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던 일레인은 주변 경치가 생소하여 눈을 말똥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아, 깨셨군요."

간호사가 빙글거리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레인은 얼떨떨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아, 어떤 굉장히 낡은 망토를 입은 분이 당신과 다른 한 분을 데려왔어요. 아가씨는 괜찮았지만 남자 분은 부상이 몹시 심했죠. 그리고 망토를 입은 분은 병원비를 선불로 낸 뒤 가셨어요. 그렇게 낡은 망토와 옷을 입은 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황금을 지불해서 놀랐었죠."

"…."

동굴에서 그 여행자가 다시 돌아왔었구나. 일레인은 순간 터널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고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다.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죽기 전에 한번 키스를 해보고 싶었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었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비밀인, 생모가 창녀였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살아나고 보니 모든 것이 너무나 창피했다.

'루이스는 나를 싸구려 여자로 볼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루이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루이스를 떠올리자, 일레인의 마음은 다시 두근거리며 아려왔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렇게 며칠간 망설이며 그를 보러 가지 못한 일레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몰래 루이스의 병실을 훔쳐보았다. 그는 목에 부목을 댄 채 병실에 누워있었다. 이렇게 단정한 그의 모습을 보니, 루이스는 정말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어떻게 보면 병약하고 마른 사람으로 보였으나, 깨끗한 피부와 맑은 눈매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

루이스의 맑은 눈은 슬픔에 가득했다. 그는 계속 일레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의사에게서 충격적인 선고를 들었다. 루이스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아니, 일평생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다. 그는 목 위만 살아있었다. 루이스는 슬픔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마음속엔 온통 일레인의 생각뿐이었다. 정말 순진한 소녀… 그는 생각치도 못하게 그녀의 첫 키스 상대가 되었고, 그녀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목 위만 제외하고 모두 마비되어버린 그는 차마 그녀에게 옆에 있어달라고 감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 옆에 있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몰래 숨어서 병실을 쳐다보는 일레인을 발견했다.

"어…"

루이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일레인은 후다닥 도망갔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곧 말은 목구멍으로 아프게 삼켜졌다.

그럴 자격이 내게 있는가.


***

그리고 또 며칠 동안, 루이스는 그녀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래도 한번은 얼굴을 내밀어주기를. 아니,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가 혐오당하는 마법사이고 보통사람과 다르게 가끔 눈빛과 머리색이 변한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 것처럼, 그녀가 그의 부상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그의 옆에 있어주기를 바랬다.

그러다가 기대는 실망으로 변하고, 실망은 원망으로 변하고, 원망을 체념으로 변했다. 며칠이 지난 그의 마음은 슬픔과, 실망과 원망, 그리고 체념이 타래처럼 얽혀있었다.

그리고 한참 그렇게 그가 마음의 무거움에 짓눌려있을 때, 일레인이 드디어 찾아왔다.

루이스는 기쁨으로 얼굴을 빛내다가 곧 그녀에 대한 원망으로 얼굴을 어둡게 숙였다.


***

일레인은 한참 자기혐오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자마자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는 그의 행동을 보고 생각했다.

‘터널 속에서 키스하자고 조른, 어머니가 창녀인 나를 경멸하기 때문이야.’

역시 일레인도 마음속에 실망과 원망과 슬픔과 체념이 뒤엉켰다.

'그, 그렇다면, 내가 저 사람을 강간한 건가? 강간이란, 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뽀뽀하는 거라고 안나 아주머니가 그랬는데…'

그렇게 생각한 일레인은 얼굴을 딱딱하게 하고 루이스의 옆에 섰다. 약간의 기대를 품은 창백한 루이스의 얼굴이 일레인을 올려다보았다.

'아..'

그의 하얗고 투명한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일레인은 순간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봐 얼굴을 숙이고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창녀 같은 여자로 볼 것이 아닌가! 어쨌든 여자로서 강제로 하듯이 남자에게 키스를 했으니 말이다. 시골에서 엄하게 자란 일레인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러나 루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찌푸린 일레인의 행동을 보고 생각했다.  '병신이 되어버린 나를 측은하게 여기고 경멸하는 거야.’

그의 말투가 딱딱해졌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차가운 그의 말투에 일레인은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얼굴을 몹시 차갑게 했다.

"사과하러 왔어요. 그날 일에 대해서요."

"아닙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그의 옆에 남아준 그녀에게, 루이스는 새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그래, 그녀는 좋은 사람이고 은인이야.'

그 때 일레인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날 일은 잊어주세요."

그녀의 말에 루이스는 분노인지 절망인지 모를 감정이 욱하니 올라왔다.

'잊어달라고? 그래, 내가 만약 멀쩡한 몸으로 돌아왔다면 함께 미래를 꿈꿀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짐덩이일 뿐이야. 그녀가 현명한 거야. 나 같은 병신에겐…!'

울컥한 루이스는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잊어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루이스는 눈을 감았다. 그 외에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일레인은 휙 돌아서서 걸어갔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날 창녀라고 생각할거야. 내가 그런 짓을 해서 날 경멸하는 거야…'

루이스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제 여기서 나가면 영원히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보았다. 한번만, 한번만 뒤돌아본다면…

한번만 뒤돌아본다면 어쩔 것인가.

이제 이런 꼴이 된 자기의 옆에 남아있어 달라고?

"일레인!"

비명을 지르는 듯한 루이스의 말에 일레인은 뒤돌아보았다. 순간 두 사람은 서로 놀랐다. 루이스의 얼굴도, 일레인의 얼굴도, 계속 흘러나오는 눈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아…"

순간 일레인이 어눌하게 물었다.

"왜 울어요?"

루이스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만 이제 몸이 불편해진 그를 떠나는  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날 하루의 인연으로, 그녀는 그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해주었다. 남은 평생을 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살라고 말할 뻔뻔함은 그에게 없었다.

"안녕…."

목이 메여 쉬어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일레인은 눈물이 다시 물밀듯이 밀려나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루이스는 이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일레인은 던전안에서, 사람들에게 어서 가라고 외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혼자 남기 싫다고 외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의 옆에 다가가 무릎 꿇었다. 그리고 그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

"당신 옆에 영원히 있고 싶어요!"

그리고 또 일레인은 '여자가 먼저 청혼하다니… 난 정말…'하고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레인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루이스가 왜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대로 떠난다면 영영 헤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했다.

루이스는 믿을 수 없어 입을 벌렸다.

"나…하지만… 온몸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런…"

"괜찮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난…"

우물쭈물하는 루이스에게 부아가 치민 일레인은 입술로 루이스의 입을 콱 막아버렸다.


***

"점차 회복되고 있습니다."

놀라워하며 의사가 루이스와 일레인에게 말했다.

"놀라운 일입니다. 몸의 주요 장기부터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팔다리는 썩어 잘라야 할 줄 알았는데, 이 속도라면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희망에 가득 차 의사를 바라보며 루이스가 물었다.

"그럼, 언제 걸을 수 있지요? 언제 손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의사는 측은한 듯 루이스를 보았다.

"사지를 잘라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될 거란 추측은 무리입니다. 지금은 몸이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어간다는 것만 압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환자 분은 이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할 위중한 상태입니다. 사지를 보통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은,"

의사의 입에서 절망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포기하셔야 할 겁니다."

절망에 빠진 루이스와 일레인을 보고 의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 젊은 부부께서 아기를 가질 수는 있을 것 같군요."

부부란 말에 일레인의 얼굴이 발갛게 되었다. 그러나 루이스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벌겋게 되었다.


***

"설마… 아기를 어떻게 낳는지 모르는 겁니까?"

"왜요, 양배추를 심으면 되잖아요?"

루이스는 일레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양배추?"

일레인은 행복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그래야 양배추에서 아기가 나오잖아요."

"네?"

"병원에 양배추를 심을 수 있게 해주신다는 얘기 아니었어요?"

"네?"

루이스는 답답하여 가슴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는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 아기 이름 뭘로 지어요?"

"저기… 일레인, 아기는…"

"?"

"아기는…."

"말을 해요, 말을!"

"아기는… 으윽, 그러니까…"

"정말 답답해!"

"…그러니까…"

"아유!"

루이스는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양배추를 심기로 하지요."

그때 갑자기 까르르륵 하는 소리에 루이스와 일레인은 깜짝 놀랐다. 병실 밖에서 두 사람의 아웅다웅 거리는 소리를 듣던 간호사 두 명이 참을 수 없어 배를 잡고 뒹굴며 웃어버린 것이다. 일레인은 여전히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루이스는 제발 얼굴을 가려주길 바라며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 그들을 멀리 창문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굵은 망토를 둘러싼, 여행자였다.


***

일레인은 시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다. 고맙게도, 일레인과 루이스를 이 병원에 맡기고 간 그 여행자가 막대한 거금을 맡겨주었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그들을 돌보아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레인은 일단 돈 걱정 없이 루이스를 돌보며 행복함을 느꼈다. 사실 간호는 고되었다. 하지만 만약 이 상태로 돈이 없어 거리로 쫓겨났다면, 더한 비참한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는 흥얼거리며 장을 보고 다시 루이스의 얼굴을 볼 흥분에 뺨을 발갛게 상기시켰다. 비록 팔다리는 움직이지 못했지만, 루이스의 하얀 얼굴을 볼 때마다 일레인은 그가 무척 아름다우며 소중하다고 느꼈다. 실제 루이스는 몹시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골목길로 들어선 그녀는 흥얼거리며 오늘 할 음식을 떠올렸다. 사실 그녀는 요리를 잘 못했다. 루이스가 참고 먹어주긴 했지만 언제나 미안한 그녀는 요즈음 요리를 열심히 연습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 앞을 막아서서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 여행자다.

"아! 안녕하세요!"

반갑게 웃으며 그녀가 말하자 여행자는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돈을 많이 주셔서… 어?"

장바구니가 떨어졌다. 그리고 여행자의 굵고 거센 손이 일레인의 허리를 낚아챘다.

"아악!"


***

루이스는 평소보다 그녀가 늦는다고 생각했다. 온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는 무료함을 느꼈다. 그는 오랜만에 마법수행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사지가 이렇게 된 터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는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상에 들어갔다.

기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루이스는 반갑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 서있었다.

"누, 누구시지요?"

왠지 모를 두려움에 루이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그의 옷을 벗겼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황하는 그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몸을 조금 뒤척여 보려했지만 그도 여의치 않았다. 그녀의 강인한 팔이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아악! 아, 아, 아!"


***

일레인은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흩어진 장바구니를 챙겼다. 흐느낌이 계속해서 새어나왔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거리로 나온 그녀는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혐오하며 흐느꼈다. 감히 루이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음에 또 오겠어."

망토의 남자가 던지고 간 말을 떠올리며 일레인은 더욱더 크게 흐느꼈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그녀가 자라고 교육받아온 환경에서, 이런 경우 무조건 여자가 잘못이었다. 여자가 칠칠치 못해서 당한 것이고, 모든 것은 부도덕한 여자의 탓이었다. 이 한 번의 일로 끝난다면 루이스를 속이고 - 자신이 더러운 여자라는 사실을 -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 악마는 다시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레인은 미칠 듯한 걱정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요양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루이스와 자신의 요양원 방을 들여다본 그녀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방 안에는 루이스 뿐만 아니라 어떤 여인이 함께 있었다.

일레인은 벽에 등을 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소리 없이 흐느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다니….

한편 루이스의 침대에서 몸을 똑바로 일으킨 알 수 없는 여자는 루이스에게, 일레인도 들었던 똑같은 말을 던졌다.

"다음에 또 오겠어."


***

며칠간 일레인과 루이스는 서로를 서먹하게 대했다. 서로 감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루이스는 일레인의 태도에 공포를 느꼈다.

'그녀가 보았을지도 몰라… 아니, 본 거야.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런데…'

루이스는 일레인이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지, 그녀의 어머니가 창녀인 것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레인은 성에 관한 것은 무조건 더럽게 여겼다. 만약 그날의 일을 그녀가 보았다면, 어떤 변명을 한다 해도 그녀는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는 고민에 빠져 입맛도 잃었다. 깊은 고민에 빠진 그의 머리카락은 크림색으로 변했고 눈동자는 슬픈 물방울처럼 투명해졌다.

처음엔 일레인은 화가 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 화가 나지 않을 여인이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곧, 그녀는 골목에서 당했던 일, 그리고 '다시 오겠다'던 망토의 남자를 떠올리고는 불안해졌다.

"일레인…"

루이스가 무거운 입을 뗐다.

"일레인. 그 날… 봤습니까?"

"…"

루이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레인은 묵묵히 계란프라이를 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식기 전에 먹어요."

일레인은 더 이상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을 잘랐다. 루이스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용서해줘요!"

마침내 어렵게 꺼낸 루이스의 말에 일레인은 눈 가득히 눈물을 담고 그를 쳐다보았다. 루이스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용서해줘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난 몸을 움직일 수 없고… 거부할 도리가 없었어요. 난…"

"당신도 즐거웠지요? 남자들은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녀의 무뚝뚝한 말에 루이스는 망치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 통증을 느꼈다. 고개를 숙인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며칠이 지난 후, 루이스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일레인은 까무러치도록 놀랐다. 그 누더기 망토를 입은 여행자가 루이스를 찾아온 것이다!

이 때 여행자의 망토는 더 이상 누더기가 아니었다. 두텁고 비싼 새 망토를 입고 있었다.

루이스는 은인인 그에게 몹시 감사해하며 말을 하고 있었다. 일레인은 숨어 그들을 지켜보다가, 너무나 괴로워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날 어떻게 저희를 구해주셨는지. 지금은 그녀와 함께 있습니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여행자는 눈빛을 날카롭게 하며 비죽 웃었다. 루이스는 그 미소에 어쩐지 기분이 상해 어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같은 병신이 좋다고 붙어있을 여자일까? 그렇게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가?"

여행자의 폭언에 루이스는 놀라 입을 벌린 채로 아무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분노에 젖자 여행자는 흐흐, 웃었다.

"며칠 전 그녀와 깊은 관계가 되었지."

루이스는 계속되는 충격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레인의 행동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낀 터였다. 그는 고통에 찬 눈으로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난 그녀가 마음에 들었어."

여행자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상스럽게 말했다. 루이스는 말을 하려 했으나 너무나 분노하여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 당신은…"

"덜덜 떨지 마라. 너는 몸도 병신인데다 무일푼이야. 내가 돈을 대주지 않는다면 당장 겨울바람에 얼어 죽고 굶어죽기 딱 알맞지."

"…!"

여행자는 차를 후룩 마시며 말했다.

"그녀를 나에게 준다면 여태까지처럼 편안히 살 수 있게 돈을 대주지."

"…그녀는 물건이 아니야!"

분노에 찬 루이스의 말에 여행자는 히죽 웃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루이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여행자는 잔인하게 말했다.

"그녀는 너같이 축 늘어진 병신보다는 내가 더 좋을 거야. 그리고 난 돈도 있고 너처럼 병신도 아니야. 얼굴도 이만하면 쓸 만하고. 그녀는 누굴 선택할까?"

과연, 말끔하게 차려입은 여행자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랐다. 덥수룩한 수염도 잘라 처음엔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남자답게 잘 생겼다.

루이스는 순간 주눅이 들었지만 그런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기 위해 강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 말은 격한 감정에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야…."

"사랑?"

비웃는 듯한 여행자의 말에 루이스는 부르르 떨었다.

"인간의 사랑? 웃기는군. 내 장담컨데 그녀는 곧 네게 완전히 넌덜머리를 낼 거야. 요즘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던가? 네놈이 바람을 피운 것을 알아도 별로 추궁하지 않았지? 솔직히 내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곧 너에게서 도망치고 말거야. 그렇다고 네놈이 그녀를 비난할 수 있겠나? 사지 축 늘어뜨린 병신 주제에 말이야."

루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없었다. 일레인이 계속 그의 옆에 있어줄 지는.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간호하기 위해 일레인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여행자는 아무 감정 없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의 그 잘생긴 낯짝도 병상위에서 뒹굴다 보면 다 시들어질 거야. 시들시들 앓다보면 다 밥맛 떨어지는 병자의 누런 얼굴이 돼지. 이런, 어쩌나. 가진 거라곤 잘생긴 얼굴 뿐인데. 네놈은 순진한 여자아이 뺀들거리는 얼굴로 유혹해서 자기 병상이나 수발하게 만드는 사기꾼이야."

여행자의 폭언에 루이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가! 여기서 나가!"

여행자는 일어나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루이스의 몸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누워서 빽빽거리며 고함치고, 입으로 밥 처먹고 뒤로 똥 싸고, 그녀를 옆에 두기 위해 열심히 내키지도 않는 웃음이나 팔고. 그 외에 넌 뭐지? 처먹는 입하고 똥 싸는 구멍만 달린 살덩이일 뿐이야. 그녀가 내게 말하더군. 지금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쉽지 않다고. 평소 남편 수발 잘한다고 칭찬만 듣다가 당신을 떠난다면, 주변사람들이 비난할 것이라고 두려워했어.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지. 날 보고 자기를 해방시켜 달라더군. 요즈음 거의 매일 그녀와 만났지. 너희 생활비와 병원비를 내가 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 내가 왜 여태까지 그 막대한 돈을 대고 있었겠나? 이런 좋은 병실에서 지내면서 그런 의문이 절대 들지 않았나?"

"아아!"

루이스는 괴로움에 신음했다. 여행자는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움직여 웃었다. 여행자는 루이스에게, 루이스와 일레인만이 아는 비밀을 모두 이야기했다. 일레인의 버릇이라든지, 루이스의 버릇, 그리고 루이스와 일레인이 서로 속삭인 밀애의 단어와 몸의 작은 흉터 등. 그리고 루이스의 과거를 아는 것은 일레인 뿐이었다. 그러나 여행자는 다 알고 있었다. 하나의 남김없이, 다.

여행자가 말했다.

"오늘도 그녀를 만나기로 했지. "

***

일레인은 멍하니 거리를 배회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그 여행자의 뺨을 치고 고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일레인과 루이스는 당장 거리로 내쫓기게 된다.

전혀 움직일 수도 없는 루이스를 데리고, 일레인은 무엇으로 돈을 벌어 그를 돌볼 것인가? 도망 나온 고향 집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부모님 허락도 없이 정체모를 마법사에 장애인과 한 결혼에 아버지는 뭐라고 할까? 마을을 도망치듯 빠져 나올 때, 다시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죽어도 싫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온몸이 떨려왔다.

그렇게 거리를 배회하면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여행자가 떠났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일레인은 방으로 돌아갔다. 밤이 늦어 루이스는 이미 잠들었으리라 생각하고, 일레인은 조심조심 그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숨죽여 들어갔다.

"어디 갔었습니까."

냉랭하고, 분노를 억누른 듯한 냉혹한 말에 일레인은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방의 불을 켰다. 루이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 밑은 거멓게 타들었고, 입술도 하얗게 타있었다. 크림색 머리카락과 투명한 바다 빛 눈망울은 슬픔과 분노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 갔었냐구요."

낮은 그의 말에 일레인은 얼떨떨히 말했다.

"그, 그게… 잠시…"

"잠시?"

"잠시… 놀러…"

루이스의 분노가 폭발했다.

"잠시? 놀러? 그래, 당신은 매일 밤 그를 만나면서! 그렇게 잔인하게 나를 비웃었나요? 그러면서 왜 날 버리지 않은 겁니까, 왜!"

"무, 무슨 소리에요?"

"그와 무슨 일이 있었지요?"

들켰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아, 그건…"

일레인의 표정에서 루이스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루이스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분노와 슬픔에 가득한 그는 여행자의 모든 말을 진실로 믿어버렸다.

"아아! 아아!"

"루이스!"

"날 그렇게 경멸하면서! 어떻게! 날 그 동안 갖고 논 겁니까? 아아, 어떻게 이럴 수 있지요? 아아!"

루이스는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일레인이 그동안 이상하게 행동한 것은 루이스와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오해했기 때문이며, 절대 일레인은 자신에게 그럴 리 없다고… 그러나, 지금 일레인은 그동안 그에게 무언가 숨겨 왔던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그 여행자와 관련된.

그러므로, 치욕스러운 살덩이라던 여행자의 폭언이 일레인의 입에서 나왔다고 루이스는 믿게 되었다. 그는 수치와 배신감에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나가! 나가! 이 요부! 이 요부!"

"루이스!"

일레인은 흐느끼며 뛰쳐나갔다. 루이스는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저주하며 똑바로 누운 채 고통에 울부짖었다.

"아아! 일레인! 일레인!"


***

그리고 이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일레인은 롤리엔의 전국을 여행했다. 그리고 좁은 롤리엔 땅을 다 여행한 그녀는, 고향에서 좀 쉬면서 돈도 모으고 이웃나라 대국인 아이아니야나 이타냐에 여행갈 것을 궁리했다.

'이타냐는 몬스터가 많아 위험하니 아이아니야로 가는 것이 낫겠다.'

그녀는 루이스를 잊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게 뛰쳐나온 뒤, 일레인은 루이스를 떠났다. 그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이 그를 배신했다는 아픔에 감히 그의 앞에 나서지 못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더러운 여자인 것이다. 남편이 용서해 준다 해도 평생 숨죽이며 살아야 할 테지만, 그녀의 남편인 루이스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에게 매달리며 용서해달라고 빌어야겠지만, 그녀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더러운 자신이 감히 루이스가 바람을 피웠다고 그렇게나 차갑게 대한 것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일레인이 그렇게나 경멸한 시골 고향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녀는 루이스과 화를 낸 그날로 짐도 싸지 않고 떠났다.

그리고 이년이 흘렀다.

여행을 위한 짐을 싸면서, 그녀는 왠지 롤리엔을 이대로 떠나면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항상 그녀의 마음속에서, 아릿하게 가슴을 조여 왔던 그 존재를 한번은 멀리서나마 보고 가고 싶었다.

'루이스…'

다시 가슴에 통증이 아릿하게 밀려와 일레인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메르헨으로 떠났다.

그녀는 그와 머물던 요양원에 가보았다. 환자들이 푸른 잔디에 앉아 푸른 숲을 바라보며 쉬고 있었다. 능숙하게 그녀는 전에 그와 머물던 요양소에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방은 폐쇄되어 있었다. 옆에 있던 환자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 방의 환자가 자살했지요. 그 뒤로 유령이 나온다며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답니다. 아! 괜찮으세요?"

일레인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문에 기대어 앉은 그녀는 눈물이 계속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무덤이 어디에요?"

"연고 없는 무덤은 병실 공동묘지에 묻힌답니다."

비석이 늘어선 쓸쓸한 무덤. 연두색의 잔디마저 음울하게 떨고 있었다.

일레인은 늘어선 비석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루이스'라고.

"아아! 아아…"

일레인은 비석 앞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처음엔 억눌린 듯 시작한 눈물이었으나, 점점 더 격렬하게 흐느꼈다. 그녀는 비석 앞에서 몸부림쳤다. 주변에서 놀라 쳐다볼 정도로 그녀는 오열했다.

"으흐흑… 루이스… 사랑해요… 으으으으… 잘못했어요… 난… 그자에게… 강간당하고… 으흐흑, 미안해서… 더 이상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으흐흐흑… 으아아… 자살하다니! 당신이 자살하다니! 아아…"

그녀는 몸부림치며 울부짖듯이 그에게 지난날을 고백했다. 그리고 비석을 껴안고, 키스하고, 그 앞에서 몸을 던지며 격렬하게 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울었을까, 일레인은 흐느끼며 일어섰다. 휘청, 머리가 어지러워 그녀는 비틀거렸다.

"내가 당신을 죽였군요…."

"그렇지 않아요."

뒤에서 들려온 쉰 음성에 그녀는 뒤를 휙 돌아보았다. 새하얀 머리, 바싹 야윈 청년이 휠체어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젊어보였으나 무척이나 말랐고 피부는 부석거렸으며 눈 밑은 거멓게 죽어 있었다. 입술도 하얗게 탔다.

하지만 어딘가 낯익었다.

"…?"

일레인은 그저 위로하러 온 환자인줄알고, 고개만 끄덕이고 그를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러자 그가 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일레인…"

그녀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는, 이전에 그녀가 알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확실히 그였다.

"아? 루이스? 설마…?"

"…."

너무나 초췌하게 변해버린 루이스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았다. 얼떨떨한 일레인은 바보처럼 질문했다.

"당신… 맞아요? 주, 죽었다고…"

"방이 바뀐 지는 육 개월이 다 되어가요. 그 사람, 우울증이 있더니 결국엔 자살하더군요. 그리고 지금 이 비석은 백 년 전의 비석이에요, 일레인."

일레인은 다시 그 비석을 보았다. 분명 사망년도가 엉뚱했다. 그녀는 여전히 둥그렇게 뜬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변해버린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아… 당신…"

"알아보지 못하는군요. 나도 처음엔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당신은 눈부시게 아름다워 졌으니까요."

피곤해진 루이스는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그는 입을 다물고 슬픔과 애증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레인은 멍하니 휠체어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으흑…"

드디어 눈물을 터트린 일레인은 루이스의 앞에 꿇어앉아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아앙…"

"쉬이… 울지 말아요. 예쁜 화장이 다 지워지잖아요."

루이스의 쉰 목소리는 그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에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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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오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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