코트니는 매서운 얼굴로 단검을 날렸다.  검은 기운과 함께 날아간 단검은 에밀리의 검은 망을 뚫고 리오의 팔을 비트는 덩굴손을 하나 잘라버렸다. 검붉은 피가 하늘로 흘뿌려지면서 에밀리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끼악! 너 뭐하는 짓이야!"

"장난 그만 해! 빨리 시작하자, 시간 없잖아!"

에밀리는 코트니를 무섭게 노려보았으나 수긍한 듯, 둘은 갑자기 나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리오와 함께.


나다는 브라이언을 업은 반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미로를 통과했다. 나다는 달리면서도 계속 리오와 예민하게 연결되었다. 대피소에서, 리오는 마계의 기운만으로도 고통스러워했다. 그런데 그 기운의 실체들과 함께있으니 그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리오의 머릿속에는 서스턴의 던전에서 당했던 고통들이 마구 소용돌이쳤고 그것은 그대로 그의 육신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리오와 연결된 나다에게도 아픔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동안의 연습으로 고통없는 감각만을 느꼈다.

'야, 리오! 정신차려! 니가 기절하면 나도 니가 어딨는지 알수 없게돼!"

'나다... 윽, 흑.. 너무 아파.... 으윽... 윽...'

속이 탔지만 나다는 리오를 마구 윽박질렀다.

'어린애같은 소리 하지 말아! 나한테 지금 징징대겠다는거야?'

고통을 참느라 리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다는 반에게 외쳤다.

"빨리 야크를 찾아봐! 지금 반군 정군 다 합쳐도 마계괴물은 못당할거야! 야크하고 빅터주교를 찾아야돼!"

"무슨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거냐?"

반이 여전히 나다에게 반박했다.

"넌 어렸을때 옛날얘기도 못듣고 자랐냐? 보통 마계가 나오는 영웅전설에선 다 그렇게..."

갑자기 누군가 나다의 머리를 퍽 쳤다. 머리를 한참 쥐어싸고있던 나다가 버럭 소리쳤다.

"반! 이 개자식아!"

그러나 고개를 든 나다 앞에는, 그 모습도 커다랗고 듬직한 야크가 솥뚜껑 같은 주먹을 쥔 채 서있었다.

"야크!"

"지금 옛날얘기나 할 상황이냐? 영주군은 다 제압됐어. 그런데 이 빌어먹을 검은 기운은 뭐야!"

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온통 시커멓고 검은 기운이 뭉개뭉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긴놈이나 진놈이나 인간이란 인간은 본능적으로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떨고있었다.

"성자님은! 성자님은 어디에?"

빅터주교였다. 나다가 두서없이 외쳤다.

"알고보니 영주자식 딸래미가 얼마나 끔찍하게 생겼는데! 딸래미가 리오를 납치해갔어!"

갑자기 조용해져서 주위를 살펴보니 빅터주교, 야크, 시케, 반, 브라이언, 드와인등의 표정이 묘하다. 야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리오가 못생긴 영주의 딸에게 보쌈이라도 당했다는 얘기냐? 걔 장가드냐?"

"으윽!"

반은 횡설수설하는 나다를 제치고 간략하게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일행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긴장했다. 어쩔줄 몰라 안절부절하던 나다는 반의 이야기가 끝나자 마자 야크를 붙잡고 외쳤다.

"리오자식 기절 안할려고 죽을 힘을 다하고있어! 지금..."

나다는 리오의 마음을 더 강하게 느껴보려고 애썼다. 나다는 한참 눈을 감고 삐질삐질 땀만 흘리다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야!"


거대한 신전의 천정은 둥근 돔이었다. 괴물의 억센 팔에 몸이 조인채 끌려가는 리오는 마계의 기운이 휘젓는 고통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는 천정에 그려진 성자들의 성화를 보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제발...
하지만 그들은 그저 그림일 뿐이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리오는 눈을 감았다.
텅 빈 성전은 을씨년스러웠다. 거대한 괴물과 날씬한 미인은 마치 폐허처럼 아무것도 없는 신전 중앙에 다가갔다. 거대한 창문에 비친 빛이 길게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코트니는 리오를 제단에 뉘이기 위해 에밀리에게서 받아들었다. 고통때문에 눈을 뜨지 못한 리오는 잘 움직이지도 못한채 몸이 움직여질때마다 신음했다. 조심스럽게 리오를 받아 안은 코트니는 기묘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늘씬하게 연약해보이는 미인이 비록 건장하지는 않지만 다 큰 장정을 가뿐히 안아 든 모습은 푸른 회색빛 신전과 함께 상당히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에밀리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코트니를 보았다.

"너 이상하다? 이 녀석이 밉댔잖아."

혼란스러운 눈으로 에밀리는 노려본 코트니는 또각거리며 제단으로 걸어갔다. 텅 빈 신전안에서 그녀의 굽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몸이 흔들려 리오가 신음을 내뱉자 코트니는 흠칫 놀라며 조심스럽게 그를 다시 안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흔들릴까 조심하며 천천히 걸었다.
에밀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 왜그래? 신이 나서 팔다리 잘라낼땐 언제고, 지금은 어째 그리 뽀개질까 깨어질까 조심조심 하니? 어제까지만도 죽일듯이 이를 갈더니만."

마치 코트니와 리오가 구면이라는 듯 말하는 에밀리의 종알거림에 리오는 힘겹게 눈을 떴다. 하지만 자신을 안고 가는 이 미녀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의아한 리오의 표정을 보고 에밀리는 깔깔거리며 리오를 비웃었다. 그의 뺨을 슬슬 쓸면서 말한다.

"성자나으리, 성자 나으리? 봐도 모르겠어요? 쟤가 외로운 산에서 늑대들한테 죽을뻔한 당신을 구해줬잖아? 생명의 은인 얼굴도 몰라봐요?"

외로운산, 늑대.. 리오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 그는 다시금 코트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때 리오를 구해주었던 자는 작은 소녀였다. 뿔과 귀여운 이빨을 가진 작은 악마.

"모, 모습이..."

리오의 더듬거리는 말을 에밀리가 냉큼 잘랐다.

"다르다고? 바보, 겉모습이 틀리면 알아볼수 없는거야? 멍청한 인간~원래 우린 인간이 아닌데, 본모습이 인간이 아닌 바에야 아기처럼 생겼든 어른처럼 생겼든 무슨 상관이람. 정말 멍청하네. 서스턴의 던전에서 그렇게 쟤한테 튀겨지고 데쳐지고 다져졌다면서, 그것도 몰라? 인간은 느낌이란것도 없나?"

코트니는 우뚝 멈춰서서 리오를 내려다보았다. 리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 저 눈빛....'

리오의 눈에 처음으로 분노가 떠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하지만 기운이 전혀 없었기에 그 정도의 몸짓이 다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코트니의 눈빛은 잠시 흔들렸으나 곧 더한 증오에 불타올랐다. 둘의 표정이 재미있어진 에밀리는 리오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코트니를 슬쩍 바라보았다. 코트니는 에밀리가 리오를 만지는 것을 무척 싫어하며 몸을 돌렸다. 에밀리는 종알거렸다.

"아이 정말 아쉬웠지 뭐야. 그 외로운 산에서 말이야, 난 이렇게 멍청하게 생긴 인간 흉내내면서 그 지독하게 의심많은 마법사 속이느라 굉장히 고생했다구. 얼마나 지루했는지 몰라! 그런데 그동안 이 기집애만 재미 다 봤지 뭐야. 흥, 나도 튀기고 데치고 다지고..."

에밀리는 리오의 다리를 잡아올렸다.

"나도 잘라보고 싶어! 성자의 다리는 자르면 빛이 날까? 호호!"

"언니야!"

쾅쾅 발을 굴리며 멈춰선 코트니가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시간 없어, 그만 쫑알대!"

에밀리는 뾰루퉁한 얼굴로 코트니를 째려보았다. 코트니는 눈을 감고 자신을 외면한 리오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풀이 죽은 표정이 되다가 금새 분노에 찬 얼굴이 되고, 약간의 즐거운 표정이 스치다가 곧 증오에 찬 얼굴이 된다.
코트니는 리오를 제단에 데려가 똑바로 눕혔다. 창에서 내리비치는 희미한 빛이 그의 창백한 얼굴 위에 부서져 내렸다.
에밀리는 마치 신기한 것을 보는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외쳤다.

"야호! 고통의 마왕 부활이다!"


"제길! 서스턴 밑에 있던 그 작은 꼬마계집애! 그년 짓이야!"

달려가던 나다가 외쳤다. 갑자기 외친 나다의 말에 야크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리오는 괜찮아?"

"몰라! 제길! 뭐 고통의 마왕의 부활?"

"뭐야?"

야크의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다. 시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야크를 쳐다보았다. 설명을 부탁하는것이다. 야크는 달려가면서 설명했다.

"이타냐의 마계 일곱마왕 중 하나인 고통의 마왕. 그놈을 인계에 부활시키겠단 말인가 본데! 이게 무슨 소리지?"

"고통의 마왕 마하타마스?"

드와인이 떨리는 소리로 반문했다.
그때였다. 어둠의 연기를 피우는 하늘 위에 검은 천둥이 뾰족한 첨탑을 내리치려 굉음을 울부짖을때
하늘을 가로지르는 하얀번개가 첨탑의 바늘을 부숴버린것은.
그와 동시에 영주의 성은 하얗고 투명한 막에 둘러싸였다. 그리고 그 안의 인간들은 모두 밖으로 튕겨나갔다. 인간을 튕겨낼 거센 바람이 불자 야크는 두 다리로 굳세게 버텼고 한 팔로 시케를 지탱했다. 시케는 빅터주교를 붙잡았고 드와인은 배틀액스를 땅에 꽂아 지탱했다. 그러나 반은 날려가 버렸고 나다도 거센 바람에 휘둘려 날아가는데..

'제길! 이럴순 없어! 난 저들을 리오에게 데려다줘야해!'

아니야 아니야. 이대로 갈순 없어, 이대로는!
그때 날려가는 나다의 눈앞에 꿈속의 백의검사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친구의 짐을 함께 지고 가라.

나다는 경황중에도 빈정거렸다.

'싫어 임마! 닭살 돋는 소리하고 있네.'

백의검사는 씩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남방의 화키르인 아무르가 그대에게 남긴 술법을 사용하라, 나다여. 그대의 전생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수많은 모습 중 어느 때가 떠오르는가?

나다는 화키르니 뭐니 하는 남방단어를 몰랐지만 호랑이로 변했을때 작은 늙은이가 '너의 전생의 모습' 운운한 것이 떠올랐다.

"난 전생에 호랑이였댄다! 제기랄!"

그러자 날려가던 나다는 몸을 퉁겨 한바퀴 제비를 돈후 바닥에 안착하고는 거대한 발톱으로 바람을 맞섰다. 그리고 이때쯤 한번 외쳐줘야 폼이 날것 같아 한바탕 외쳐주었다.

"어흐흥!"


바람이 멎자 야크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결계다. 누가 쳤지?"

바람에 날려간 인간들은 조금씩 멍들긴 했지만 무사히 성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성 안에는 야크와 그 발에 매달린 시케, 그리고 시케에게 잡힌 빅터주교. 배틀액스에 종종 매달려있던 드와인, 그리고 자신도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첨탑으로 달려가는 거대한 호랑이, 나다만이 보일 뿐이었다.



 

Posted by 리오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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