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완결)장편-프리즘
[프리즘] 1부 8장 배운대로 행동하는 아이들 (2)
리오나다
2009. 12. 5. 18:08
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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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배운대로 행동하는 아이들 (2)
우물 있는 곳까지 떨어져 나온 나다는 잠시 한숨을 쉬고 물을 먹으려했다. 우물가에서는 한 아이가 물을 먹고 있었다. 아이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던 나다는 파리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제대로 빵도 못 먹은 얼굴이다. 그 아이는 배가 고파서 우물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나다는 주머니에 쑤셔 박은 빵을 꺼냈다.
'어떻게 해야 자존심 상하지 않게 이걸 주나?'
첨벙! 두레박을 우물에 내린 아이는 물이 너무 많이 담겨 무거워진 두레박을 꺼내지 못하고 낑낑거렸다.
"어허? 너같이 쬐끄만 녀석이 어떻게 그걸 끌어올려? 못할걸?"
옆에서 약을 올리자 얼굴이 벌개진 아이가 화를 냈다.
"왜 못해? 할 수 있어!"
"그으래?"
나다는 주머니에서 빵을 꺼내 흔들었다.
"내 저녁 빵을 건다. 넌 못해!"
"이익!"
오기가 발동해 얼굴이 빨개진 아이는 열심히 두레박을 끌어올렸다. 낑낑거리며 겨우 끌어올린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나다를 쳐다보았다.
"이구 제길! 내 아까운 빵! 흑흑.."
나다가 억울한 척 하며 빵을 내밀자 아이는 허겁지겁 먹었다. 목이 막힌 아이에게 나다가 물을 주었다.
'천천히 먹어, 임마.'
빵을 다 먹자 나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아이에게 말했다.
"내 빵을 뺏아가다니, 널 용서할 수 없다. 내일 점심시간에 보자! 다시 내기를 걸어 이 모욕을 갚겠다."
아이는 자신감있게 외쳤다.
"얼마든지!"
나다는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폭 쉬었다.
'내일부터는 빵 두개를 더 싸와야겠군. 배고파라.'
다음날 마크 반의 수업에 들어온 리오는 사제복을 입고있지 않았다.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교탁 위에 올라선 리오가 쾌활하게 말했다.
"잘 들으세요. 나는 사제로서는 자격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신학에 대해서는 여러분보다 잘 압니다. 그러니 가르칠 수는 있지요."
리오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에게는 여러분들을 평가할 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제처럼 수업을 포기해버린다면 제가 어떻게 학생들의 실력을 평가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학생에겐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교과서를 펴십시오."
아이들은 온화하지만 단호한 리오의 태도에 기가 눌려 부시럭 부시럭 교과서를 편다.
"저는 이미 가정교사에게 신학의 이론을 많이 배웠습니다. 이 수업의 수준은, 저에겐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그럼 저는 나가도 되겠습니까?"
마크의 당돌한 말에 리오는 빙긋 웃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신학에서는 단지 책의 내용만 암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인내심과 성실성도 중요한 평가요소지요. 남을 향한 배려 또한. 그리고 제가 가르치는 내용과 평가할 내용이 마크군이 배운 것과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마크군이 잘못된 판단으로 자칫 낙제점을 받을까 우려되는군요."
마크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일이등을 다투는 마크에게 신학 낙제는 큰 타격이었다. 리오는 왠만하면 점수로 학생을 위협하는 짓따윈 하고싶지 않았지만 첫 수업때의 태도로 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리오가 무슨 말을 하건 무슨 태도를 보이건 마크는 또 나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크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다른 아이들도 모두 나갈 것이다.
일단 자리에 앉아있어야 다음에 뭘 하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자, 교과서를 펴십시오. 제가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신은 백인족을 세상의 지배자로서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 신 또한 백인의 모습이며 천사 또한 그러하다. 반대로 다른 종족들은 그 변이종에 불과하다. 그림이나 신화의 악마가 검은 피부이거나 백인종보다는 타 종족에 가까운 것을 예로 들수 있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며, 나머지 종족은 '유사인종'일 뿐이다 '유사'의 말뜻은,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다. 세상의 식물과 짐승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듯 유사인종들도 인간 즉 백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리오는 교재를 들고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학생들은 말을 멈춘 리오를 주시했다.
"교재를 어디까지 배웠나요?"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번은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범위를 정해 외운 다음 낭송하는 형식으로 그 동안 배우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딱딱한 목소리로 리오에게 말했다. 은연중에 '이렇게 배우고 있었으니 따르시는 게 맞지 않겠소?'라는 식이었다.
'외운다'라. 리오는 씁쓸히 웃었다. 사람을 세뇌시킬 때 외우고 암송하여 머릿속에 오래 남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미소를 지으며 리오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전 외우는 방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의 사랑은 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묻겠습니다. 학생들은 방금 읽은 문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학생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신학시간이란 그냥 계보를 외우고 교리를 외우는 형식이었지 그렇게 물어보는 교사는 없었다. 이타냐 종단의 교육방법은 전통적으로 무조건 외우는 것이었다. 교리에 대한 토론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다. 종단에서 정해놓은 경전의 해석 외의 해석은 '이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흥, 이단자..."
마크가 저주하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종단입장에서는 케이와이단의 교재 해석도 '이단'이었다. 리오는 마크를 보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마크군이 말해보십시오. 누구보다도 주관이 뚜렷해 보이는군요. 마크군이 이단자라고 부르는 저에게 명확히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을 겁니다."
마크는 자신있는 말투로 교재를 읽었다..
"[신은 백인족을 세상의 지배자로서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
마크가 그 구절을 읽는 동안 리오는 온화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다. 세상의 식물과 짐승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듯 유사인종들도 인간 즉 백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교재에 명시된 이 말은 경전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크군. 말을 잘라서 미안합니다만. 그 말은 경전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 교재를 만든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리오의 말에 마크의 얼굴이 잠시 벌개지다가 다시 경멸하는 눈빛이 되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흥, 경전은 고대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고대어의 해석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공용어로 옮겼을 경우 해석이 여러가지입니다."
그러자 리오가 그 부분에 해당하는 구절을 고대어로 읊었다. 기품있고 품위있는 발음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의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리오가 다시 아이들이 알아들을수 있는 공용어로 해석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시었다. 그리고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모든 만물에 위에 서되 지배하지 않으리라. 신과 천사의 모습을 닮았으되 육체를 말함이 아니라. 모든 종족은 이와 더불어 화친하리라."
리오는 진지한 얼굴로 마크를 보았다.
"이 대목입니다. 물론 고대어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엘프들의 언어에는 고대어가 많이 남아있고, 실제 나이 많은 엘프들은 인간들의 고대어를 기억합니다. 제가 견습사제시절 배운 고대어 외에도 엘프의 잃어버린 숲에서 엘프의 레이디에게 직접 배웠으니 이해석이 맞을 것이라고 봅니다. 적어도 지금 이 교재의 방식처럼 해석되지는 않습니다. 정통적인 해석방식으로도."
마크는 리오를 쏘아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리오가 다시 물었다.
"신학을 충분히 배웠다고 말했지요? 마크군. 고대어를 모르고서는 신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전 분명히 이 수업의 수준이 제게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고대어를 안다고하진 않았습니다."
"마크군은 내 수업을 들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대의 수준에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습니까?"
마크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부르르 떨다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비아냥거리는 듯 말했다.
"그럼, 우리에게 고대어라도 가르쳐 주시겠단 말씀입니까? 하, 우리는 모두 신학자가 되어서 졸업하겠군요?"
리오는 떼를 쓰는 아이를 보듯 마크를 보았다. 그리고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전공자가 아니면서 고대어를 익힐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제가 볼 땐..."
리오는 교재를 들어 보였다.
"이 교재를 보아하니 확실히 오역된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저작하신 분께서는 많은 심혈을 기울이셨겠죠. 하지만 마크군 말대로 학생들은 아직 어리고 전공자도 아닙니다. 그러니 종단에서 널리 인정받은 교리부터 배워야겠죠.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저자의 독특한 해석을 담은 책은 교리연구로서 전공자들이 개척해 나가야할 과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통이 아닌 독특한 견해더라도 여러 다양한 해석을 수업 중에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의견에도 맞지 않고 정통 교리에도 어긋나는 교재를 주 교재로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저도 여러 책을 보았지만 이 책의 해석이 가장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책을 가르쳐주실 생각이라면 그 또한 저는 다 배웠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내게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억지를 부리는 것은 마크였다. 리오는 여전히 감정의 동요없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마크군, 전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 그걸 가르치고 싶어요. 마크군이 가정교사에게 배운 것하고는 틀릴겁니다."
"그게 뭡니까? 어떻게 하면 '문.둥.이'의 성자로 불릴 수 있나, 그런 내용인가요?"
마크는 대놓고 리오를 비난했다. 그러나 리오는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다.
"제가 가르치고 싶은 것은 신의 사랑입니다."
"하, 신의 사랑이요? 당신이 신을 불러오실 건가요? 역시 당신은 대단한 성자님이시군요! 문둥이의 성자님이시여. 당신은 문둥이의 신이라도 불러오실 겁니까? 그의 대단한 사랑으로 우린 모두 문둥이가 되겠군요!"
아예 예의고 뭐고 포기한 듯, 마크는 신랄한 독설로 리오를 공격했다. 그런 마크를 씁쓸히 쳐다보던 리오는 시선을 돌려 모든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이 교리를 보았을 때, '신의 사랑'이란 관점에서 보았으면 합니다. 왜 제가 이 교재의 해석이 틀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시는지요? 마크군."
"당신은 이단이니까!"
마크의 외침에도 리오는 침착했다. 그는 다시 교재를 읽었다.
"[신은 백인족을 세상의 지배자로서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 신또한 백인의 모습이며 천사 또한 그러하다. 반대로 다른 종족들은 그 변이종에 불과하다. 그림이나 신화의 악마가 검은 피부이거나 백인종보다는 타 종족에 가까운 것을 예로 들수 있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며, 나머지 종족은 '유사인종'일 뿐이다 '유사'의 말뜻은,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다. 세상의 식물과 짐승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듯 유사인종들도 인간 즉 백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이 말에는 무엇이 담겨있나요. 지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이 해석 안에 신의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신은 오직 백인만을 사랑하실까요? 신께서 보시기엔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의 자식이십니다. 신은 백인도 황인도 흑인도 사랑하십니다. 신께서는 엘프도 드워프도..."
"그리고 문둥이와 이단자도 사랑하시겠죠."
마크의 말에 아이들은 깔깔깔 웃었다. 아이들의 분방한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 리오가 마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단자!"
마크가 외쳤다. 그러자 리오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리오는 마크의 눈에서, 쓰레기라며 어린 샤니를 불에 태웠을 백인병사의 눈을 보았다. 느낄 수 있었다.
'샤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리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엇을 보고 이단이라고 합니까? 제가 말한 것은 모두가 정통 종단의 교리입니다. 마크군이 말하는 이단의 정의란 무엇입니까?"
"당신같은 사람을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마크의 싸늘한 말에도 리오는 굽히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마크군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죠셉 대주교의 '신화와 역사'를 읽어보셨나요?"
"그게 당신이 이단인 것과 무슨 상관이지?"
"그럼 다음 장을 볼까요? [백인 이외의 것들은 오로지 백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유색인종은 백인의 하인으로써, 그리고 자비를 베풀 대상이다. 자비를 베품으로써 위대한 백인은 더한층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마크군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마크군은 많은 이들에게 자비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 '프랜신'님을 아십니까? 그분은 황인이십니다. 그럼 그에게 자비를 받은 백인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쓰레기지."
리오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마크군, 그분의 자비로 목숨을 건지신 분 중에는 이타냐의 성황이셨던 럼프킨 3세도 계십니다."
"....."
말문이 막힌 마크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고집스러웠다. 리오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분도 마크군의 눈엔 쓰레기로 보입니까?"
"쓰레기가 갱생했나보군요. 신의 자비죠."
리오는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눈을 뜨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크군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군요. 모른다는 것 자체는 클래스 수준상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 대해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정당한 지성인의 태도라고 보십니까?"
마크는 고집스럽게 시선을 교탁 밑으로 돌린 채 입을 다물었다. 다른 학생들은 조용했다. 누가 보더라도 마크의 패배는 자명했다. 마크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앉으세요 마크군. 내가 판단하기엔 마크군은 수업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크군이 그렇게 판단한다면 다음 수업부터는 나오지 마십시오. 시험만 본다면..."
"아니! 그럴 리가."
마크는 눈을 치뜨고 리오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그 위에서 얼마나 잘난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주겠어. 이단자의 혓바닥이 얼마나 유연하고 교활한지 더 알아야하니까!"
다시 조용해졌다. 리오는 마크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마크는 리오의 눈을 노려보다가 못볼 것을 본듯 흠칫했다. 고개를 돌린 그는 리오를 쳐다보지 못했다.
리오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조용히 뜨더니 교탁으로 돌아갔다.
"여러분에게 책을 추천하겠습니다. 미켈란 대주교님의 '신의 역사'입니다. 이 책은 초보자를 위해 대주교님께서 쉽게 쓰신 것이지요. 널리 통용되는 기초반 바이블입니다."
리오는 학생들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앞으로 수업은, 이 책으로 합니다."
"야, 잘했다 야."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리오에게 나다가 다가가서 물컵을 건네주었다. 리오는 목이 탔는지 급하게 마시다가 케켁, 하고 사래가 들렸다. 그는 입을 닦더니 나다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정말 힘들었어요. 히유..."
"잘했어 임마. 버벅거리는 것 밖에 모르는 줄 알았더니 말도 꽤 잘하더라."
"헤헤. 흥분했었나봐요. 그리고 어제 나다랑 열심히 연습했잖아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막나갈 줄은 몰랐잖아."
리오는 말없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다가 리오를 재촉했다.
"빨리 가서 다음에 애들 배울 거 연습하자. 아직 넌 익숙하지 않으니까 준비가 철저해야 애들 앞에서 안 떨릴 거야. 그리고 말이야, 아까도 너무 말을 어렵게 했다구. 넌 쉽게 한거라고 하지만 여긴 대학 강단이 아니야 자식아. 용어를 말야 좀..."
나다는 걸어가면서도 계속 리오에게 잔소리했다. 리오는 교사생활 선배인 나다의 말을 진중한 얼굴로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 앞에서 너무 큰소리로 목을 쓰면 목이 쉬어서 나중엔 수업할 수 없다는 둥, 시간을 잘 재어가면서 수업해야지 아니면 수업할 내용이 너무 빨리 끝나거나 미처 진도를 못 나간다는 둥, 가끔 쉬어가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해야지 아이들이 너무 수업만 하면 지친다는 둥..........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다음날 리오는 오자마자 교장실로 호출되었다.
"아이들을 상대로 책을 강매했다구요?"
교장은 굳은 얼굴로 리오를 보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학부모들이 사제님을 지목했습니다. 사제님께서.. 교과서를 바꾸셨다구요."
리오는 시인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사제님은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리오는 조용히 교장을 바라보았다. 교장은 리오의 눈을 맞받아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이해해주십시오, 사제님. 케이와이단의 입김은 막강합니다. 그들에게 거슬린다면 평민학교는 문을 닫아야 할겁니다."
"그러니까, 문제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과서를 바꾼 것? 책을 강매했다는 것?"
"둘 다입니다."
리오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아이들에게 책을 나누어준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군요."
"네?"
"이 도시에선 이제 이런 책 팔지 않습니다."
서점주인이 말했다.
"무슨 말이유? 그거 흔한 책인데."
나다의 말에 서점주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케이와이단 발행 책이 아니면 이젠 취급할 수 없어요. 저도 먹고살아야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나다는 어깨를 으쓱한뒤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쩔거니? 리오."
리오는 빙긋 웃었다.
"만들면 돼요!"
'아이구 내 팔자야. 아이구 내 손꾸락이야.'
그날 그날 수업에 맞춰, 책을, 그것도 똑같은 내용을 수십 장 베끼려니 나다는 손가락이 다 얼얼했다. 리오는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책을 베꼈다. 그 두꺼운 책을 다 베낄 순 없다. 그래서 수업에 맞춰 중요한 부분을 몇 장씩 베꼈다. 베낄 부분은 리오가 줄을 그어놓았다.
"야, 우리가 학교에 들어간 건 위장술이라구 위장술. 너 목적을 잊어버린 거 아니야? 이렇게 까지 할 필요 있니?"
나다가 투덜거리자 리오가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커서는 바로잡기 힘들어요. '피의 도서관'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런 잘못된 교육 탓입니다."
그러더니 리오는 나다의 글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나다 글씨가 참 멋지군요."
'으이구, 내 팔자야.'
밤새 글을 베낀 리오는 낮에도 학교에서 쉴새없이 베꼈다. 시케와 야크 그리고 수도사들도 열심히 베껴서 다음날 아침엔 꽤 많이 베꼈다. 모두들 손가락이 퉁퉁 부었다. 리오는 일일이 다 감사하며 고마워했다. 다들 눈이 빨갛게 되어서 리오의 인사를 받았다.
리오와 나다는 베낀 종이들을 이고 지고 등에 메어서 가져갔다. 나다는 마음이 흐뭇했다. 리오도 좋은지 싱글벙글 미소짓고 있었다. 야크와 시케는 이미 수업을 하러 아침 일찍 나갔다. 밤새 잠도 못 자고 바로 수업에 나가서 피곤할 것이다. 부상당한 드와인은 계속 설계도를 그리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드와인님.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그럼 다녀오지요!"
쾌활하게 인사한 리오는 나다와 함께 수도원을 나섰다. 날은 점점 더 더워지고 있었다. 학교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길게 느껴졌다. 종이의 무게는 대단했다. 나다는 작은 수레라도 끌고 올걸, 하며 투덜거렸다. 리오는 학교로 들서어서는 고풍스러운 정문이 보이자 다행스러움을 느끼며 빨리 걸었다. 아무리 만사 헤헤거리는 리오라지만 나다의 투덜거림은 솔직히 듣기 좋지만은 않았다.
"어?"
앞장서던 리오가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학교 옆 골목을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다는 의아해서 리오의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골목어귀에 한 학생을 둘러싼 학생들이 보였다.
"마크?"
리오와 나다는 학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야, 마크. 오랜만이다?"
미끈하게 생긴 검은머리의 비아냥 어린 말투다. 그러나 마크는 자신을 둘러싼 덩치들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난 학교에 가야한다. 비켜라."
마크의 말에 미끈이가 픽, 웃었다.
"평민주제에 건방지구나! 백인이라구 다 같은 줄 아니? 난 귀족이다. 존대하란 말이다!"
"백인이면 다 똑같아. 백인은 평등해."
"웃기는 자식!"
미끈이가 마크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마크가 머리를 슥 기우뚱하자 미끈이의 주먹은 벽을 강타했다.
"으아악!"
덩치들이 마크에게 덤벼들었다. 그때 앞으로 나서려던 리오를 나다가 막았다.
"가만있어봐. 지금 껴들면 마크는 오히려 싫어할 거야. 아이들은 저들끼리의 법도가 있는 거니까."
마크는 덩치들의 약점을 오히려 이용했다. 좁은 골목에서 녀석들은 덩치만으로도 꽉 찼다. 마크는 몸을 이리저리 재빠르게 놀리며 그들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주먹을 날리면 덩치들은 일어나질 못했다.
"이야, 정말 대단한데?"
나다는 감탄했지만 리오는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했다.
칙!
"너...."
마크의 어조가 살벌해졌다. 미끈이는 진검을 꺼내들었다.
"나, 난 귀족이다! 평민따위, 죽여도 상관없어!"
미끈이는 벌벌 떨면서 겨우 그 대사를 마쳤다. 진검이 나왔으니 이미 뒷골목 아이들싸움이 아니었다. 미끈이가 마크에게 덤벼들었다. 마크의 몸은 확실하게 둔해졌다. 진검이 날아오는 것과 목검이 날아오는 것은 틀리기 때문이다.
"학생들! 그만 멈춰!"
리오가 나다의 손을 뿌리치고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 미끈이와 덩치들이 잠시 칼을 멈추고 리오를 쳐다보았다.
"학생들 무슨 짓입니까? 칼을 거두세요!"
"당신 뭐야?"
미끈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크도 거친 숨을 내쉬면서 외쳤다.
"가짜성자, 비켜! 이건 내 싸움이야!"
하지만 리오는 마크 앞에 보호하듯이 섰다. 그리고 별 설득력 없는 내용의 말을 했다.
"싸움은 안돼.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은 안돼!"
"흥, 마크. 선생 뒤에 쥐새끼같이 숨었구나. 얘들아, 가자!"
미끈이가 사라지자 리오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마크, 괜찮니? 아,"
마크는 리오가 들고 있던 두툼한 종이뭉치를 탁 져서 바닥에 흩뿌리며 험하게 외쳤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뭔데 이따위 짓을 하는 거야!"
바닥의 종이뭉치를 거칠게 발로 찬 뒤 마크는 학교로 뛰어갔다. 리오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밤새 베꼈던 종이를 주웠다.
'윽, 왠지 처량해 보인다.'
나다도 옆에 붙어서 종이를 주웠다. 그리고 거 보란 듯이 말했다.
"거봐, 껴들면 싫어할 거랬지. 으이구!"
종이의 흙을 탁탁 털어낸 뒤 리오와 나다는 학교로 들어갔다.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가맣게 모여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는 시케와 야크가 검을 들고 한창 대련 중이었다.
창, 챙!
시케와 야크가 맡은 반의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운동장에 나와있었던 모든 학생들이 둥그렇게 모여 섰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도 노골적으로 상체를 밖으로 내밀고는 열심히 구경했다. 심지어 선생들도...
시케의 동작은 여자임에도 상당히 박력있고 절도있었다. 야크는 힘이 넘쳤지만 왠지 서툴었다. 그는 서방검술의 동작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학생들한테 동방검술을 가르쳐줄 순 없는 일이었기에 며칠 전에 시케에게 배워둔 것이다. 야크가 전투 시 검을 휘두를 때 얼마나 거칠면서도 물 흐르듯 부드러운지 아는 나다는 비록 지금 동작도 훌륭하지만 약간의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엔 방금 달려 들어오던 마크도 구경꾼으로 서있었다. 마크는 홀린 듯이 두 사람의 대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그의 시선은 시케의 한동작 한동작을 놓칠세라 따라다니고 있었다. 검술을 모르는 나다였지만 시케의 동작이 멋있다는 것쯤은 알수 있었다. 입을 딱 벌린 나다를 보고 리오가 웃었다.
"자, 얘들아. 이게 바로 검사의 기본동작인 '18 무'야. 지금 우린 기본동작만으로 대련한 거야."
검을 멈춘 시케는 야크와 공손히 인사한 뒤 아이들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이제 알겠니? 멋있는 기술도 물론 좋지만, 기본동작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단다. 그리고 또 알아둘 것은, 기본동작이 정확치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기술을 익혀도 모래 위의 성이란 거지."
아이들에게 설명하던 시케는 뒤에서 구경하던 리오와 나다를 보고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리오도 함박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마크는 음울하게 그를 쏘아보았다.
자신의 교실로 돌아온 리오는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이걸 다 베꼈어요?"
아이들은 웅성거렸다. 리오는 다 나누어준 뒤 수업을 시작했다.
나다는 다시 우물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고픈 배를 우물물로 채우려고 아이가 또 나타난다.
"어? 당신은.."
"음, 난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라서. 다시 한번 붙어보자!"
나다의 말에 아이는 다시 얼굴을 발그레하게 상기시키며 주먹을 쥐고 외쳤다.
"얼마든지!"
"음... 넌 구구단을 못 외울 거야. 한번 외워봐!"
당연히 외울 줄 알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우물쭈물거렸다.
"음... 넌 구구단의 이단을 당연히 못 외울 것이다! 내가 내기한다!"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다시 조그만 주먹을 쥐며 외쳤다.
"당연히 외우지! 음..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아이는 더듬거리며 이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다는 짐짓 이마를 찌푸리고 뺨에 손을 괴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 팔에 십..십..."
소년은 손가락에 발가락까지 이용해가며 쩔쩔 맸다. 나다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허억! 이 팔에 십 육, 이 구 십 팔이라는걸 넌 모를 것이다!"
아이는 방그레 웃었다. 이제 아이도 눈치를 챘다. 나다는 아이와 빵을 나눠먹으며 물었다.
"이름이 뭐니?"
"스코트."
"나 밥 혼자 먹는 게 무지 쓸쓸한데, 나랑 같이 먹어줄래?"
스코트가 머뭇거렸다.
"난 백인인데?"
나다의 좋던 기분이 확 나빠졌다. 목에 빵이 걸렸다. 스코트는 여전한 말투로 하대하며 나다에게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러지 마. 형들이나 선생님한테 들키면 너나 나나 죽어."
"뭐야?"
"난 가난해도 백인이야."
빵을 다 먹은 스코트는 발딱 일어나더니 우월감과 자존심이 가득한 눈으로 앉아있는 나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건물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나다는 먹던 빵을 집어던지고 발로 우물을 쾅 찼다. 그러다가 미끄러질 뻔했다.
매일같이 책을 베끼느라 리오는 잘 새가 없었다. 도와주는 것도 정도껏이지. 나다는 며칠 도와주다 포기하고 괜히 설계도 보는 드와인에게 찝쩍거렸다.
"빨리 해, 빨리!"
"이익! 이봐 나다, 이건 우리 선조의 걸작이야! 그렇게 쉽게 파악될 거 같나?"
"흠."
책을 베끼던 리오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웃었다. 나다는 베끼는 게 너무 지겨웠다.
그런데 둘을 바라보던 리오의 표정이 변했다. 무엇을 보았는지 리오는 펜을 던지고는 밖으로 화급히 나가버렸다. 나다는 리오를 쫓아갔다.
'무슨 일이지? 우리 뒤쪽엔 벽하구 창문만.. 아하, 창문. 뭘 봤나?'
리오와 나다는 어두운 수도원 벽을 따라 달려갔다. 수도원 옆의 숲으로 한참 들어가자 빛이 보였다. 마크와 또 그와 싸우던 미끈이가 보인다. 그런데 그 미끈이 옆에는 웬 기사가 같이 있었다.
"도련님, 이 녀석이 그 건방진 평민녀석입니까?"
"그래, 혼 좀 내줘. 꼴에 마크 탤보트랜다. 평민주제에."
마크는 힘들게 웃었다. 그리고는 긴장되는지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저 녀석의 아비는 케이와이단의 주요인물입니다. 그냥 혼내줘서는 말썽이 크겠지요 그렇지만..."
음흉한 기사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죽여버린다면 상관없지요. 실종은 흔한 일이니까... 혹은, 가출이라던가."
마크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평민주제에, 검술시합에서 날 제치다니. 기분 나쁜 녀석! 원래 우승은 귀족에게 넘겨주는 거, 넌 몰랐냐?"
"그래서 더럽게 날 협박했지. 너 같은 녀석은 용서 못해."
냉정을 되찾은 마크가 흔들림 없는 말투로 당당하게 말했다. 리오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았다. 나다가 말릴새도 없이, 리오는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
"멈추십시오, 기사님! 어린아이를 상대로 이 무슨 짓입니까?"
갑작스런 리오의 출현에 기사는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어둠속에 숨어있는 나다를 보지 못한 그는 주위에 리오뿐이란 걸 알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사제 나으리. 당신은 영주님에게 반항하는 종단의 사제... 그리고 여긴 인적없는 숲속이오."
그는 얼굴을 험악하게 하며 리오를 협박했다.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당신을 베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나 리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는 표정으로 기사에게 말했다.
"전 눈하나 깜짝않고 그대에게 베일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사는 흠칫 놀랐다. 그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은 리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 기사는 칼을 내렸다.
"...갑시다, 도련님."
"무, 무슨소리야! 다 해치워버려!"
"저 사람이 누군지 아신다면 그렇게 말씀하지 못하실겁니다. 가시지요."
"감히 내 말을 거역하다니!"
기사는 몸을 돌려 자신의 상전을 바라보았다. 그의 무서운 시선에 미끈이는 움츨 쫄아들었다.
"아버님이신 쏜튼 와일더 장군께서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미끈이, 아니 와일더 장군의 여섯째 아들인 프란스 와일더의 몸이 비틀거렸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앞서가는 기사를 따라가며 계속 애원했다.
"아버지한테 이르면 안돼! 알았지?"
"...."
프란스 와일더와 그의 경호원들은 꽁지빠진 개처럼 마크에게 으르렁거리며 기사의 뒤를 따라갔다. 나다는 '도대체 쏜튼 와일더가 누구지?' 하며 곰곰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괜찮니? 마크!"
리오의 걱정스런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마크가 픽 쓰러졌다. 피가 줄줄 흐른다. 끌려오기 전에 기사에게 당한 것이다. 마크가 아무리 뛰어난 아이라도 맨손으로 정식기사를 당할 수는 없었다.
"아! 쏜튼 와일더! 리오, 널 사드의 손에서 구해준 그 장군이잖아! 거 있잖아 독실한 신자라던..."
"나다, 지금 그런건 중요치 않아요! 이 피좀 보세요! 빨리 옮겨야 된다구요!"
"이런 건강이 지나치다 못해 건방진 놈이 피좀 흘렸다고 뭐 어찌 되겠냐. 거 참 그 쏜튼 와일더인가 하는 장군이 자식농사 하나는 망쳤구만. 어찌 그런 사람에게 저런 자식이 있을까나. 헐."
"나다! 빨리 마크를 데려가자구요!"
"야, 그리고 말이야, 아까 그 기사가 널 찔렀으면 어쩔려구 그랬어? 빅터주교 치유력 강하다고 아예 배 째라냐? 목 잘리면 빅터주교가 아무리 치유력이 강해도 널 살려줄수 있을거 같아? 이 간이 배밖에 나오다 못해 반찬으로 먹을 놈아! 죽을려고 환장한 놈아! 뭐, 베여도 눈하나 깜짝 안 해? 자랑이다 그래. 에라이 이 아메바 같은 놈아!"
"나다, 제발!"
리오가 난생 처음 나다에게 짜증을 내자 나다는 흠칫 놀랐다. 그는 중얼중얼 욕을 해대며 리오와 함께 마크를 들어올렸다. 두사람은 건장한 마크를 끌고 낑낑거리며 수도원으로 데려갔다. 그것을 보고 시케가 놀라서 뛰쳐나왔다.
시케의 치유마법에 마크는 정신이 서서히 드는지 신음했다. 그는 자신의 몸 위로 고개를 숙인 시케를 보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시케가 뒤로 물러서고 리오가 나서서 물었다.
"마크, 이젠 괜찮아요. 도대체 무슨...."
기분이 나빠진 마크가 싸늘하게 답했다.
"내가 왜 당신에게 설명해야 하지?"
'이런 건방진 녀석!'
나다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야크가 먼저 말했다.
"싸가지 없는 말투가 나다 못지않군그래."
'으윽.'
리오는 마크의 말투도 아랑곳않고 말했다.
"오늘밤은 자고 가요. 위험하잖습니까."
"흥, 내가 왜.."
"자고 가요, 마크."
시케가 말하자 얼굴이 붉어진 마크는 가만히 굳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 마크에게 자신의 방을 넘겨준 리오는 나다의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다른 수도사들이 대부분 피신한 탓에 방이 많이 비어있었지만 한밤에 다시 방을 치우고 정리하는 법석을 떨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다의 방은 침대가 두개니까 리오가 나다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밤이 늦어갈 무렵까지 리오는 자지않고 계속 책을 베꼈다. 나다는 불빛때문에 상당히 귀찮았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눈치를 줘보지만 리오는 끄덕도 않았다.
'저럴땐 정말 얄미워. 으이구...'
깜빡 잠이 든 나다는 꿈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한참 맛난 음식을 시식하려던 나다에게, 갑자기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윽...."
나다는 비몽사몽 생각했다.
'으음.. 이게 뭐지. 내가 악몽꾸나?'
"윽...윽....우욱..."
정신이 퍼뜩 든 나다는 벌떡 일어났다. 신음소리는 옆에서 나고 있었다. 온몸을 조그맣게 오그린 리오는 침대 시트를 꽉 그러쥔 채 보기에도 고통스럽게 몸을 꿈틀거렸다. 식은땀을 어찌나 흘리는지 침대가 흥건하게 젖었다.
"야, 왜이래, 정신차려!"
"으..윽... 사드.... 그만.. 제발..."
"시케, 시케엣!"
곧 주교와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평소 시케나 드와인은 적이 올까 경계하느라 옷을 제대로 갖춰입고 자서 멀쩡히 뛰쳐나왔지만 빅터주교 외 수도사들은 잠옷을 입은 채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하지만 부끄럽고 자시고 할것없이 빅터주교는 괴로워하는 리오의 이마에 손을 댔다. 빅터주교가 흠칫했다. 마음이 급한 나다가 험하게 질문했다.
"왜 그래?"
"...성자님께서 큰 충격을 받으신적이 있나요? 아니면..."
"아주 끔찍한 일을 당했었다우."
나다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야크가 무겁게 말했다.
"아무래도.. 후유증같다."
"무슨 소리야?"
야크는 기운없이 말했다.
"나다야. 비록 새롭게 몸을 회복시켜줬지만, 리오의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리오의 무의식도. 기억하고 있다. ...고통을."
"그게 무슨 헛소리야?"
"예가 될 진 모르겠지만 발이 잘린 뒤에도 발가락이 가렵다고 소리치는 부상병을 본적 있냐?"
"알겠어. 하여간 그래서?"
"...시간이 해결해 줄거야. 언젠간 .. 잊을거다...."
침울하게 고개를 숙여 리오를 바라보는 야크를 보자 나다는 울화통이 치밀어 견딜수가 없었다.
"이런 제길! 너같으면 잊을수 있어! 이것들이 우릴 갖고 놀고있어! 너 신룡이면 다야! 이 개새끼야!"
나다는 야크를 퍽 쳤지만 그는 막지 않았다.
"...나다, 그러지 말아요."
나다는 정신차린 리오에게 마구 욕을 퍼부어댔다.
"너 잘났다 이새끼야! 그래 너 천사표고, 너 성자다. 인자한 미소지으면서 다 용서하라구! 너혼자 순교하라구! 멍청한 새끼!"
"그동안 왜 말 안했냐, 리오야. 너 언제부터 그랬냐?"
침통한 야크의 질문에 리오는 고통속에서도 웃으려 애썼다.
"신경쓰지 마세요. 매일 그런것도 아니고, 그리고, 참을만 했거든요. 오늘은 제가 좀 무리했나봐요. 하하.. 으윽!"
리오를 퍽 친 나다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외쳤다.
"너 잘났다! 더이상 이런 꾸질꾸질한 꼴 보고싶지 않아! 난 간다! 난 내갈길 갈거라구!"
발딱 일어난 나다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나다! 어억!"
벌떡 몸을 일으키려던 리오는 가슴을 움켜쥐며 침대위에 몸을 구부렸다. 나다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침대로 냅다 달려가서 리오를 붙잡고 외쳤다.
"왜 그래! 정신차려!"
리오는 눈을 살며시 뜨더니 혀를 낼름 내밀었다.
"히히, 속았지요?"
"이 새끼가!"
"이제 보니까 광신도 집단이었군."
차가운 음성이다. 문밖에는 마크가 서있었다.
"무슨 소리냐?"
야크가 화난음성으로 물었다. 마크는 비아냥거렸다.
"가짜성자를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이라구. 흥."
순간 야크에게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맹수를 만난듯한 공포를 느낀 채 무릎을 꺾고 주저앉았다. 엄청나게 뿜어져나오는 살기에 모두 굳어져버렸다. 용맹한 드워프 드와인도, 여전사인 시케도 예외가 아닐 정도였다.
"이.. 버러지같은 인간이여... 내가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나다는 순간 처음 야크를 만났을때가 생각났다. 마을을 통채로 부수며 솟아오른 분노에 찬 적룡. 마을사람들을 모두 몰살시키려던 적룡. 나다는 정신없이 마크에게 외쳤다.
"도망쳐!"
"적룡 크리아미드!"
리오의 준엄한 외침에 적룡이 멈추었다. 마크 역시 적룡의 엄청난 살기에 놀라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차갑고 살기 가득한 기류가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리오가 방긋 웃었다.
"멈추세요, 야크님."
순간 긴장이 풀린 야크는 하,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크를 한번 노려본 뒤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야, 위대하신 백인족의 케이와이단 나으리. 야크 건드리지 마라. 그는 진짜 죽인다. 장난 같으면 지금 달려가서 건드려 보셔."
건들거리며 나다가 마크에게 충고했다. 마크는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로서는 처음으로 당해보는 공포였다. 신룡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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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배운대로 행동하는 아이들 (2)
우물 있는 곳까지 떨어져 나온 나다는 잠시 한숨을 쉬고 물을 먹으려했다. 우물가에서는 한 아이가 물을 먹고 있었다. 아이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던 나다는 파리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제대로 빵도 못 먹은 얼굴이다. 그 아이는 배가 고파서 우물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나다는 주머니에 쑤셔 박은 빵을 꺼냈다.
'어떻게 해야 자존심 상하지 않게 이걸 주나?'
첨벙! 두레박을 우물에 내린 아이는 물이 너무 많이 담겨 무거워진 두레박을 꺼내지 못하고 낑낑거렸다.
"어허? 너같이 쬐끄만 녀석이 어떻게 그걸 끌어올려? 못할걸?"
옆에서 약을 올리자 얼굴이 벌개진 아이가 화를 냈다.
"왜 못해? 할 수 있어!"
"그으래?"
나다는 주머니에서 빵을 꺼내 흔들었다.
"내 저녁 빵을 건다. 넌 못해!"
"이익!"
오기가 발동해 얼굴이 빨개진 아이는 열심히 두레박을 끌어올렸다. 낑낑거리며 겨우 끌어올린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나다를 쳐다보았다.
"이구 제길! 내 아까운 빵! 흑흑.."
나다가 억울한 척 하며 빵을 내밀자 아이는 허겁지겁 먹었다. 목이 막힌 아이에게 나다가 물을 주었다.
'천천히 먹어, 임마.'
빵을 다 먹자 나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아이에게 말했다.
"내 빵을 뺏아가다니, 널 용서할 수 없다. 내일 점심시간에 보자! 다시 내기를 걸어 이 모욕을 갚겠다."
아이는 자신감있게 외쳤다.
"얼마든지!"
나다는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폭 쉬었다.
'내일부터는 빵 두개를 더 싸와야겠군. 배고파라.'
다음날 마크 반의 수업에 들어온 리오는 사제복을 입고있지 않았다.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교탁 위에 올라선 리오가 쾌활하게 말했다.
"잘 들으세요. 나는 사제로서는 자격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신학에 대해서는 여러분보다 잘 압니다. 그러니 가르칠 수는 있지요."
리오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에게는 여러분들을 평가할 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제처럼 수업을 포기해버린다면 제가 어떻게 학생들의 실력을 평가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학생에겐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교과서를 펴십시오."
아이들은 온화하지만 단호한 리오의 태도에 기가 눌려 부시럭 부시럭 교과서를 편다.
"저는 이미 가정교사에게 신학의 이론을 많이 배웠습니다. 이 수업의 수준은, 저에겐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그럼 저는 나가도 되겠습니까?"
마크의 당돌한 말에 리오는 빙긋 웃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신학에서는 단지 책의 내용만 암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인내심과 성실성도 중요한 평가요소지요. 남을 향한 배려 또한. 그리고 제가 가르치는 내용과 평가할 내용이 마크군이 배운 것과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마크군이 잘못된 판단으로 자칫 낙제점을 받을까 우려되는군요."
마크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일이등을 다투는 마크에게 신학 낙제는 큰 타격이었다. 리오는 왠만하면 점수로 학생을 위협하는 짓따윈 하고싶지 않았지만 첫 수업때의 태도로 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리오가 무슨 말을 하건 무슨 태도를 보이건 마크는 또 나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크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다른 아이들도 모두 나갈 것이다.
일단 자리에 앉아있어야 다음에 뭘 하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자, 교과서를 펴십시오. 제가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신은 백인족을 세상의 지배자로서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 신 또한 백인의 모습이며 천사 또한 그러하다. 반대로 다른 종족들은 그 변이종에 불과하다. 그림이나 신화의 악마가 검은 피부이거나 백인종보다는 타 종족에 가까운 것을 예로 들수 있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며, 나머지 종족은 '유사인종'일 뿐이다 '유사'의 말뜻은,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다. 세상의 식물과 짐승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듯 유사인종들도 인간 즉 백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리오는 교재를 들고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학생들은 말을 멈춘 리오를 주시했다.
"교재를 어디까지 배웠나요?"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번은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범위를 정해 외운 다음 낭송하는 형식으로 그 동안 배우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딱딱한 목소리로 리오에게 말했다. 은연중에 '이렇게 배우고 있었으니 따르시는 게 맞지 않겠소?'라는 식이었다.
'외운다'라. 리오는 씁쓸히 웃었다. 사람을 세뇌시킬 때 외우고 암송하여 머릿속에 오래 남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미소를 지으며 리오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전 외우는 방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의 사랑은 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묻겠습니다. 학생들은 방금 읽은 문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학생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신학시간이란 그냥 계보를 외우고 교리를 외우는 형식이었지 그렇게 물어보는 교사는 없었다. 이타냐 종단의 교육방법은 전통적으로 무조건 외우는 것이었다. 교리에 대한 토론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다. 종단에서 정해놓은 경전의 해석 외의 해석은 '이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흥, 이단자..."
마크가 저주하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종단입장에서는 케이와이단의 교재 해석도 '이단'이었다. 리오는 마크를 보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마크군이 말해보십시오. 누구보다도 주관이 뚜렷해 보이는군요. 마크군이 이단자라고 부르는 저에게 명확히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을 겁니다."
마크는 자신있는 말투로 교재를 읽었다..
"[신은 백인족을 세상의 지배자로서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
마크가 그 구절을 읽는 동안 리오는 온화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다. 세상의 식물과 짐승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듯 유사인종들도 인간 즉 백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교재에 명시된 이 말은 경전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크군. 말을 잘라서 미안합니다만. 그 말은 경전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 교재를 만든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리오의 말에 마크의 얼굴이 잠시 벌개지다가 다시 경멸하는 눈빛이 되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흥, 경전은 고대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고대어의 해석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공용어로 옮겼을 경우 해석이 여러가지입니다."
그러자 리오가 그 부분에 해당하는 구절을 고대어로 읊었다. 기품있고 품위있는 발음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의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리오가 다시 아이들이 알아들을수 있는 공용어로 해석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시었다. 그리고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모든 만물에 위에 서되 지배하지 않으리라. 신과 천사의 모습을 닮았으되 육체를 말함이 아니라. 모든 종족은 이와 더불어 화친하리라."
리오는 진지한 얼굴로 마크를 보았다.
"이 대목입니다. 물론 고대어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엘프들의 언어에는 고대어가 많이 남아있고, 실제 나이 많은 엘프들은 인간들의 고대어를 기억합니다. 제가 견습사제시절 배운 고대어 외에도 엘프의 잃어버린 숲에서 엘프의 레이디에게 직접 배웠으니 이해석이 맞을 것이라고 봅니다. 적어도 지금 이 교재의 방식처럼 해석되지는 않습니다. 정통적인 해석방식으로도."
마크는 리오를 쏘아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리오가 다시 물었다.
"신학을 충분히 배웠다고 말했지요? 마크군. 고대어를 모르고서는 신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전 분명히 이 수업의 수준이 제게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고대어를 안다고하진 않았습니다."
"마크군은 내 수업을 들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대의 수준에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습니까?"
마크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부르르 떨다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비아냥거리는 듯 말했다.
"그럼, 우리에게 고대어라도 가르쳐 주시겠단 말씀입니까? 하, 우리는 모두 신학자가 되어서 졸업하겠군요?"
리오는 떼를 쓰는 아이를 보듯 마크를 보았다. 그리고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전공자가 아니면서 고대어를 익힐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제가 볼 땐..."
리오는 교재를 들어 보였다.
"이 교재를 보아하니 확실히 오역된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저작하신 분께서는 많은 심혈을 기울이셨겠죠. 하지만 마크군 말대로 학생들은 아직 어리고 전공자도 아닙니다. 그러니 종단에서 널리 인정받은 교리부터 배워야겠죠.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저자의 독특한 해석을 담은 책은 교리연구로서 전공자들이 개척해 나가야할 과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통이 아닌 독특한 견해더라도 여러 다양한 해석을 수업 중에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의견에도 맞지 않고 정통 교리에도 어긋나는 교재를 주 교재로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저도 여러 책을 보았지만 이 책의 해석이 가장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책을 가르쳐주실 생각이라면 그 또한 저는 다 배웠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내게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억지를 부리는 것은 마크였다. 리오는 여전히 감정의 동요없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마크군, 전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 그걸 가르치고 싶어요. 마크군이 가정교사에게 배운 것하고는 틀릴겁니다."
"그게 뭡니까? 어떻게 하면 '문.둥.이'의 성자로 불릴 수 있나, 그런 내용인가요?"
마크는 대놓고 리오를 비난했다. 그러나 리오는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다.
"제가 가르치고 싶은 것은 신의 사랑입니다."
"하, 신의 사랑이요? 당신이 신을 불러오실 건가요? 역시 당신은 대단한 성자님이시군요! 문둥이의 성자님이시여. 당신은 문둥이의 신이라도 불러오실 겁니까? 그의 대단한 사랑으로 우린 모두 문둥이가 되겠군요!"
아예 예의고 뭐고 포기한 듯, 마크는 신랄한 독설로 리오를 공격했다. 그런 마크를 씁쓸히 쳐다보던 리오는 시선을 돌려 모든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이 교리를 보았을 때, '신의 사랑'이란 관점에서 보았으면 합니다. 왜 제가 이 교재의 해석이 틀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시는지요? 마크군."
"당신은 이단이니까!"
마크의 외침에도 리오는 침착했다. 그는 다시 교재를 읽었다.
"[신은 백인족을 세상의 지배자로서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 신또한 백인의 모습이며 천사 또한 그러하다. 반대로 다른 종족들은 그 변이종에 불과하다. 그림이나 신화의 악마가 검은 피부이거나 백인종보다는 타 종족에 가까운 것을 예로 들수 있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며, 나머지 종족은 '유사인종'일 뿐이다 '유사'의 말뜻은,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인간은 백인뿐이다. 세상의 식물과 짐승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듯 유사인종들도 인간 즉 백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이 말에는 무엇이 담겨있나요. 지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이 해석 안에 신의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신은 오직 백인만을 사랑하실까요? 신께서 보시기엔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의 자식이십니다. 신은 백인도 황인도 흑인도 사랑하십니다. 신께서는 엘프도 드워프도..."
"그리고 문둥이와 이단자도 사랑하시겠죠."
마크의 말에 아이들은 깔깔깔 웃었다. 아이들의 분방한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 리오가 마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단자!"
마크가 외쳤다. 그러자 리오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리오는 마크의 눈에서, 쓰레기라며 어린 샤니를 불에 태웠을 백인병사의 눈을 보았다. 느낄 수 있었다.
'샤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리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엇을 보고 이단이라고 합니까? 제가 말한 것은 모두가 정통 종단의 교리입니다. 마크군이 말하는 이단의 정의란 무엇입니까?"
"당신같은 사람을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마크의 싸늘한 말에도 리오는 굽히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마크군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죠셉 대주교의 '신화와 역사'를 읽어보셨나요?"
"그게 당신이 이단인 것과 무슨 상관이지?"
"그럼 다음 장을 볼까요? [백인 이외의 것들은 오로지 백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유색인종은 백인의 하인으로써, 그리고 자비를 베풀 대상이다. 자비를 베품으로써 위대한 백인은 더한층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마크군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마크군은 많은 이들에게 자비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 '프랜신'님을 아십니까? 그분은 황인이십니다. 그럼 그에게 자비를 받은 백인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쓰레기지."
리오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마크군, 그분의 자비로 목숨을 건지신 분 중에는 이타냐의 성황이셨던 럼프킨 3세도 계십니다."
"....."
말문이 막힌 마크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고집스러웠다. 리오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분도 마크군의 눈엔 쓰레기로 보입니까?"
"쓰레기가 갱생했나보군요. 신의 자비죠."
리오는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눈을 뜨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크군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군요. 모른다는 것 자체는 클래스 수준상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 대해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정당한 지성인의 태도라고 보십니까?"
마크는 고집스럽게 시선을 교탁 밑으로 돌린 채 입을 다물었다. 다른 학생들은 조용했다. 누가 보더라도 마크의 패배는 자명했다. 마크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앉으세요 마크군. 내가 판단하기엔 마크군은 수업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크군이 그렇게 판단한다면 다음 수업부터는 나오지 마십시오. 시험만 본다면..."
"아니! 그럴 리가."
마크는 눈을 치뜨고 리오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그 위에서 얼마나 잘난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주겠어. 이단자의 혓바닥이 얼마나 유연하고 교활한지 더 알아야하니까!"
다시 조용해졌다. 리오는 마크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마크는 리오의 눈을 노려보다가 못볼 것을 본듯 흠칫했다. 고개를 돌린 그는 리오를 쳐다보지 못했다.
리오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조용히 뜨더니 교탁으로 돌아갔다.
"여러분에게 책을 추천하겠습니다. 미켈란 대주교님의 '신의 역사'입니다. 이 책은 초보자를 위해 대주교님께서 쉽게 쓰신 것이지요. 널리 통용되는 기초반 바이블입니다."
리오는 학생들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앞으로 수업은, 이 책으로 합니다."
"야, 잘했다 야."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리오에게 나다가 다가가서 물컵을 건네주었다. 리오는 목이 탔는지 급하게 마시다가 케켁, 하고 사래가 들렸다. 그는 입을 닦더니 나다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정말 힘들었어요. 히유..."
"잘했어 임마. 버벅거리는 것 밖에 모르는 줄 알았더니 말도 꽤 잘하더라."
"헤헤. 흥분했었나봐요. 그리고 어제 나다랑 열심히 연습했잖아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막나갈 줄은 몰랐잖아."
리오는 말없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다가 리오를 재촉했다.
"빨리 가서 다음에 애들 배울 거 연습하자. 아직 넌 익숙하지 않으니까 준비가 철저해야 애들 앞에서 안 떨릴 거야. 그리고 말이야, 아까도 너무 말을 어렵게 했다구. 넌 쉽게 한거라고 하지만 여긴 대학 강단이 아니야 자식아. 용어를 말야 좀..."
나다는 걸어가면서도 계속 리오에게 잔소리했다. 리오는 교사생활 선배인 나다의 말을 진중한 얼굴로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 앞에서 너무 큰소리로 목을 쓰면 목이 쉬어서 나중엔 수업할 수 없다는 둥, 시간을 잘 재어가면서 수업해야지 아니면 수업할 내용이 너무 빨리 끝나거나 미처 진도를 못 나간다는 둥, 가끔 쉬어가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해야지 아이들이 너무 수업만 하면 지친다는 둥..........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다음날 리오는 오자마자 교장실로 호출되었다.
"아이들을 상대로 책을 강매했다구요?"
교장은 굳은 얼굴로 리오를 보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학부모들이 사제님을 지목했습니다. 사제님께서.. 교과서를 바꾸셨다구요."
리오는 시인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사제님은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리오는 조용히 교장을 바라보았다. 교장은 리오의 눈을 맞받아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이해해주십시오, 사제님. 케이와이단의 입김은 막강합니다. 그들에게 거슬린다면 평민학교는 문을 닫아야 할겁니다."
"그러니까, 문제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과서를 바꾼 것? 책을 강매했다는 것?"
"둘 다입니다."
리오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아이들에게 책을 나누어준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군요."
"네?"
"이 도시에선 이제 이런 책 팔지 않습니다."
서점주인이 말했다.
"무슨 말이유? 그거 흔한 책인데."
나다의 말에 서점주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케이와이단 발행 책이 아니면 이젠 취급할 수 없어요. 저도 먹고살아야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나다는 어깨를 으쓱한뒤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쩔거니? 리오."
리오는 빙긋 웃었다.
"만들면 돼요!"
'아이구 내 팔자야. 아이구 내 손꾸락이야.'
그날 그날 수업에 맞춰, 책을, 그것도 똑같은 내용을 수십 장 베끼려니 나다는 손가락이 다 얼얼했다. 리오는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책을 베꼈다. 그 두꺼운 책을 다 베낄 순 없다. 그래서 수업에 맞춰 중요한 부분을 몇 장씩 베꼈다. 베낄 부분은 리오가 줄을 그어놓았다.
"야, 우리가 학교에 들어간 건 위장술이라구 위장술. 너 목적을 잊어버린 거 아니야? 이렇게 까지 할 필요 있니?"
나다가 투덜거리자 리오가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커서는 바로잡기 힘들어요. '피의 도서관'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런 잘못된 교육 탓입니다."
그러더니 리오는 나다의 글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나다 글씨가 참 멋지군요."
'으이구, 내 팔자야.'
밤새 글을 베낀 리오는 낮에도 학교에서 쉴새없이 베꼈다. 시케와 야크 그리고 수도사들도 열심히 베껴서 다음날 아침엔 꽤 많이 베꼈다. 모두들 손가락이 퉁퉁 부었다. 리오는 일일이 다 감사하며 고마워했다. 다들 눈이 빨갛게 되어서 리오의 인사를 받았다.
리오와 나다는 베낀 종이들을 이고 지고 등에 메어서 가져갔다. 나다는 마음이 흐뭇했다. 리오도 좋은지 싱글벙글 미소짓고 있었다. 야크와 시케는 이미 수업을 하러 아침 일찍 나갔다. 밤새 잠도 못 자고 바로 수업에 나가서 피곤할 것이다. 부상당한 드와인은 계속 설계도를 그리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드와인님.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그럼 다녀오지요!"
쾌활하게 인사한 리오는 나다와 함께 수도원을 나섰다. 날은 점점 더 더워지고 있었다. 학교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길게 느껴졌다. 종이의 무게는 대단했다. 나다는 작은 수레라도 끌고 올걸, 하며 투덜거렸다. 리오는 학교로 들서어서는 고풍스러운 정문이 보이자 다행스러움을 느끼며 빨리 걸었다. 아무리 만사 헤헤거리는 리오라지만 나다의 투덜거림은 솔직히 듣기 좋지만은 않았다.
"어?"
앞장서던 리오가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학교 옆 골목을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다는 의아해서 리오의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골목어귀에 한 학생을 둘러싼 학생들이 보였다.
"마크?"
리오와 나다는 학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야, 마크. 오랜만이다?"
미끈하게 생긴 검은머리의 비아냥 어린 말투다. 그러나 마크는 자신을 둘러싼 덩치들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난 학교에 가야한다. 비켜라."
마크의 말에 미끈이가 픽, 웃었다.
"평민주제에 건방지구나! 백인이라구 다 같은 줄 아니? 난 귀족이다. 존대하란 말이다!"
"백인이면 다 똑같아. 백인은 평등해."
"웃기는 자식!"
미끈이가 마크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마크가 머리를 슥 기우뚱하자 미끈이의 주먹은 벽을 강타했다.
"으아악!"
덩치들이 마크에게 덤벼들었다. 그때 앞으로 나서려던 리오를 나다가 막았다.
"가만있어봐. 지금 껴들면 마크는 오히려 싫어할 거야. 아이들은 저들끼리의 법도가 있는 거니까."
마크는 덩치들의 약점을 오히려 이용했다. 좁은 골목에서 녀석들은 덩치만으로도 꽉 찼다. 마크는 몸을 이리저리 재빠르게 놀리며 그들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주먹을 날리면 덩치들은 일어나질 못했다.
"이야, 정말 대단한데?"
나다는 감탄했지만 리오는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했다.
칙!
"너...."
마크의 어조가 살벌해졌다. 미끈이는 진검을 꺼내들었다.
"나, 난 귀족이다! 평민따위, 죽여도 상관없어!"
미끈이는 벌벌 떨면서 겨우 그 대사를 마쳤다. 진검이 나왔으니 이미 뒷골목 아이들싸움이 아니었다. 미끈이가 마크에게 덤벼들었다. 마크의 몸은 확실하게 둔해졌다. 진검이 날아오는 것과 목검이 날아오는 것은 틀리기 때문이다.
"학생들! 그만 멈춰!"
리오가 나다의 손을 뿌리치고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 미끈이와 덩치들이 잠시 칼을 멈추고 리오를 쳐다보았다.
"학생들 무슨 짓입니까? 칼을 거두세요!"
"당신 뭐야?"
미끈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크도 거친 숨을 내쉬면서 외쳤다.
"가짜성자, 비켜! 이건 내 싸움이야!"
하지만 리오는 마크 앞에 보호하듯이 섰다. 그리고 별 설득력 없는 내용의 말을 했다.
"싸움은 안돼.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은 안돼!"
"흥, 마크. 선생 뒤에 쥐새끼같이 숨었구나. 얘들아, 가자!"
미끈이가 사라지자 리오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마크, 괜찮니? 아,"
마크는 리오가 들고 있던 두툼한 종이뭉치를 탁 져서 바닥에 흩뿌리며 험하게 외쳤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뭔데 이따위 짓을 하는 거야!"
바닥의 종이뭉치를 거칠게 발로 찬 뒤 마크는 학교로 뛰어갔다. 리오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밤새 베꼈던 종이를 주웠다.
'윽, 왠지 처량해 보인다.'
나다도 옆에 붙어서 종이를 주웠다. 그리고 거 보란 듯이 말했다.
"거봐, 껴들면 싫어할 거랬지. 으이구!"
종이의 흙을 탁탁 털어낸 뒤 리오와 나다는 학교로 들어갔다.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가맣게 모여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는 시케와 야크가 검을 들고 한창 대련 중이었다.
창, 챙!
시케와 야크가 맡은 반의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운동장에 나와있었던 모든 학생들이 둥그렇게 모여 섰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도 노골적으로 상체를 밖으로 내밀고는 열심히 구경했다. 심지어 선생들도...
시케의 동작은 여자임에도 상당히 박력있고 절도있었다. 야크는 힘이 넘쳤지만 왠지 서툴었다. 그는 서방검술의 동작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학생들한테 동방검술을 가르쳐줄 순 없는 일이었기에 며칠 전에 시케에게 배워둔 것이다. 야크가 전투 시 검을 휘두를 때 얼마나 거칠면서도 물 흐르듯 부드러운지 아는 나다는 비록 지금 동작도 훌륭하지만 약간의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엔 방금 달려 들어오던 마크도 구경꾼으로 서있었다. 마크는 홀린 듯이 두 사람의 대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그의 시선은 시케의 한동작 한동작을 놓칠세라 따라다니고 있었다. 검술을 모르는 나다였지만 시케의 동작이 멋있다는 것쯤은 알수 있었다. 입을 딱 벌린 나다를 보고 리오가 웃었다.
"자, 얘들아. 이게 바로 검사의 기본동작인 '18 무'야. 지금 우린 기본동작만으로 대련한 거야."
검을 멈춘 시케는 야크와 공손히 인사한 뒤 아이들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이제 알겠니? 멋있는 기술도 물론 좋지만, 기본동작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단다. 그리고 또 알아둘 것은, 기본동작이 정확치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기술을 익혀도 모래 위의 성이란 거지."
아이들에게 설명하던 시케는 뒤에서 구경하던 리오와 나다를 보고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리오도 함박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마크는 음울하게 그를 쏘아보았다.
자신의 교실로 돌아온 리오는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이걸 다 베꼈어요?"
아이들은 웅성거렸다. 리오는 다 나누어준 뒤 수업을 시작했다.
나다는 다시 우물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고픈 배를 우물물로 채우려고 아이가 또 나타난다.
"어? 당신은.."
"음, 난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라서. 다시 한번 붙어보자!"
나다의 말에 아이는 다시 얼굴을 발그레하게 상기시키며 주먹을 쥐고 외쳤다.
"얼마든지!"
"음... 넌 구구단을 못 외울 거야. 한번 외워봐!"
당연히 외울 줄 알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우물쭈물거렸다.
"음... 넌 구구단의 이단을 당연히 못 외울 것이다! 내가 내기한다!"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다시 조그만 주먹을 쥐며 외쳤다.
"당연히 외우지! 음..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아이는 더듬거리며 이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다는 짐짓 이마를 찌푸리고 뺨에 손을 괴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 팔에 십..십..."
소년은 손가락에 발가락까지 이용해가며 쩔쩔 맸다. 나다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허억! 이 팔에 십 육, 이 구 십 팔이라는걸 넌 모를 것이다!"
아이는 방그레 웃었다. 이제 아이도 눈치를 챘다. 나다는 아이와 빵을 나눠먹으며 물었다.
"이름이 뭐니?"
"스코트."
"나 밥 혼자 먹는 게 무지 쓸쓸한데, 나랑 같이 먹어줄래?"
스코트가 머뭇거렸다.
"난 백인인데?"
나다의 좋던 기분이 확 나빠졌다. 목에 빵이 걸렸다. 스코트는 여전한 말투로 하대하며 나다에게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러지 마. 형들이나 선생님한테 들키면 너나 나나 죽어."
"뭐야?"
"난 가난해도 백인이야."
빵을 다 먹은 스코트는 발딱 일어나더니 우월감과 자존심이 가득한 눈으로 앉아있는 나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건물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나다는 먹던 빵을 집어던지고 발로 우물을 쾅 찼다. 그러다가 미끄러질 뻔했다.
매일같이 책을 베끼느라 리오는 잘 새가 없었다. 도와주는 것도 정도껏이지. 나다는 며칠 도와주다 포기하고 괜히 설계도 보는 드와인에게 찝쩍거렸다.
"빨리 해, 빨리!"
"이익! 이봐 나다, 이건 우리 선조의 걸작이야! 그렇게 쉽게 파악될 거 같나?"
"흠."
책을 베끼던 리오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웃었다. 나다는 베끼는 게 너무 지겨웠다.
그런데 둘을 바라보던 리오의 표정이 변했다. 무엇을 보았는지 리오는 펜을 던지고는 밖으로 화급히 나가버렸다. 나다는 리오를 쫓아갔다.
'무슨 일이지? 우리 뒤쪽엔 벽하구 창문만.. 아하, 창문. 뭘 봤나?'
리오와 나다는 어두운 수도원 벽을 따라 달려갔다. 수도원 옆의 숲으로 한참 들어가자 빛이 보였다. 마크와 또 그와 싸우던 미끈이가 보인다. 그런데 그 미끈이 옆에는 웬 기사가 같이 있었다.
"도련님, 이 녀석이 그 건방진 평민녀석입니까?"
"그래, 혼 좀 내줘. 꼴에 마크 탤보트랜다. 평민주제에."
마크는 힘들게 웃었다. 그리고는 긴장되는지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저 녀석의 아비는 케이와이단의 주요인물입니다. 그냥 혼내줘서는 말썽이 크겠지요 그렇지만..."
음흉한 기사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죽여버린다면 상관없지요. 실종은 흔한 일이니까... 혹은, 가출이라던가."
마크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평민주제에, 검술시합에서 날 제치다니. 기분 나쁜 녀석! 원래 우승은 귀족에게 넘겨주는 거, 넌 몰랐냐?"
"그래서 더럽게 날 협박했지. 너 같은 녀석은 용서 못해."
냉정을 되찾은 마크가 흔들림 없는 말투로 당당하게 말했다. 리오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았다. 나다가 말릴새도 없이, 리오는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
"멈추십시오, 기사님! 어린아이를 상대로 이 무슨 짓입니까?"
갑작스런 리오의 출현에 기사는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어둠속에 숨어있는 나다를 보지 못한 그는 주위에 리오뿐이란 걸 알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사제 나으리. 당신은 영주님에게 반항하는 종단의 사제... 그리고 여긴 인적없는 숲속이오."
그는 얼굴을 험악하게 하며 리오를 협박했다.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당신을 베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나 리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는 표정으로 기사에게 말했다.
"전 눈하나 깜짝않고 그대에게 베일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사는 흠칫 놀랐다. 그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은 리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 기사는 칼을 내렸다.
"...갑시다, 도련님."
"무, 무슨소리야! 다 해치워버려!"
"저 사람이 누군지 아신다면 그렇게 말씀하지 못하실겁니다. 가시지요."
"감히 내 말을 거역하다니!"
기사는 몸을 돌려 자신의 상전을 바라보았다. 그의 무서운 시선에 미끈이는 움츨 쫄아들었다.
"아버님이신 쏜튼 와일더 장군께서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미끈이, 아니 와일더 장군의 여섯째 아들인 프란스 와일더의 몸이 비틀거렸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앞서가는 기사를 따라가며 계속 애원했다.
"아버지한테 이르면 안돼! 알았지?"
"...."
프란스 와일더와 그의 경호원들은 꽁지빠진 개처럼 마크에게 으르렁거리며 기사의 뒤를 따라갔다. 나다는 '도대체 쏜튼 와일더가 누구지?' 하며 곰곰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괜찮니? 마크!"
리오의 걱정스런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마크가 픽 쓰러졌다. 피가 줄줄 흐른다. 끌려오기 전에 기사에게 당한 것이다. 마크가 아무리 뛰어난 아이라도 맨손으로 정식기사를 당할 수는 없었다.
"아! 쏜튼 와일더! 리오, 널 사드의 손에서 구해준 그 장군이잖아! 거 있잖아 독실한 신자라던..."
"나다, 지금 그런건 중요치 않아요! 이 피좀 보세요! 빨리 옮겨야 된다구요!"
"이런 건강이 지나치다 못해 건방진 놈이 피좀 흘렸다고 뭐 어찌 되겠냐. 거 참 그 쏜튼 와일더인가 하는 장군이 자식농사 하나는 망쳤구만. 어찌 그런 사람에게 저런 자식이 있을까나. 헐."
"나다! 빨리 마크를 데려가자구요!"
"야, 그리고 말이야, 아까 그 기사가 널 찔렀으면 어쩔려구 그랬어? 빅터주교 치유력 강하다고 아예 배 째라냐? 목 잘리면 빅터주교가 아무리 치유력이 강해도 널 살려줄수 있을거 같아? 이 간이 배밖에 나오다 못해 반찬으로 먹을 놈아! 죽을려고 환장한 놈아! 뭐, 베여도 눈하나 깜짝 안 해? 자랑이다 그래. 에라이 이 아메바 같은 놈아!"
"나다, 제발!"
리오가 난생 처음 나다에게 짜증을 내자 나다는 흠칫 놀랐다. 그는 중얼중얼 욕을 해대며 리오와 함께 마크를 들어올렸다. 두사람은 건장한 마크를 끌고 낑낑거리며 수도원으로 데려갔다. 그것을 보고 시케가 놀라서 뛰쳐나왔다.
시케의 치유마법에 마크는 정신이 서서히 드는지 신음했다. 그는 자신의 몸 위로 고개를 숙인 시케를 보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시케가 뒤로 물러서고 리오가 나서서 물었다.
"마크, 이젠 괜찮아요. 도대체 무슨...."
기분이 나빠진 마크가 싸늘하게 답했다.
"내가 왜 당신에게 설명해야 하지?"
'이런 건방진 녀석!'
나다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야크가 먼저 말했다.
"싸가지 없는 말투가 나다 못지않군그래."
'으윽.'
리오는 마크의 말투도 아랑곳않고 말했다.
"오늘밤은 자고 가요. 위험하잖습니까."
"흥, 내가 왜.."
"자고 가요, 마크."
시케가 말하자 얼굴이 붉어진 마크는 가만히 굳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 마크에게 자신의 방을 넘겨준 리오는 나다의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다른 수도사들이 대부분 피신한 탓에 방이 많이 비어있었지만 한밤에 다시 방을 치우고 정리하는 법석을 떨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다의 방은 침대가 두개니까 리오가 나다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밤이 늦어갈 무렵까지 리오는 자지않고 계속 책을 베꼈다. 나다는 불빛때문에 상당히 귀찮았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눈치를 줘보지만 리오는 끄덕도 않았다.
'저럴땐 정말 얄미워. 으이구...'
깜빡 잠이 든 나다는 꿈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한참 맛난 음식을 시식하려던 나다에게, 갑자기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윽...."
나다는 비몽사몽 생각했다.
'으음.. 이게 뭐지. 내가 악몽꾸나?'
"윽...윽....우욱..."
정신이 퍼뜩 든 나다는 벌떡 일어났다. 신음소리는 옆에서 나고 있었다. 온몸을 조그맣게 오그린 리오는 침대 시트를 꽉 그러쥔 채 보기에도 고통스럽게 몸을 꿈틀거렸다. 식은땀을 어찌나 흘리는지 침대가 흥건하게 젖었다.
"야, 왜이래, 정신차려!"
"으..윽... 사드.... 그만.. 제발..."
"시케, 시케엣!"
곧 주교와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평소 시케나 드와인은 적이 올까 경계하느라 옷을 제대로 갖춰입고 자서 멀쩡히 뛰쳐나왔지만 빅터주교 외 수도사들은 잠옷을 입은 채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하지만 부끄럽고 자시고 할것없이 빅터주교는 괴로워하는 리오의 이마에 손을 댔다. 빅터주교가 흠칫했다. 마음이 급한 나다가 험하게 질문했다.
"왜 그래?"
"...성자님께서 큰 충격을 받으신적이 있나요? 아니면..."
"아주 끔찍한 일을 당했었다우."
나다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야크가 무겁게 말했다.
"아무래도.. 후유증같다."
"무슨 소리야?"
야크는 기운없이 말했다.
"나다야. 비록 새롭게 몸을 회복시켜줬지만, 리오의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리오의 무의식도. 기억하고 있다. ...고통을."
"그게 무슨 헛소리야?"
"예가 될 진 모르겠지만 발이 잘린 뒤에도 발가락이 가렵다고 소리치는 부상병을 본적 있냐?"
"알겠어. 하여간 그래서?"
"...시간이 해결해 줄거야. 언젠간 .. 잊을거다...."
침울하게 고개를 숙여 리오를 바라보는 야크를 보자 나다는 울화통이 치밀어 견딜수가 없었다.
"이런 제길! 너같으면 잊을수 있어! 이것들이 우릴 갖고 놀고있어! 너 신룡이면 다야! 이 개새끼야!"
나다는 야크를 퍽 쳤지만 그는 막지 않았다.
"...나다, 그러지 말아요."
나다는 정신차린 리오에게 마구 욕을 퍼부어댔다.
"너 잘났다 이새끼야! 그래 너 천사표고, 너 성자다. 인자한 미소지으면서 다 용서하라구! 너혼자 순교하라구! 멍청한 새끼!"
"그동안 왜 말 안했냐, 리오야. 너 언제부터 그랬냐?"
침통한 야크의 질문에 리오는 고통속에서도 웃으려 애썼다.
"신경쓰지 마세요. 매일 그런것도 아니고, 그리고, 참을만 했거든요. 오늘은 제가 좀 무리했나봐요. 하하.. 으윽!"
리오를 퍽 친 나다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외쳤다.
"너 잘났다! 더이상 이런 꾸질꾸질한 꼴 보고싶지 않아! 난 간다! 난 내갈길 갈거라구!"
발딱 일어난 나다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나다! 어억!"
벌떡 몸을 일으키려던 리오는 가슴을 움켜쥐며 침대위에 몸을 구부렸다. 나다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침대로 냅다 달려가서 리오를 붙잡고 외쳤다.
"왜 그래! 정신차려!"
리오는 눈을 살며시 뜨더니 혀를 낼름 내밀었다.
"히히, 속았지요?"
"이 새끼가!"
"이제 보니까 광신도 집단이었군."
차가운 음성이다. 문밖에는 마크가 서있었다.
"무슨 소리냐?"
야크가 화난음성으로 물었다. 마크는 비아냥거렸다.
"가짜성자를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이라구. 흥."
순간 야크에게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맹수를 만난듯한 공포를 느낀 채 무릎을 꺾고 주저앉았다. 엄청나게 뿜어져나오는 살기에 모두 굳어져버렸다. 용맹한 드워프 드와인도, 여전사인 시케도 예외가 아닐 정도였다.
"이.. 버러지같은 인간이여... 내가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나다는 순간 처음 야크를 만났을때가 생각났다. 마을을 통채로 부수며 솟아오른 분노에 찬 적룡. 마을사람들을 모두 몰살시키려던 적룡. 나다는 정신없이 마크에게 외쳤다.
"도망쳐!"
"적룡 크리아미드!"
리오의 준엄한 외침에 적룡이 멈추었다. 마크 역시 적룡의 엄청난 살기에 놀라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차갑고 살기 가득한 기류가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리오가 방긋 웃었다.
"멈추세요, 야크님."
순간 긴장이 풀린 야크는 하,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크를 한번 노려본 뒤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야, 위대하신 백인족의 케이와이단 나으리. 야크 건드리지 마라. 그는 진짜 죽인다. 장난 같으면 지금 달려가서 건드려 보셔."
건들거리며 나다가 마크에게 충고했다. 마크는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로서는 처음으로 당해보는 공포였다. 신룡의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