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완결)장편-프리즘

[프리즘] 1부 7장 백인만을 위한 세상 (3)

리오나다 2009. 12. 3. 20:47
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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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백인만을 위한 세상 (3)





영주의 성으로 떠난 주교와 반은 한참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들 초조히 그들을 기다렸다.

"빅터주교님!"

정문 쪽에서 젊은 수도사의 반가운 외침이 들렸다. 일행은 우루루 몰려갔다.
문밖에는 빅터주교가 서있었다. 그런데 반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빅터주교의 얼굴은 파리했다.

'표정은 왜 저렇게 얼빠져있지? 어떻게 된거야?'

나다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리오가 가장 먼저 달려가 빅터주교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된.... 엇?"  

빅터주교의 손에 반짝이는 것, 그것은 단도였다. 주교는 단도를 리오에게 휘둘렀다. 옆에 있던 시케가 재빠른 몸놀림으로 리오를 밀쳐냈다. 그러나 리오와 빅터주교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기에, 리오는 칼에 어깨를 찔렸다. 빅터주교는 칼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힘차게 휘둘러지는 손에서 윙윙 소리가 들려올만큼 그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시케는 방어도 하지 않고 리오의 위에 무조건 엎드렸다. 빅터주교의 칼이 무자비하게 시케를 유린했다.
그것은 모두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빅터주교를 말리기 위해 뛰어들었다. 수도사들은 목숨을 걸고 시케의 몸 위에 난도질하는 주교의 팔다리는 잡으려 했다. 드와인은 괴성을 지르며 빅터주교에게 덤벼들었다. 나다는 괴물같은 빅터주교의 힘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이 어이없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가장 믿음직한 야크를 황급히 찾아보았으나 나다의 시야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또 돼지처럼 잠만 자고 있는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나다가 야크 욕을 하는 동안 수도사들이 튕겨져 나왔다. 칼에 맞은 수도사는 비명을 질렀다. 드와인은 깊은 부상을 입은 터라 힘을 쓰지 못하고 빅터주교의 발에 채여 나뒹굴었다. 여러 수도사와 한명의 드워프를 뿌리친 빅터주교는 다시금 피에 젖은 단도를 들어 시케의 등을 난자하려 했다.

"시케! 비켜요!"

리오는 자신을 감싼 시케의 얼굴을 보며 피를 토하듯 외쳤다. 그는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뛰어난 용병이었던 시케의 손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시케의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미미하게 떨리며 달싹거렸다. 그녀의 피가 리오의 얼굴에 가슴에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시케의 어깨 너머 빅터주교는 다시금 단검을 쳐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나다가 빅터주교의 등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주교는 잠시 비틀거렸지만 곧 멀쩡히 우뚝 선다. 그의 푸른 얼굴이 나다를 향하자 나다는 가슴속 깊이 얼어붙는듯한 공포를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드와인이 힘껏 돌맹이를 던졌다. 눈두덩에 돌을 맞은 빅터주교는 얼굴을 한껏 이그리며 짐승같은 괴성을 질렀다. 그는 거칠고 재빠르게 드와인을 향해 다가갔다.
퍽!
그순간 나다는 눈을 꼭 감았다. 작지만 용감한 이 드워프가 처참하게 죽는 꼴을 보고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려와 그는 눈을 떴다. 조금전의 소리는 빅터주교를 쓰러뜨린 야크의 주먹소리였다. 방금 낮잠에서 깨어나 덜깬 눈을 한 야크가 빅터주교의 멱살을 잡아올리고 있었다.

"얏호! 넌 우리의 영웅이야!"

저도 모르게 한 소리 지껄인 나다는 순간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에 놀라 얼굴이 벌개졌다. 다른 수도사들도 나다처럼 신난다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자신들의 상전인 빅터주교가 얻어맞고 쓰러진 터에 그렇게 좋아할수는 없었다. 야크를 칭송해줄만한 떠벌이는 나다 뿐이었다.
하지만 야크는 이런 류의 떠벌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웃기네! 하는 표정의 야크를 보고 나다는 심한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주먹과 야크의 주먹을 비교해보고는 슬그머니 리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케!"

리오의 주변은 피로 얼룩져있었다. 리오는 시케를 끌어안고 어쩔줄 몰라 그녀의 이름만 계속해서 불렀다. 그의 어깨에도 피가 분수처럼 솟았지만 시케의 상처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도사들이 황급히 달려가 치유를 걸었지만 그들의 레벨은 몹시 낮았다. 지혈도 거의 되지 않았다. 수도사들은 리오의 품에서 시케를 떼어내 응급실로 데려갔다. 리오는 멀어져가는 그들의 모습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피가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걸어가는지 기어가는지도 모르게 그는 시케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아갔다.
리오의 뒤를 따라가려던 나다는 야크가 빅터주교를 때려 죽이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여 달려갔다. 야크는 쉬임없이 빅터주교를 두들겨 팼다. 땅바닥에 빅터주교를 내팽겨친 야크는 번개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팔을 뒤로 꺾어잡았다. 수도사들은 이번엔 야크의 발에 차여 나뒹굴었다. 나다는 야크의 이름을 마구 외쳤다.

"야크, 야아! 야! 임마!"

"감히 이 새끼가 내 동료를!"

"이봐, 이봐! 제정신이 아니잖아! 야크! 이 덜떨어진 신룡아! 저새끼 얼굴봐! 저게 사람 얼굴이냐?"

빅터주교의 얼굴은 이미 그의 형상이 아니었다. 푸르죽죽한 얼굴, 흰 동자만 보이는 눈, 이빨에는 송곳니가 기다랗게 솟았고, 그의 목소리도 거칠게 쉬어있었다. 팔이 꺾여 비틀어져 부러질 상황이었지만 괴물같은 얼굴의 빅터주교는 악의적으로 웃으며 외쳤다.

"죽어라! 죽어라! 열등한 생물들! 죽어라!"

"주교님!"

수도사들은 벌벌 떨며 어쩔줄 몰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 한번 죽어봐라 잘난 생물아. 너 잘났다."

차분하고 냉정한 음성과 달리 야크의 붉은 머리털은 불꽃처럼 솟아올라 있었고 귀뿌리까지 분노로 시뻘개져 있었다. 검붉은 눈에는 번개가 튀어오르는듯 했다. 그가 빅터주교의 목을 부러뜨리려 발에 힘을 주자 나다가 비명지르듯 외쳤다.

"이새끼야! 니가 주교를 죽여버리면 리오는 어떻게해! 너 리오 죽는 꼴 보고 싶어!"

동작을 멈춘 야크는 묵묵히 주교를 꽁꽁 묶었다. 나다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응급실로 달려갔다.



"야! 시케는 어때? 이게 무슨 일이야?"

응급실 문을 벌컥 연 나다는 할말을 잊었다. 하얀 침대는 이미 붉게 물들었다. 수도사들은 난자당한 시케의 몸에 계속 필사의 기도를 했지만 그들의 치유력은 시케를 살릴수 없었다. 단지 죽음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늦출 뿐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의식을 약간 차린 시케는 창백한 입술을 달싹이며 리오를 찾았다. 리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시케, 시케... 정신차려, 아, 이럴 순 없어. 이렇게 떠날 수 없어.. 당신은 날 이렇게 떠날 수 없어..."

나다의 찢어졌던 심장이 다시금 쿵쾅거리며 뛰었다. 빅터의 칼날에서 리오를 감싸던 시케가 힘없이 달싹인 입술의 의미를 나다는 알고 있었다.
사랑해요
평소 같으면 정말 싫은 소리다 라고 느꼈을 그 말이, 찢어졌던 심장의 상처를 들쑤시고 있었다. 떠돌이 나다는 리오보다 훨씬 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일년동안 누워있던 리오를 수발했던 그녀의 마음을, 그가 다시 일어나 걸을때 느꼈을 그녀의 기쁨을, 그리고 정식 사제인 리오를 옆에서 바라만 보았던 그녀의 그리움을.
기나긴 헤어짐 끝에 다시 만난 저 멍청한 성자의 입에서, 영원히 함께 있어 달라는 이야기가 나온지 이제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녀의 사랑이 이제야 조금씩 열매를 키워 가려 할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신차려 이 새끼야! 너 다시 한번 문둥이 마을에서럼 해봐, 그놈의 번쩍거리는 빛 뿜으라고! 살려내!"

나다의 날카로운 외침에 리오는 고통스럽게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무릎꿇고 머리숙여 기도하는 듯한 자세가 된 리오는 고통을 쥐어짜내는 듯한 신음으로 나다에게 답했다.

"나..난... 나에게는 신성마법능력이 없습니다..."

나다는 할말을 잊었다. 그도 알고 있었지만 억지를 쓴 것이다. 일별의 빛은 리오의 의지로 나온것이 아니었다. 어릴때 잃어버린 신성마법 능력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해도 지금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지금의 리오는 그녀를 살릴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시케.. 나도 죽을래요... 시케가 죽으면 나도..."

저런 멍청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니! 나다는 너무나 화가 나 리오를 그만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퍼뜩 어떤 생각이 나다의 머리를 스쳤다.

"빅터주교는 치유력이 뛰어나서 젊은 나이에 주교가 된 거라면서. 리오! 내말 듣고 있어?"

듣고 있지 않았다. 리오는 벌써 뛰쳐나가고 없었다.

"야, 리오! 같이 가!"



팔다리가 꽁꽁 묶인 빅터주교는 여전히 악귀와 같은 형상으로 킬킬거렸다.

"다 죽일 거다.. 다 죽일 거야... 열등한 생물들... 크하하!"

야크는 머리를 저었다.

"저거 어떻게 떼어내지? 완전히 악령에 씌였구만."

콰당! 문이 열리며 눈물과 피에 범벅이된 리오가 뛰어들어왔다. 슬픔과 분노로 리오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리오의 붕 뜬 의식은 방안을 마구 휘저어 보다가 드디어 빅터주교를 발견하고 성급히 뛰어들었다. 나다는 기겁하여 리오를 붙잡았다.

"야, 저놈 괴물이야! 가까이 갔다간 좋은 꼴 못당한다!"

응급조치로 막아놓은 리오의 어깨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솟아올랐다. 그러나 리오는 아픔을 인식하지 못했다.

"주교님! 시케를 살려주세요, 아니야! 살려내야돼! 살려 내야만 돼!"

나다는 황당했다. 리오는 나다의 손을 뿌리치고 무릎꿇어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이봐, 성자나리. 너같이 형편없는 녀석이 무슨 성자냐?"

악귀가 된 빅터주교는 차갑게 리오를 비웃었다.

"뭐든지 다 할테니... 시케를 살려주세요!"

"뭐든지 다 하겠다?"

악귀는 휘파람을 불며 흥미로워했다. 여유를 찾은 악귀는 아하, 하며 고개를 꼬아 돌린 후 눈동자만 돌려 리오를 보았다.

"아참, 그렇지. 넌 신성마법도 할줄 모른다면서? 나에게 그 여자를 고쳐 달라고 애원을 하는 건가."

"애초에 당신이 죽이려 한 것은 나이니.. 나를 죽이고 그녀를..."

"정말 구역질 나는군!"

빅터주교는 핏대를 세우며 리오를 향해 외쳤다.

"그녀대신 나를 죽여달라? 희생?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원하겠다? 너 같은 것들때문에 문둥이 같은것들이 아직도 남아있는거야. 넌 쓰레기다. 아니, 넌 쓰레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괴물에 불과해!"

악귀가 된 빅터주교가 거칠게 비꼬았다.

"약하디 약한 쓰레기들을 추켜세워주고 그런 쓰레기들도 존재가치가 있는 양 세상을 속이지. 그런 쓰레기들은 해주면 해줄수록 너의 피와 살과 골수를 빨아먹으려 덤빌거야. 넌 그들을 돌보며 자기 만족에 빠질테지만 주고 주고 주고 또 주다 못하면 넌 괴롭다고 난리를 치겠지. 하지만 소용없어, 그들은 너를 바싹 말라 죽을때까지 빨아먹을거야. 넌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면서 신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난 이렇게 희생적이고 성스러워.' 그러면서 넌 은근히 신에게 거래 명세표를 내밀거야. 이보시오 신, 난 이만큼 했소. 이제 그만큼의 천국을 내놓으시지. 하!"

그 때 빅터주교는 무언가에 흠칫 놀랐다. 그의 얼굴모양이 원래대로 바뀌려 한다. 그는 괴로워하며 신음했다.

"으...으윽... 아니야,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모두들... 으, 윽... 비켜요... 나가라 사악한 악령이여!"

그러나 그의 얼굴은 다시 악귀와 같이 일그러지며 웃었다.

"빅터주교... 오, 주교. 젊은 나이에 주교가 된 엘리트. 하지만 위선의 가면 속에 숨겨진 그 사악함, 누가 모를 줄 아는가? 너의 추악한 욕망... 하하, 위선자..."

"나가! 나가란 말이다! 사악한 악령!"

"사악한 악령?"

빅터주교의 얼굴이 우스꽝스럽다는 듯 빙글 웃었다.

"감추어진 욕망, 넌 더 더러워. 넌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 빅터주교!"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언제나 앞서나갔던 너. 추월 당할까봐 조바심 쳤지? 너의 경쟁자들이 시험 전날 죽기를 바라기도 했잖아? 아아, 어디 보자.. 너는 담장 밖에 지나가던 꽃 파는 아가씨에게 정념을 품었었군.. 오오, 이런. 그런 괴상한 상상을...."

빅터주교는 괴로운 신음을 지었다.

"..아, 이런이런이런... 심지어, 수도원안의 어리고 예쁜 견습사제에게까지 그런 상상을? 오호, 이렇게 추악한 욕망을 가진 네가 선한 얼굴로 미사를 집도하고 선을 말하다니! 아하, 아... 이런, 이런... 질투가 난단 말이지. 저 초라한 사제 리오가 성자로 떠받들리는 것이 이해가 안가지? 저런 허름한 사제가! 내내 선두를 달려왔던 너보다 더한 명성을 얻은 것이! 호오... 용납 못하겠단 말이지? 그를  미워하는군...?"

"그만! 그만해! 아아!"

"웃기지 말아 빅터주교.. 아까 리오를 공격한 것? 하하, 넌 내내 그를 죽이고 싶어했어, 내가 행동으로 표현해 준 것 뿐이야... 그래놓고 내게 사악한 악령? 크하, 크하하하하!"

"아악!"

빅터주교의 처절한 갈등을 보는 동안 리오의 감정은 점점 가라앉았다. 거대한 힘에 무릎꿇고 애원하는것, 그것은 리오의 어린시절 모습이었다. 빅터주교의 삶에 대한 갈등, 그것은 리오 자신의 모습이었다.
리오는 자신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악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의 마음속에 또아리쳐 틀어앉았다. 삶에 순종하면서, 고통에 굴복하면서 그의 마음속 어둠의 악귀는 무시무시하게 그를 장악해 나갔다. 리오는 빅터주교가 지금 그러하듯, 자신 마음속의 악귀와 처절하게 싸웠다.
일년간 시체처럼 누워 삶을 무력하게 보낼때, 시케와 동료들은 그를 좋은 사람, 좋은 사제로 심지어는 성자로까지 대해주었지만, 그것은 리오의 겉모습일 뿐이었다. 어둠이 세상을 덮는 밤이면 그는 신에게 분노하고 증오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다시 해가 솟고 시케가 자애로운 얼굴로 자신의 손을 잡아주면, 그는 지난 밤 마음속을 휘저었던 악귀에게 굴복한것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울곤 했다. 그의 마음은 밤마다 세상을 멸망시켰고 아침이 될때마다 그것을 후회했다.
그런 리오가 스승을 만났다.
스승은 그의 육신을 고쳐주고, 그가 마음속의 악귀를 몰아낼 수 있는 열쇠를 주었다. 스승을 만난 날 밤의 투쟁에서 리오는 악귀를 물리쳤다. 그러자 스승은 리오에게 조용히 말해주었다.
악귀는 원래 없었노라고.
그리고 스승은 리오를 떠나 보내며 말했다.
다음은 너의 차례이니라.



리오는 스승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떠올리며 약하게 미소지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 같았다. 리오는 빅터주교에게 붙은 악귀를 물리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악귀를 쫓아낼때 썼던, 리오의 스승이 가르쳐주신 방법이었다.
그는 빅터주교의 앞에 정좌했다. 리오의 맑은 눈이 빅터주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빅터주교님."

카앗! 리오의 맑고 차분한 음성에 거슬린 악귀가 리오를 위협했다. 빅터주교의 얼굴은 몬스터의 그것이었다.
리오는 빅터주교의 눈을 주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슬픔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잔잔한 평화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리오는 한참동안 빅터주교의 눈을 주시했다.

"흐흐흐..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빅터주교는 사악하게 웃었다. 그러나 리오는 말없이 빅터주교의 눈을 주시할 뿐이었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빅터주교는 고통스럽게 땀을 흘렸다. 곧이어 그는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리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는 야크에 의해 꽁꽁 묶여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모두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리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눈을 바라보았다. 괴물이 된 빅터주교는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마구 돌려대었으나 리오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지금 리오는 빅터주교의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눈 속의 '존재'를 보고있었다. 빅터주교를 사로잡은 악령, 바로 그를 주시하는 것이다. 분노도 슬픔도 없는 오직 깨어있는 응시. 그의 시선에 악령은 몹시 괴로워했다.

"빅터주교님.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바라보십시오. 악령의 실체는 먼지와 같습니다. 그것의 힘을 키워준 것은 바로 주교님의 '두려움'입니다."

리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음조는 몹시 평온해서 졸릴 지경이었다.

"허, 헛소리! 카아악! 이 덜떨어진 사제야! 넌 성자 자격이 없어!"

리오는 싱긋 웃었다. 그는 악령의 말에는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주교님. 단지 응시하세요. 바라보십시오. 그럼 사라집니다. 먼지와 같은 것입니다."

"빅터주교! 나는 너의 추잡한 욕망을 모두 알고있어!"

악령은 리오에게는 대꾸하지 않고 빅터주교를 윽박질렀다.

"아아.... 나는.. 나는..."

"인간의 마음..."

리오의 음성이다.

"인간의 마음은 떠오르고 가라앉습니다. 상념은 순간 사로잡다가 지나갑니다. 그 느낌에 침잠하는 것은 당신의 결정. 보내십시오. 흐르는 물결처럼.. 막으려고도 마십시오. 빠져들지도 마십시오. 관찰하십시오.."

"나의 추악한 마음... 아아, 난 추잡한 인간이야..."

"주교님,"

리오는 여전히 주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리오의 눈은 섬광처럼 빛났다.

"'마음'이 당신 자신이라고 여기십니까? 당신은 고통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군요. '마음'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그럼 나는 누군가요..."

빅터주교가 헐떡거리며 겨우 물었다.

"그렇게 질문하는 자."

키아아아아아아앗! 리오의 대답이 끝나자 마자 길게 이어지는 처참한 비명과 함께 빅터주교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야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길게 베었다.
퍼석!
악령의 끈적한 퍼런 점액질이 사방 벽에 튀었다. 빅터주교는 옴팡 뒤집어썼다. 그러나 그는 탈진상태라 찝찝한지 더러운지 전혀 인식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평화로웠다.

"아아.. 성자님... "

빅터주교가 눈물을 글썽였다. 리오는 악령이 빠져나간 빅터주교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돌아오신 것을 축하합니다. 빅터주교님."

빅터주교는 흐느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이 우리 교단 사람인 것이... 성자님!"

감정에 못 이겨 몸부림치는 빅터주교 때문에 리오는 그제야 어깨의 상처가 아파와 움찔했다. 그렇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피를 보니 그제야 나다도 정신을 차렸다. 시케...

"이봐! 배경음악 깔아주고 싶지만 지금 폼잡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 빌어먹을 주교놈아! 시케 살려 냇!"

나다의 거친 외침에 빅터주교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흥건하다. 리오가 빅터주교를 간절히 바라보며 말했다.

"주교님! 시케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케를.... 제발...!"

그러나 주교는 리오의 어깨에 흐르는 피에 놀라 손을 대려 했다. 리오가 그 손을 막았다.

"시케부터."



빅터주교의 놀라운 신성마법으로 시케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나았다. 덕분에 빅터주교는 완전히 탈진했다. 치료의 휘광이 사라지자마자 시케는 눈을 떴다.

"..."

시케가 눈을 뜨자, 놀랍게도 리오가 그녀를 덥석 안았다.

"시케, 시케! 고마워, 살아서 고마워! 오, 신이여."

"리오?"

놀라긴 했지만 시케는 거리낌없이 그녀를 안아주는 리오를 보고 너무나 기뻐 얼굴이 온통 발개진 채로 싱긋 웃었다. 나다는 흐흐 웃었다.

'음, 시케는 보통여자들처럼 빼는 게 없단 말이야. 너무 솔직하지.'

하지만 그것이 시케의 매력이기도 하다. 나다는 픽 웃었다. 사람들은 모두 헛기침했지만 리오는 - 뭐랄까 늦바람이 더 무섭다던가 - 하여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빅터주교는 표정을 수시로 바꾸며 서로 보듬어 안은 리오와 시케를 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제야 둘은 빅터주교의 시선을 느끼고 흠칫 서로 떨어졌다. 둘 다 얼굴이 빨개졌다.
뭐라 질문하려는 빅터주교에 앞서 나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주교나리, 어떻게 된거유? 반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얼굴이 창백해진 주교는 더듬거리며 답했다.

"브룬하르트에게 가고.. 그를 기다리러 거실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아아, 기억이 안납니다."

"으윽."

"보통녀석들이 아니군. 빅터주교정도를 그렇게, 아무리 갑자기 헛점을 노렸어도, 악령에 사로잡히게 하다니."

야크의 중얼거림에 나다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거, 빨리 떠났어야 했는데. 어떡하지?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버렸어...'

그런데,

'나다....'

나다는 마음속을 울리는 리오의 힘없는 말에 그를 쳐다보았다. 리오의 얼굴은 새하앟게 되어있었다.

'나..나 데리고 방으로, 좀..'

"야, 리오야! 나 할말 있어, 잠깐 와 봐."

그렇게 말을 던진 나다는 별안간 리오를 끌다시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사람들은 근심스럽게 반에 대해 이야기했다.
방문을 쾅 닫자, 갑자기 리오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어? 이 쉐이야 왜 그래?"

"하, 하.. 긴장이 풀렸나봐요. 하하..."

"잠깐, 빅터주교한테 너 고치라고.."

"나다,"  

리오가 막는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빅터주교님은 아주 혼란스럽고.. 마음이 약해져있어요. 그에겐 누군가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그가 지금 택한 버팀목은 접니다. 제가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도 무너질겁니다."

나다는 나지막히 협박했다.

"너 또 다 짊어진다고 잘난척하면 가만 안 둬."

"헤헤... 걱정 말아요."



밤중에 정찰을 마친 야크가 드와인과 함께 들어오며 투덜거렸다.

"거 참 영주놈의 성 한번 잠입하기 정말 힘드네. 틈이 없다니까."

"당연하지! 우리 선조의 작품이거던."

드와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반이 행방불명 된지 며칠이 지났다. 그 동안 아무리 애를 써봐도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아마 깊숙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닌가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입밖에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반은 죽었을 것이다.
일행은 드와인의 설계도에 희망을 걸었다. 드와인과 야크는 밤에 몰래 성을 둘러보며, 과연 드워프의 그 많고 많은 설계도중 어느 설계에 속하는지, 또 얼마나 변형되었는지를 탐색했다. 드워프들은 건물을 만들 때 작품처럼 만들기 때문에 완전히 표준에 따르는 경우는 드물다. 당연히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야크와 드와인은 밤마다 나가 정찰했다.
빅터주교는 열성적으로 영주의 반대세력들, 즉 지하세력들과 모종의 협의를 진행하느라 바빴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도시였지만, 폭풍전의 고요였다. 그 아래쪽에서는 무겁고 음침한 기류가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거리의 인종청소는 점점 도를 더해갔고 대로에서 목이 날아간 거지나 흑인, 황인을 보는 것이 이젠 일상사가 되었다. 멋모르고 여행하느라 떠돌아 들어온 자들도 곧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기 십상이었다.
거리에는 정확하게 발을 맞추어 돌아다니는 백인 병사들의 군화소리만이 섬뜩하게 울렸다.
하지만 나다에게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케이와이단을 지지하고 있었다. 열렬히 지지하던, 겉으론 아닌척하면서 속으로 지지하던.... 케이와이단을 이루는 것은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인종우월주의에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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