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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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마왕강림 (2)



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리오의 휘둥그레진 눈과 경악에 찬 표정이었다.

"으르렁~ (야, 너 왜 그러니.)"

나다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나다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리고...

"깽! (으아악!)"

"잠깐! 잠깐. 정신차려요, 나다!"

리오가 화급히 외쳤으나 나다는 너무나 혼란스러워 뒤로 주춤했다. 깨졌어야 할 약병은 나다 앞에 멀쩡한 모양으로 도르르 굴러있었다. 약병의 겉에는...

'야, 리오야! 약병에 뭐라고 써있니? 글잔거 같긴 한데, 뭔말인지?'

약병을 집어들어 본 리오는 한참 미간을 모으며 글자를 해독해보려 애썼으나 그가 알고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희안한 문자인데요. 고대어도 아니고, 읽을 수가 없어요."

'뭐야 이거! 이게 무슨 꼴이야! 엉엉!'

[좋은 능력을 준건데 왜 울어?]

어디선가 날카롭고 찌직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리오와 나다는 그 쪽을 바라보았다. 희안하게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언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뜻을 알 수 있었다. 언어 이전에 의도가 존재하듯, 그 의도가 그대로 전해진다.
소리가 난 쪽에는 마치 유령과 같이 생긴 새카맣고 작은 노인이 있었다. 리오가 외쳤다.

"당신은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해야 나다가 제 모습을 되찾지요?"

노인은 리오를 노려보듯 바라보더니 납작 엎드렸다.

[구루님! 절 구해주십쇼! 오백년만의 기횝니다! 제발 구해주십시오!]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황당한 일에 리오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구해달라니요?"

[절 여기 봉인한 수피가, 오랜 수행을 쌓은 구루에게 용서한다는 말을 들어야 봉인에서 풀어진댔습니다.]

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 그냥 평범한 사제일 뿐...."

[그럼 저 상자가 열리지도 않았을겁니다. 한마디만 해줘요, 용서한다고!]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다를 바라본 리오는 곧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다를 원래상태로 돌려주시면... "

[아! 그거요! 그건 제 선물인데요? 절 풀어주시면 설명해드리지요.]

고개를 끄덕인 리오는 노인이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러자 작은 노인의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나다가 보기에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다! 뭔가 번쩍인다거나, 연기가 난다거나, 그래야 되는 것 아닌가?

[오백년... 오백년만이군요. 으휴... 참, 저 친구요?]

노인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저건 제 선물입니다? 제 필생의 역작이지요. 영혼은 나라와 나라 세계와 세계 우주와 우주를 걸쳐 길고 긴 여행을 한답니다.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고....]

노인은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 생에 아무리 뛰어난 검사였대도, 다음 생에선 삭 까먹어버리지요. 아깝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오랜 세월 연구한 결과, 전생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술법을 만들어낸 겁니다. 원래 절 풀어주실 구루님에게 드릴 선물이었는데, 구루께서 받아들이시지 않으시니 옆에 있던 친구 분에게 가버린 것이죠. 하하! 그런데....]

노인은 눈을 반짝이며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 전생에 호랑이였나부지? 키케켓!]

"어흥!"

나다는 화가 나서 소리쳤으나 호랑이의 포효소리일 뿐이었다. 나다는 기가 죽었다.

'으윽, 저걸 그냥 잡아먹어버려?'

리오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저주에서 풀리나요?"

[저주가 아니라니까요!]

노인은 답답해 했다.

[거참, 구루님 정도면 다른 사람 전생쯤은 다 꿰고 있잖아요? 그러니 잘 아실텐데요!]

"아뇨, 전 수행 깊은 구루가 아닙니다. 구루가 무슨 뜻이죠? 남방 말인 것 같은데, 뜻이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전 평범한 사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전생에 대해서 알 수 없어요."

노인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리오를 쏘아보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괴상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리오를 구석구석 훑어보았다. 리오는 왠지 소름이 끼쳤다.

[어쨌든, 난 봉인에서 풀렸으니 됐어. 니가 구루든 아니든 이젠 무슨 상관이람. 날 다시 봉인할 능력이 없는건 확실하군. 하여간, 여기가 어디지?]

노인의 말투가 순식간에 거만하게 바뀌었다. 노인의 말은 횡설수설이었지만 리오는 최대한 성심껏 답해주었다.

"이타냐의 베이리크린.."

[됐어, 됐어. 이타냐가 뭐지? 아! 이런 제길! 서방이잖아!]

노인의 눈빛은 분노로 충혈되었다.

[빌어먹을 수피녀석! 서방에 구루가 있을리가 없지. 날 영원히 가둘 생각이었군! 교활한 자식!]

그렇게 혼자 열내던 노인은 커다란 호랑이나 자신을 풀어준 이타냐의 사제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중얼중얼 혼잣말했다.

[하여간, 난 남방 마이아으로 돌아가야지. 날 봉인한 수피놈! 가만두지 않겠다.]

노인의 눈빛이 괴이하게 번득였다. 리오와 나다는 어쩐지 실수한듯한 느낌이 들었다. 별로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다는 이놈이 혹시 덤벼들지 않을까 긴장해서 노인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노인은 이제 그 둘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서서이 엷어지더니 사라져갔다. 리오는 당황해서 외쳤다.

"저, 잠깐만요! 나다를 저주에서...!"

사라져가던 노인은 메아리처럼 짜증을 냈다.

[이 바보야! 저주가 아니야 야 야 야..]

노인이 완전히 사라지자, 리오는 약병을 들고 기운없이 나다를 쳐다보았다. 나다도 풀이 죽어 쪼그려 앉았다. 엄청난 몸집의 호랑이로 변한 나다에겐 이 미로가 좁게 느껴졌다.

'야, 리오야. 타라."

"네?"

'뛰어갈정도는 돼니까. 어쨌든 이 미로에서 나가자. 내 뒤에 타. 달려갈테니.'

"네..."

나다는 리오를 등에 태우고 죽어라 달렸다. 호랑이가 되니 엄청나게 빠른 것 하나는 편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되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 난 정말 전생에 호랑이였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한참 달려가다보니, 음식냄새가 났다. 음식냄새.....

'꼭 잡아. 위로 뛰어 올라갈테니까.'

리오는 나다 등의 털을 꽉 붙잡았다. 나다는 위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기운은 펄펄 넘친다.
퍼억!
힘차게 위로 솟아올라 바깥으로 나오자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악!"

사뿐히 내려앉자,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잘 정돈된 아름다운 정원이다.

"반!"

기쁜 함성을 지른 리오는 얼른 나다의 등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자세를 취하고 나다에게 덤벼들려던 반에게 달려가 덥석 껴안았다.

"리오? 어떻게 된겁니까? 저 호랑이는?"

"저 호랑이는 나다에요. 살아있었군요! 아아, 정말 고마워요!"

"뭐라구? 무슨 소립니까?"

그 때 브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성자님이시니까 호랑이를 타고 오신 것도 이상할 것 없지요. 에밀리 아가씨, 놀라지 마시우."

리오가 돌아보니 나환자촌의 두목으로 실종되었던 브라이언이 멀쩡히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오히려 호강한 듯 혈색이 좋다. 브라이언 옆에는 휠체어에 앉은 어린 소녀가 있었다. 푸른 머리에 눈이 무척 크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조그맣고 붉은 입술을 벌린 소녀는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분이.. 성자님?"

브라이언이 소녀에게 공손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성자님, 영주님의 영애 에밀리 아가씨와 인사하시죠."

온통 먼지투성이에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리오는 기쁨에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며 에밀리와 인사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두 사람을 보니 지금 리오의 심정으로는 반가움에 울고싶을 지경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병사들이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반은 화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다와 리오를 도루 미로에 밀어 넣었다. 에밀리는 병사들에게 둘러댔다.

"음,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귀신얘길 듣다가..."

"이봐, 밤바람도 차고 뒤숭숭한데 아가씨 계속 정원에 모셔둘거야?"

"걱정 마슈."

병사들은 브라이언을 노려보다가 돌아갔다.
조금 뒤, 리오와 나다는 다시 올라갔다. 리오는 반과 브라이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그들도 리오에게 한참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나다는 어쩌구저쩌구 애기하는 태평한 이들이 상당히 한심해보였다.

'야, 리오. 우리 빨리 빠져나가자. 전투가 여기까지 번지기전에.'

리오는 나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반에게 말했다.

"서로 할말은 많지만 빨리 빠져나가도록 해요. 시케와 빅터주교님과 시민들이 영주님의 학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빨리 빠져나가야지요."

반은 에밀리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저와 여기 브라이언은 아가씨 덕에 살아났지요. 아가씨만 두고 갈 순 없습니다."

리오는 난처한 듯 반을 보고는 에밀리를 향해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도 같이 피하는 것이.."

"싫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께서 이 곳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아웅다웅 하는 새 나다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우물쭈물하는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게다가 지금 마음이 차분해지자 이런 덩치 큰 괴물모양으로 쭈그리고있는 것이 상당히 처량했다.

'리오야. 나 계속 이런모습으로 살아야 돼니?'

떠나지 않으려는 반과 브라이언을 보고 당혹해 있던 리오는 갑자기 엉뚱한 말을 물어보는 나다를 쳐다보았다. 나다는 계속 징징거렸다.

'나 사람되구싶다! 이게 뭐야! 난 계속 이렇게 살아야돼? 으아악!'

한숨을 쉰 리오는 진심으로 걱정어린 한마디를 했다.

"저도 나다가 본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리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호랑이의 몸은 밀가루 반죽마냥 이상하게 찌그러들더니 점점 줄어들었다. 나다는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멍해서 그자리에 쭈그린채로 움직이질 않았다. 호랑이일때는 쭈그려도 서있는 리오의 키와 비슷했던 나다는 순식간에 몸이 줄어들자 시야가 변해 약간 어리둥절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어이없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오는 바닥에 쭈그려 앉은 나다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나다!"

"살았다! 살았어!"

나다는 기뻐서 펄쩍펄쩍 뒤고 뒤로 구르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한참 열렬히 기뻐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리오와 브라이언과 반과 영주의 영애 에밀리가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머쓱해진 나다는 발광 비슷하게 춤추던 동작 그대로 가만히 서있었다. 에밀리가 박수를 짝짝 쳤다.

"멋있어요! 호랑이님!"

히죽 웃은 나다는 마치 서커스의 무대인 양 정중하게 에밀리에게 답례했다. 마치 자신이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그렇지만 반과 브라이언은 계속 입만 벌리고 있었다.

"나다...너..원래.."

반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호랑이였냐?"

나다는 뒤집어질뻔했다.

"야! 헛소리집어치고 빨리 나가자!"

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수 없어."

나다는 미칠 지경이었다. 리오는 반을 조용히 바라보며 설명을 기다렸다.

"내가 처음 빅터주교님과 함께 브룬하르트에게 갔을때...."



극우 청년들에 의해 사제관이 습격을 당한 후 반은 빅터주교와 함께 브룬하르트에게 갔다. 빅터주교는 흥분하며 브룬하르트에게 면담을 신청했고 둘은 우아한 응접실 소파에 앉아 브룬하르트를 기다렸다.
그런데 반은 어디선가 중얼중얼 하는 기분나쁜 소리를 들었다.

"주교님 이게 무슨소리...?"

반은 말을 다 맺지 못했다. 빅터주교의 얼굴이 갑자기 퍼렇게 괴물처럼 변하더니, 반에게 덤벼드는것이다! 평소같으면 빅터주교를 간단히 제압했겠지만, 일단 제정신이 아닌 빅터주교가 너무나 힘이 셌고 두번째로는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도 견습사제로서 주교를 함부로 할 수 없었기에 반은 망설였다. 그렇게 빅터주교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목이 눌려있는데 누군가가 머리를 강하게 내리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반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곳은 축축하고 어두운 감옥이었다. 그는 머리가 아파 한참 엎드려 있었다.

"사제님! 반 사제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반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브라이언이었다. 반은 창살너머로 어두워 보이지 않는 복도를 향해 외쳤다.

"브라이언?"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하 감옥 안의 죄수는 거의가 황인이었다. 그런데 가끔 보이는 백인은 놀랍게도 브라이언처럼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이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백인이란 백인은 모두 그 모양이었다.
그때 거친 발걸음소리가 동굴과 같은 지하감옥안에 울렸다. 모두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159번! 나와!"

"억...."

끌려가는 황인은 미친듯이 소리쳤다.

"살려줘! 살려줫!"

퍽!
질질질
그리고 다시 조용.

"도대체 무슨일입니까?"

반이 묻자 아까와는 달리 죽을듯이 조용한 감옥안이 쩌렁하게 울렸다.

"저렇게 끌려가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우."

브라이언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저기서 숨죽은 신음소리와 저주의 소리가 웅성거렸다. 그때 다시 간수가 들어왔다.

"조용히해! 이 더러운 오물덩어리들아!"

그리고 여러 명인듯한 발자국소리... 그들은 반이 들어있는 감방 앞에서 멈추었다.

"내내 쓰레기 같은 고깃덩어리들만 모아오더니!"

사방이 어두워 반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볼 수 없었다. 목소리는 상당히 교태로운 여자의 것이었고 반의 눈앞에 보이는 신발은 검은 가죽신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반을 쳐다보아서 그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검은 옷에 반하여 반사되는 흰 피부와 날카로운 눈매의 큰 눈, 긴 속눈썹과 붉은 입술. 눈동자는 연한 연두빛과 하늘색 회색을 섞은 듯한 오묘한 빛이였다. 한마디로 반이 여태껏 본중 한번도 본적이 없는, 관능미가 넘치는 미인이었다. 터질듯 팽팽한 가죽옷을 입어 몸매의 고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온몸을 다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
검은 옷의 여인은 반을 보더니 잠시 이마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곧 반을 향해 말을 시작했다.

"한가지 제안을 할께, 귀여운 견습사제 아저씨?"

반은 어딘가 본듯하였지만, 한번도 본적이 없는 듯한 미인을 앞에 두고 고민에 잠겼다. 그러는데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말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

"꺄하하~ 놀라기는! 영주님의 귀여운 딸 에밀리 아가씨가 몸이 안좋거든? 그런데 그 꼬마는 밖에 나가기 싫어해. 당신은 치료마법을 아니까 옆에서 돌봐주면 좋겠는데?"

성숙한 외모와는 다른 경박한 말투에 반은 오히려 반감이 들었다. 게다가 그 오만함이라니!

"초청하는 방법 한번 더럽게 거칠군."

화가 난 반이 비죽거리며 응수했다. 그러자 갑자기 창살 사이로 검고 가는 그녀의 손이 번개처럼 짓쳐나와 순식간에 반의 목을 움켜쥐었다. 창졸간의 일이더라도 전쟁으로 단련된 반으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컥,컥..."

"자기 처지를 잘 모르는거 같네? 에밀리 아가씨를 치료해줄 사제는 항상 이런 식으로 모셔왔어. 어쩔래? 죽기 싫으면 아가씨가 감기에 걸리지나 않게 그 잘난 신에게 기도하라구."

"...?"

검은 옷의 미인은 매력적으로 깔깔 웃으며 덧붙였다.

"그 전의 사제는 에밀리 아가씨가 넘어지는 바람에 생채기 조금 났다고 처형당했어. 영주아저씨는 에밀리 아가씨라면 꺼뻑 죽거든~? 아이 불쌍해. 깔깔깔!"

간수들은 문을 따고 들어와 반의 몸을 꽁꽁 묶고 눈을 검은 천으로 가렸다. 한참동안 빙빙 성안을 돌아다닌 뒤, 병사가 뒤에서 천을 풀었다. 그러자, 눈앞에는 푸른 긴 머리에 약간은 창백한, 순진한 눈망울의 작은 소녀가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소녀는 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제님. 전 에밀리라고 합니다. 아버님은 영주시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청초한 에밀리를 본 반은 하루에 이런 미인을 두번이나 본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며 혼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는 병사도 아무도 없고 반과 에밀리만 있었다. 반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납치돼온 자신이 에밀리를 해치거나 혹은 인질로 삼으면 어쩌려고 하는가? 도대체 무슨 배짱인가.

"사제님, 얘기해 주세요. 여행을 많이 하셨다면서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에밀리는 반을 쳐다보았다. 반은 일단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상당히 약한 아이. 그리고 두발이 없었다. 그래서 휠체어에만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더 놀라운것은, 팔도 없었다. 브라이언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단지 차이점이라고는 브라이언이 애꾸라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있는 동안 반은 에밀리에게 부탁하여 브라이언도 그녀에게 데려왔다. 에밀리는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지만 넓은 정원 안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아버지인 영주가 몇 번 오지 않는 것을 빼고는 그다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반이 여기까지 말했을때 나다가 물었다.

"그런데 저 아이한테 무슨 은혜를 입었다는거야?"

반은 한숨을 쉬며 말을 마쳤다. 길어지는 말을 자르기 위해 나다가 그렇게 말한 것을 알고 이야기를 짧게 줄인다.

"그 검은옷의 미인이 한 말, 그 전 사제가 에밀리 아가씨의 작은 병에 처형당했다는 말. 사실 며칠전 에밀리가 작은 호수에 빠져 익사할뻔 했어. 영주가 날 죽이려는걸 아가씨가 살려줬다구. 그때 난 아가씨를 끝까지 돌봐주기로 약속했어."

브라이언 또한 에밀리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었다. 감옥에서 꺼내어 여태까지 죽음에서 지켜주었으니.



로에쉬 클라크 영주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검은 옷의 여인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폭동이 일어났어."

"알아요."

로에쉬는 버럭 소리질렀다.

"브룬하르트는 어딜간거야! 그리고, 에밀리를 고칠수 있는 그 약이란 건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거야!"

여인은 싸늘하게 영주를 보았다. 영주는 두려움에 질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쓸데없는 고깃덩어리들만 가져오니까 그렇지."

"그, 그렇지만, 팔다리 없는 장애자들이 얼마나 되겠어? 이 정도가 한계라고! 그리고, 황인들도 그렇게 많이 잡아들였는데, 아직도 멀었나?"

"영주 아저씨... 진주조개를 잡아와야 진주를 캐낼거 아니에요? 아저씨가 잡아들인 황인들은 다 쓰레기들이야."

검은 옷의 여인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이놈의 도시에 그렇게 누렁이들이 많을 줄은 몰랐지. 잡아도 잡아도 징그럽게 많군. 덕분에 다른 재료로 잘 쓰고 있지만..."

"코트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때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은 검은 옷의 미인 코트니의 귀에 뭐라 속삭였고 영주는 못마땅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코트니는 환하게 웃으며 영주를 보고 말했다.

"아가씨는 이제 곧 회복될거에요. 기대하시라!"


Posted by 리오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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