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완결)장편-프리즘

[프리즘] 1부 10장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리오나다 2009. 12. 11. 19:15

 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1월 20일 
--------------------------------------------------------------------------------


10장.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책상에 앉아 화창한 봄날씨를 바라보던 빅터주교는 고개를 숙이고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겉으로 봐서는 반란은 성공, 영주는 누구에게인지는 모르겠지만 난전중에 살해되었고 케이와이단은 브룬하르트와 함께 도시에서 물러났다. 물론 브룬하르트가 악마와 손을 잡고 마왕의 부활을 위해 도시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괘씸한 행위를 생각하면 잡아서 화형에라도 처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케이와이단의 본부에서 정중히 사과했고 종단에서도 이 선에서 마무리 지으란 통보가 왔다. 도시는 다시 활기차졌지만 그 끔찍한 학살의 상처가 가시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리리라.
그리고 브라이언은 케이와이단이 마을을 덮치기 전 이미 이상한 분위기가 찜찜하여 조금씩 피신시키고 있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래도 마을을 함께 재건할 사람들은 남았다. 종단의 후원을 받기로 한 나환자촌은 재건에 들어갔다.
이번 전투는 종단과 귀족의 싸움에서의 종단의 승리를 의미했다. 종단은 빅터주교의 공을 높이 샀다. 그는 다음 대주교 심의때 좋은 점수를 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일이 잘되어갔는데도 빅터주교는 마음이 우울했다.

"저리 비켜요!"

리오의 거친 음성이 들렸다. 코트니는 싱긋 웃었으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우린 동룐데? 내가 붕대 갈아줄께. 오호호홋!"

"저리 비키십시오. 난 당신의 동료가 아닙니다. 만지지 말아요!"

리오가 팔을 홱 뿌리치자 코트니의 얼굴이 살벌해졌다.

"계약위반이야?"

그때 나다가 픽 나서서는 코트니 앞에서 싱글싱글 웃었다.

"아니아니 계약 위반이라니이.. 무슨 그런 섭한 말이야?"

"지금 날 찬밥 취급했어! 그러니 계약위반 아니야?"

"이런이런! 저 새낀 말투가 원래 저래. 어쩔 수 없잖아, 저렇게 생겨먹은거?"

"치, 거짓말!"

야크는 검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저 악동같은 악마를 확 베어버릴까 고심했다. 리오는 코트니를 쳐다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걸어갈 때마다 작은 황금빛 페어리가 포르르 포르르 쫓아간다. 리오는 페어리를 음울하게 쏘아보다가 문을 탁 닫았다.

"이거 뭐 정말 엉망이군!"

드와인의 우울한 말이었다. 빅터주교도 머리가 아팠다.

'오오, 악마라니! 파괴천사라니!'

시케가 리오의 방에 살짝 들어갔다.

"미안해요 리오..."

"..."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

리오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시케."

"...?"

"잘못하면 악마가.. 시케에게 저주를 내릴텐데. 하지만.. 난 저 악마만 보면.. 날 제어할수가 없습니다. 화가 나서.. 너무 화가 나서... 잊고 싶은 기억이 자꾸만....."

리오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누구든 포용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자만이었나 봅니다. 결국 이것밖에 안되었나..."

나다도 역시 우울했다. 저 끔찍하고 귀찮은 악마보다 더 섬뜩한 것은 바로 저 파괴천사가 변한 페어리였다! 녀석은 리오를 지킨다고 했지만 결국 일이 안되면 바로 리오를 처치해버리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어느날 드와인과 야크, 그리고 반과 시케가 모여 의논을 했다. 리오의 주위엔 항상 코트니와 엘시드가 줄줄 따라다녔으므로 편히 말할 입장도 못되었다.

"창살 없는 감옥이 따로 없지. 두 간수가 항상 지켜보다니."

드와인이 투덜거렸다. 시케는 말이 없었다. 야크도 뚱하게 천정만 바라보았다.
나다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이봐, 이번에 나환자 촌을 다시 짓는대. 우리 전처럼, 거기 가서 집도 짓고 환자도 돌보고 그러는거야! 그럼 리오도 예전 기분을 되찾을테고,
코트니란 악마계집애는 지루해서 떠날거고, 그 페어리는.. 음.."
바닥을 탁 치며 나다가 밝게 말했다.

"방도가 나오겠지. 어때?"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나다의 말에 동의했다. 어쨌든 껄끄러운 두 방해자때문에 나머지 멤버들은 한마디로 똘똘 뭉치게 되었다.


"브라이언님한테요?"

리오의 얼굴이 모처럼 밝아졌으나 곧 어두워졌다. 나다가 보니 리오는 학살당한 나환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건물 다시 짓고, 다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어때?"

나다의 얼굴을 보고 리오는 오랫만에 웃었다.

"내 걱정을 많이 하는군요. 내버려두면 다 풀릴텐데, 너무 민감하게 그러지 말아요."

"난 승질급한 놈이라 너 기분 풀릴 때까지 못 기다리겠어."

"안돼! 싫어!"

코트니의 음성에 나다는 확 째려보려다가 성질 콱 죽이고 억지로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나다란 고양이한테 콱 깨물린 상처가 아직도 이런데, 문둥이들한테 가서 일한다고?"

그러면서 코트니는 나다에게 리오의 상처를 상기시키려고 그의 옷자락을 집어 올렸다. 그러자 리오는 반사적으로 확 뿌리쳤다. 그녀는 독기어린 눈으로 리오를 쏘아보았다.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은 분명히 같지만
분명히 그대는 변했다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틀리며
내일의 마음은 또 틀리리라.


작은 페어리의 모습인 엘시드가 작은 하프를 들고 작은 소리로 노래불렀다. 엘시드는 가끔 혼자 웅얼웅얼 노래했다. 대개가 잘 알려진 전설이나 통속적인 노래였지만, 천사같은 음성이라더니 음성은 홀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노래를 듣고 리오는 서글프게 웃었다.

"그렇군요. 마음이라..."

리오는 허공을 보고 중얼거렸다.

"분명히 몇 달 전만 해도 세상을 다 포용할 듯 평화롭더니... 지금의 마음은 왜이리 지옥같은지. 바다같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듯한 마음도 한순간에 접싯물보다 작아지는군요."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코트니, 미안합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 말대로 나으면 가겠습니다."

새침해졌던 코트니는 리오의 말을 듣고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다음 붕대는 내가 갈아줄께!"

왜 그리 붕대감는 일에 집착하는 걸까? 리오는 이상하다는 듯 코트니를 쳐다보았다.

"그러세요."

코트니는 흥얼거리며 사뿐사뿐 방을 나갔다. 나다는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다.

"도대체 저 악마가 무슨 꿍꿍이지?"


"정확하게 말하면 악마가 아니라 마족입니다."

빅터주교의 설명에 나다는 입을 삐죽였다.

"악마나 마족이나 그 바닥이 그 바닥이지."

"하긴."

빅터주교는 펜을 열심히 놀려 서류를 써가면서 말했다. 일의 뒷처리로 작성해야될 서류가 너무나 많았다. 바쁜 그였지만 열심히 일하면서도 나다에게 성실히 설명해주었다.

"조금은 틀립니다. 마족은 창세 고대시대에는, 악마의 휘하에 들어가기 전 인간을 돕기도 했고 악마에 대항해 싸우기도 했습니다. 결국 악마의 휘하로 완전히 접수되고 나서는 보통 마족보고 악마라고 합니다만."

나다는 열심히 일하는 빅터주교를 더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사제들은 다시 도시로 들어왔고 평민학교도 이제 정상 운영되었다. 리오나 야크가 들어가서 수업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공식적이진 않지만, 딸의 죽음에 충격받아 제정신이 아닌 영주를 찔러 죽인것은 마크였다. 빅터주교도 사정을 아는지라 눈감아주었지만, 마크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나다가 리오의 방문을 확 열자, 앉아있던 리오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을래?"

그러더니 나다는 리오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손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갔다. 그 뒤로 엘시드가 포르르 쫓아갔다.
나다가 리오를 데리고 도시외각을 달려나갈 때 하늘은 푸르렀고 알맞은 햇빛과 시원한 바람은 바야흐로 곧 가을이 올 것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나다는 수도원 뒤쪽의 숲으로 계속 달려갔다. 한참 달려가자 리오는 상처가 다시 아파와서 그만 달리자고 하려 했으나, 갑자기 사방이 트이고 작은 폭포와 계곡이 눈앞에 펼쳐지자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나다는 그런 리오를 뿌듯하게 쳐다보았다. 리오는 시원한 계곡의 풍경에 잠시 모든것을 잊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콸콸거리는 작은 폭포밑으로 가서 바닥이 다 비치는 맑은 물에 손을 담궜다.

"야, 조심해라. 물이 맑아서 바닥이 얕아보이지? 그래뵈도 꽤 깊어."

"이렇게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걸 여태 몰랐네요."

나다는 입을 삐죽이며 이죽거렸다.

"지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살면서 여유도 좀 가져봐. 너같이 세상의 온갖 고민 다 지고사는 녀석은.."

나다는 뭐라고 더 꽁알꽁알대었으나 리오는 더 이상 듣고있지 않았다. 그는 활짝 웃으며 정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케!"

시케는 도시락 바구니를 살짝 들면서 방긋 웃었다. 그 뒤에서 야크가 역시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투덜투덜하면서 어색하게 서있었다. 커다란 검을 등에 단 우락부락한 덩치가 도시락 바구니를 달랑 들고 서 있는 것은 좀 어색하긴 했다. 드와인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리를 펴고 샌드위치와 과일을 늘어놓으니 피크닉 분위기가 났다. 나다는 리오의 얼굴이 다시 환해진 것을 보고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더니..
짝, 짝!
나다가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그럼, 여기서 리오군과 시케양의 약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박수우~"

리오는 웃다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랐다. 시케도 마찬가지였다.
야크와 드와인은 열심히 '정말 유치해!'라는 얼굴로 박수를 짝짝 쳤다.

"자, 두사람은 앞으로오..."

"나다, 저..."

드와인은 들고있던 바구니에서 화환을 꺼내어 리오의 머리와 시케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시케의 손에는 멋드러진 부케를 쥐어주었다. 역시 드워프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드와인은 드워프족의 전사인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건축이나 수공품에 멋진 솜씨를 보여주었다. 아마 '기본'이라는 것이리라.

"저.."

"야, 리오야. 나다가 굳이 안돌아가는 머리 쥐어짜낸 거니까 유치하지만 좀 놀아줘라. 이런 쓸데없는 장난을 왜하는지 원."

야크가 리오에게 불퉁거리며 말하자 시케는 얼굴이 붉어졌다. 나다는 두 사람앞에서 횡설수설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열심히 말해댔다.

"자 화창한 봄날에 즈음하야... 헉, 지금은 봄이 아니지. 하여간 에헴! 여기 두 사람이 약혼을 하게 되었으니. 우움... 원래 이런 건 사제가 해줘야 돼는데 말이야. 흠, 내가 평민이고 약혼하는 두 사람이 사제라니, 뭐가 바뀌긴 한참 바뀌었군. 하여간, 머랄까, 여기 리오군은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아무 것도 쥐뿔없는 녀석인데 능력 많고 힘쎄고 이쁜 시케양을 만나 그야말로 땡잡았다고 본인은..."

"야 이자식아! 무슨 주례가 그래?"

야크가 나다에게 화를 내었느나 나다는 장난스럽게 웃다가 두 사람을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하여간, 리오는 시케를 사랑하고 시케는 리오를 사랑하니 그걸로 쫑입니다. 이제 두사람은 곧 결혼하고 애 낳고 잘사세요. 이젠 질질 짜는 거 관두고 히히거리면서 살라구. 그럼 이걸루 두 사람은 약혼했어!"

"엉터리..."

드와인이 중얼거렸지만 리오와 시케는 서로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둘다 얼굴이 빨갛다.

"아참 하나 더있지? 이 두사람의 약혼에 반대하는 사람 나와보셔!"

"임마! 그건 결혼식때 하는거 아냐?"

"몰라? 하여간 없지?"

그때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난 반대야!"

검은 옷에 투명한 피부, 하늘과 연두와 회색을 섞은듯한 오묘한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 코트니였다.

"너흰 사제잖아! 사제가 약혼을 하다니 인간들도 정말 웃기는군!"

나다가 차갑게 말했다.

"니가 인간들이 약혼을 하던 콩을 볶아먹던 무슨 상관이야?"

"하여간 웃기잖아!"

리오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이건 장난입니다, 코트니양."

시케는 눈을 내리깔았고 코트니는 그렇군,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다는 아랫입술을 쑥 내밀었다. 그러나 리오는 시케의 두 손을 잡더니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정식으로 사제직을 버리고나서... 아름다운 결혼식을 치뤄주고 싶어요. 시케는 하얀 면사포 쓰고.. 드레스 입고... "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뜬 시케가 리오를 쳐다보았다.

"친구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제게로 다가오겠지요. 그날의 시케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울겁니다. 비록 제눈에는 항상 가장 아름답지만요."

나다는 저렇게 닭살돋는 내용을 태연히 말하는 리오가 한심하다 못해 존경스러워졌다. 하지만 시케는 감격해서 글썽한 눈으로 리오를 바라보았고 리오는 애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혼식 드레스와 화려한 식장, 이 드와인과 우리 외로운 산의 친구들이 아주 근사하게 해주지!"

드와인이 굵은 목소리로 쩌렁하게 말했다.

"하긴, 라임숲의 엘프들이 참석해주면 당장 식장이 환해질거야! 쿠쿠."

나다가 흡족하게 드와인의 말에 덧붙였다. 코트니는 주먹을 쥐면서 입술을 깨물더니 휙 돌아서갔다.

"흥! 하나도 재미없어!"

코트니는 그렇게 뒤돌더니 갑자기 멈춰서서는,

"으아아아앙~"

하고 어린 계집아이처럼 울었다. 늘씬하고 터질듯 빵빵한 몸매의, 차가운 외모의 미인이 갑자기 어린애처럼 울자 다들 멍해졌다.

"으아아앙~ 찬밥안시킨다더니.. 끅, 끅,... 동료로 하재더니... 윽, 흑... 이거뭐야! 재미 하나도 없잖아!"

나다는 순간 저 덜떨어진 미인 마족이 혹시 계약을 위반했다느니 뭐라니 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옆으로 살살거리며 가서는 마구 꼬리를 흔들어대며 아양을 떨었다.

"아니아니이... 지금 재밌는 놀이하는데 방해하니까 그렇징! 그럼 우리 귀여운 코트니 양은 뭘해야 재밌을까요? 그럼 다같이 그걸로 놀까?"

그러나 그는 속으로는 위장 속까지 닭살이 돋는 기분나쁜 느낌을 경험해야 했다.

"정말?"

하면서 나다를 바라보는 코트니의 눈은 눈물젖은 순진한 미인의 것이었다. 나다는 순간 예쁘다는 생각이 들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저건 정말 끔찍한 악마라구!'

코트니는 어느새 기뻐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꺄하하! 그럼 우리 펍에 가자!"

"펍에?"

그녀는 두 손을 모아잡고 싱긋싱긋 웃었다.

"동료들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여행에 대해 의논하는거지! 길은 어떻게 잡고 이길은 어떤 몬스터가 나오고~"

'니가 몬스터야, 이 계집애야.'

나다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런데 코트니는 종종거리며 가더니,

"귀여운 리오야, 가자!"

하면서 어느새 리오 옆으로 가서 손을 잡아끌었다. 나다는 코트니가 왜 자꾸 리오에게 찝쩍대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결론지었다.

'아하. 저 악마는 기회를 잡아 리오를 마계로 가져가거나 용이든 마왕이든 그 뭐시냐 그릇? 하여간 그걸로 삼으려는거야. 이거 위험한데...'

지금은 야크나 엘시드가 있으니까 못하지만, 기회를 노리는게 분명하다.
그런데 복잡한 나다와는 달리 야크는 별 생각없이 큰소리로 물었다.

"마족아! 왜 이렇게 리오한테 찝쩍거려?"

코트니는 허리를 뒤로 빼고 몸을 꼬아 야크를 보더니 아름답게 싱글 웃으며 말했다.

"리오가 얼마나 귀엽고 재밌는데? 난 마계에서도 리오처럼 그렇게 굽고 지지고 튀겨도 귀엽게 소리지르는 애는 못봤고오..., 그리고 쫙쫙 때려봐, 울고싶은거 끅끅 참는 모양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그리고 오기부리느라 팔 자를때도 소리 안지르려고 요렇게 이를 앙다무는데, 끼아악! 얼마나 귀여운줄 알아?"

다들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저런 아름답고 순진해보이는 얼굴에서 나온소리라는게...
리오는 창백해지면서 부르르 떨더니 코트니가 잡은 손을 뿌리쳤다. 시케는 증오에 찬 얼굴로 코트니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코트니는 여전히 리오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유 귀여워. 내가 팔다리 다시 붙일수만 있으면 또 짤라보는건데. 인간은 참 귀찮단 말이야, 짤르니까 다시 안나오더라구."

"닥쳣!"

야크가 코트니를 패죽이려 하자 코트니가 뒤로 휙 물러서더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계약 위반해? 불쌍한 시케 안녕히! 괴물이 되겠구나? 후후!"

야크는 부들부들 떨다가 "에익!"하고는 애꿎은 바위만 쾅 차고는 먼저 성큼성큼 가버렸다. 그러나 나머지는 가기 싫어도 억지로 펍으로 갔다. 코트니는 계속 종알거렸다.

"오크는 갖고 놀때 지저분해서 싫어. 하긴 거의 다 똥오줌 싸대지만. 근엄한 척 하는 엘프녀석들도 쉬지않고 하루종일 패대면 똥오줌 싸고 난리나더라? 깔깔깔! 그치만 오크는 참으려는 노력도 안해. 침도 사방에 튀고, 에이 드러워. 뭐니뭐니해도 제일 재밌는건 트롤같아. 짜르면 붙고 짜르면 붙고.. 음, 쪼끔 짤라서 조금씩 씹으면 계속 재생돼서 재밌기도 하고.."

다들 토할것 같은 표정으로 코트니를 뒤따랐다. 내내 침묵하던 조그만 엘시드가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라, 어린 마족아."

코트니가 홱 째려보았으나 엘시드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말을 이었다.

"인간들 일엔 상관하지 말아야 하는게 원칙이지만 나에게 있어 마족을 처치하는 것은 의무이자 권리다. 시케란 인간이 걸린일이라 참긴 하지만 더이상 거슬린다면..."

엘시드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 난 파괴천사다. 수호천사들만큼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잘 알아둬라."

다시 얼굴이 홱 독해진 코트니는 앞장서서 펍으로 들어갔다. 얼굴 표정 바뀌는 것이 순식간이다.


펍에 들어가서 앉아있는데 다들 침묵.

"자, 시키실 일이있으면 이 조이를 불러주세요! 뭐든지 시키세요! 자, 뭘 시키시겠습니까?"

주근깨가 가득해서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청년이 말했다. 주근깨를 보자 나다는 반이 생각났다. 그리고 약혼식 때문에 일부러 데려오지 않은 반이 부러워졌다.
코트니는 매혹적인 눈으로 조이를 바라보았다. 조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코트니를 웃으며 쳐다보았다. 나다는 탁자에 퍽 어푸러지면서 중얼거렸다.

'헤, 맛이 갔군. 저 여자가 잔혹하기 그지없는 마족이란 걸 알아도 저럴까?'

코트니의 발랄한 음성이 들려왔다.

"먼저 용의 간으로 만든 찜하고, 천사 날개 볶음, 드워프 조림, 엘프귀를 꽂아만든 지짐이."

눈이 휘둥그레진 조이에게 코트니가 덧붙였다.

"마실거는, 음, 인간 특히 집시의 피. 빨리 가져와."

조이는 머리를 긁으며 난처하게 웃었다.

"하하! 장난치시는군요. 용의 간이라뇨! 하하, 그런건 없는데요?"

눈을 반쯤 감은 코트니는 웃으며 말했다.

"뭐든지 시키라면서?"

조이는 다시 하하 웃었다.

'이 예쁜 아가씨가 장난을 치나보다. 하하!'

조이는 점점 예쁜 아가씨의 얼굴이 희미해지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바닥이 점점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조이는 이제 다시 바닥을 볼수 없게 되어버렸다.


리오는 당황과 분노가 섞인 말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짓입니까!"

펍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코트니는 단검을 홰홰 돌리며 말했다.

"뭐가?"

주문을 받으려던 쾌활한 청년 조이는 이제 영영 주문을 못받게 되었다. 그는 바닥에 엎어져 죽어있으므로.

"이 악마같으니.."

"어머 몰랐니 쪼그만 드워프야? 되게 둔하네."

조이를 살펴보던 시케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험악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살인이다!"

코트니는 호들갑을 떨며 리오 뒤에 숨었다.

"어머 리오! 저 아저씨 무섭게 생겼다! 우린 동료니까 잘 말해봐~"

"저 여자가 당신 동료요?"

험악하게 생긴 근육질의 남자가 말했다. 아마 여행자 같은데, 나다의 경험으로 봤을때 그자는 나름대로 생사를 넘어온 자였다. 만약 저 수많은 흉터가 괜히 멋부릴려고 칼로 제 몸을 그은게 아니면 말이다.
리오는 처음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여자가 당신 동료야?"

근육질의 사내가 다시 물었다. 리오는 시케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네. 동료입니다."

그런데 다음순간 리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코트니는 언제 올렸는지도 모를 손을 슥 내렸고 근육질의 사내는 얼굴이 시퍼러둥둥해져서 쓰러졌다.

"어머 이번에 만든 독 효과 만점이네? 다음엔 더 소량으로 써봐야지!"

펍안은 소란스러워졌고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다.

"아, 재미없어. 여긴 정말 재미없는 펍이야. 리오 우리 밖에 나가자!"

코트니가 리오의 손을 잡으려 하자 리오는 나다가 여태까지 본 중 가장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코트니를 쳐다보았다. 리오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그렇지요, 당신이라면 충분히,"

"왜 더듬거려?"

리오는 슬픈 눈으로 죽어 쓰러진 점원 소년과 근육질의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케의 얼굴과 나다의 얼굴 그리고 드와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악마와 같이다닌다면 친구들도 다 당할거야. 그리고 이 상태로 가다가는 시케는 악마의 저주를 받겠지.'

리오는 부르르 떨었다. 악마의 저주! 그동안 그가 받아온 어둠의 고통들이 아프게 온몸을 휘저었다. 그 견딜수 없는 절망의 고통을 시케가 당하게 할수는 없다. 리오는 은인인 시케가 자신때문에 저주를 받는것이 참을수가 없었다. 그동안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엘시드를 어깨에 얹고 시끄럽게 주변을 맴도는 코트니를 옆에 둔 채 리오는 밤낮으로 슬픈 생각에 잠겼다. 리오는 겉으로 볼때는 순진하고 귀여워 보이는 코트니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고통을 자신의 희생물에게 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드의 던전에서 충분히 당했기 때문이다. 매일밤 리오는 악마에게 끔찍하게 당해 죽어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꿈으로 꾸었다.  그 꿈속에서조차 리오는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울었다. 자신에게 빛을 가져다준 동료들에게 결국 그는 어둠을 선사했다. 그들은 상상도 못할 지옥의 어둠을... 리오는 자신을 저주하며 점점 더 깊은 절망의 늪에서 허덕였다.

'나의 인생은.. 영원히... 어둠의 터널속을 헤메고 있어... 나에게 잠시의 빛을 준 이들을 나의 어둠속으로 끌어들일수는 없어. 그래, 지금 나는 너무나 행복해.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이 곁에 있어서.... 그렇기때문에, 나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수 없어. 다시 고통으로 돌아갈수 없어. 난 견딜수 없어!'

절망과 슬픔이 리오의 가슴을 예리하게 저미고 있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리오는 시케의 손을 잡았다. 너무 꼭 잡았기때문에 시케는 아프기보다는 의아했다.

"시케, 먼저 들어가있어요. 그리고.."

잠시 목이 메인 리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시케를 꼭 껴안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리오?"

리오는 웃으며 말했다.

"다들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전 코트니양과 이야기를 좀 하려구요."

나다는 의심쩍게 리오를 쳐다보았다. 리오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애썼지만 리오는 나다에게 마음을 전혀 열어주지 않았다.

"너 뭐야?"

"나다, 시케를 좀 위로해줘요."

나다는 뭔소린가 했다.

'하긴 악마에게 영혼이 저당잡힌 시케는 당연히 위로해 주어야지.'

리오는 드와인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드와인님, 마르코 주교님은 좀 엄하신 분입니다. 사실 그분은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시죠. 먼저 종단으로 출발하십시오. 오히려 우리와 동행이 아닌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드와인은 뭐라 말하려다가 아무래도 저런 악마와 같이 다니는 것보다는 혼자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리오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야크님은.. 정말 그동안 고마웠죠. 저때문에 부숴버린 마룡석.. 어떻게 은혜를 갚을지.."

나다는 또 짜증이 났다.

"뭐야 너? 더 할 얘기 없으면 빨리 가. 빨리 얘기하고 오라구. 기다릴테니까."

"아닙니다."

리오는 나다를 보고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 너무 기묘해서 나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환히 웃지만 우는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했다.

"먼저 가세요. 많은 얘기를 해야할 것 같아서요."

그러더니 리오는 코트니와 함께 펍을 나섰다. 역시 말없는 페어리 엘시드가 포르르 따라나섰다.

"저 자식은 세상에 악마를 설득하려 그러나? 어지간히 해라 으이구!"

나다는 시케와 드와인을 데리고 수도원으로 향했다.


"코트니양. 당신은 짧은 시간에 어디까지 멀리 갈 수 있지요?"

코트니는 오묘한 눈동자를 들어 리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

"최대한 멀리 말입니다."

엘시드가 말했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리오는 엘시드를 보더니 웃으며 말한다.

"아주 멀리 가고싶군요. 기왕이면.. 아, 그래요. 높은 절벽 위에서.. 거대한 강이나 바다를 보고 싶어요. 바람도 시원하겠죠."

엘시드와 리오 그리고 코트니의 몸 주변에 흰색 휘광이 싸이더니 갑자기 셋은 사라졌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모두 얼이 빠져서 그 셋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셋은 리오가 원하던 절벽 위에 닿았다. 털썩 무릎을 꿇은 코트니는 엘시드를 바라보며 마구 저주했다.

"이 빌어먹을! 이 돌뎅이 같은 파괴천사자식아! 나한테 이런짓을..."

욱, 하더니 코트니가 보라색 피를 한웅큼 뱉았다.

"괜찮나요."

그러나 리오의 음성은 싸늘했다. 코트니는 투덜댔다.

"나같은 마족한테 저런 천사녀석의 휘광을 둘러싸게 하다니, 내가 당장 방어했으니 망정이지 누구 죽일 일 있어?"

바람은 거셌다. 코트니의 검은 머리는 미친듯이 휘날려서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꼭 쥐어야했다. 리오의 머리도 미친듯이 휘날렸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몸집의 엘시드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리오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리오가 입을 열었다.

"코트니양. 당초 계약이 어땠지요?"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진 코트니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첫번째 계약. 코트니는 리오라는 인간과 같이 여행하겠다. 두번째 계약. 너희가 여행하면서 나를 냉대하면 안된다."

그리고는 다시 어리광피우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라고 했지. 후후! 왜?"

리오는 코트니를 돌아보았다.

"두번째 계약은 첫번째 계약이 이루어져야만 성립되는군요."

"당연하지!"

코트니는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리오를 쳐다보았다. 워낙 예쁘니까 그 모습도 매력적인 페르시아고양이같이 예뻤다.

"왜? 귀여운 리오, 계약위반하게? 후후, 이타냐에 몬스터가 하나 늘겠구나. 이름은 '시케'..."

리오는 고개를 젓고 담담히 말했다.

"내가 죽는다면 첫번째 계약은 이루어질수 없습니다."

코트니가 그 말을 듣고 반응을 보이기 전에 리오는 하얀 포말을 품는 절벽 아래로 그대로 떨어졌다. 서있던 그대로, 그는 마치 순간 공중에 뜬것이 아닌가 싶었다. 리오는 쑤우욱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머리위로 펼쳐지는 끝없는 물결과 부서지는 햇빛, 그리고 절벽을 때리는 파도의 시원한 소리를 들었다. 이제 마음은 평화롭다.

"파괴천사 엘시드여. 당신도 이제 신계로 돌아가셔도 되겠군요."

그리고 이 상황을 강렬하게 느끼고 침대 위에서 혼자 발광하고 있는 나다의 마음속에 리오의 마지막 음성이 울렸다.

'악을 담을 그릇은 이제 깨질테니까요.'


절벽으로 다가가려던 코트니 앞에 이제는 제모습으로 돌아온 파괴천사 엘시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계약을 계속 잇고 싶은가?"

"무, 무슨 소리야?"

코트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파괴천사는 그의 긴 검을 들었다.

"첫번째 계약. 리오와 함께 여행한다. 계약을 잇고싶다면 저승으로 그 길을 안내해줄 순 있다."

"무슨 소리야! 살려야할 거 아니야!"

엘시드는 무표정하게 검을 들고 말했다.

"말하라. 계약을 계속 잇고 싶은가?"

코트니의 눈에 눈물이 넘쳤다. 그녀는 욱, 욱 하면서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야! 니가 천사야? 리오가 죽는데 그냥 내버려두냐? 내가 악마고 니가 천사잖아! 왜 반대로 됐냐구!"

"말하라. 계약을 계속 잇고 싶은가?"

코트니는 눈이 빨개져서는 식식 거렸으나 지금 생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알겠어, 알겠어. 계약 해제다. 이 빌어먹을 천사자식!"

그러더니 코트니는 땅 아래로 쑥 사라졌다. 엘시드는 공중에 떠서 검을 든 채로 절벽 아래의 하얀 포말을 내려다보았다.

"유감이오, 성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