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완결)장편-프리즘

[프리즘] 1부 2장 무지개빛 구름 (4)

리오나다 2009. 11. 15. 14:59
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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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무지개빛 구름 (4)


다음날 아침, 나다는 머리가 멍하고 어질어질 했다. 비틀거리다가 침대 밑으로 다이빙한다.

시케가 그 소리를 듣고 뛰어왔다. 나다는 떠돌면서 이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당히 고마움을 느꼈다.
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다시 침대에 누워있었다. 시케는 수건에 물을 적셔 짠 후 나다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굉장히 몸이 약한가봐요, 나다."

나다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렇게 몸이 약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함부로 굴러 다니는 부랑자 생활은 못하고 길바닥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잦은 기절은 아마 마룡석 때문일 것 같았다.

'윽. 빌어먹을.. 가진 건 몸땡이 하난데 이렇게 부실해지다니.'

나다가 한숨만 푹푹 쉬는데 시케는 슬그머니 웃음짓고 있었다. 허공을 향해 초점없는 눈은 지금은 사라진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나다는 장난으로 한번 찔러보았다.

"혹시, 리오 치료하려고 헤멜 때가 생각 난거야?"

당황한 시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냥 감으로 찔렀는데 정곡을 찌르자 나다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시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나다는 심각해졌다.

'이건 정말 비극인데. 이 나다의 눈칫밥 인생으로 미루어 비춰 보건데, 시케는 리오를 사랑하고 있어. 흠. 이루어지지 못할 사제의 사랑이라.. 캬하..'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긴 일년이나 헤멨다니 정이 들만도 하지. 게다가 리오 녀석은 시케 생각만 하면 고맙다고 찔찔 짜니까 말이야."

나다의 중얼거림에 시케는 응?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나다는 시케를 보자 창피해졌다. 그건 꿈에서 리오와 대화한 것이 아닌가. 왠지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그러나 시케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딱 일년 째 조그맣게 자축하는 파티를 열 때 그 스승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리오를 고쳐주셨죠."

나다는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그건 꿈이었다. 꿈!

'우연이야.'

나다가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동안 시케는 물수건을 만지면서 행복한 음성으로 말했다.

"리오는 원래 잘 웃고 잘 울어요. 일년간 그를 돌보면서 가끔가다가 귀엽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죠. 후후, 그는 처음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어요. 조금씩 나아갔다고는 하지만 일년이 지나 스승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부축해줘야 겨우 일어나 앉는 정도였지요. 그런 리오를 제가 옆에서 돌보아줄 때면 리오는 제 손을 붙잡고 고맙다면서 울었어요. 그러다가도 마차 안에 작은 다람쥐가 어쩌다 들어올 때면 무척 기뻐하면서 웃었죠. 리오에게는 신기하게도 숲의 짐승들이 잘 따라요. 성자님이니까요."

창 밖을 아련히 쳐다보는 시케를 보면서, 나다는 그 '성자'란 소리 좀 빼면 정말 나무랄 데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추억에 잠긴 시케의 얼굴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침을 흘리던 나다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기 머리를 쿡쿡 쥐어박았다. 시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마치 아기를 키우는 것 같았어요. 제가 일일이 미음을 끓여 먹이고, 잘 때 옆에서 이야기도 해주고, 따듯하게 물을 데워 씻어주고..."

"그래, 시케. 기저귀 갈아주고."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음성이 끼어 들었다. 주근깨 반이다.

"거지친구, 시케는 우리 용병단의 대장이야. 대장급은 다 죽고 시케만 남았지. 시케, 이제 우리 목숨을 구해준 리오도 회복되었고 한참이 흘렀잖아. 지금 우리 옆엔 리오도 없다구. 이제 돌아가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다른 동료들은 네가 우리를 불러  모으길 기다리고 있어. 다들 각자 찢어졌지만 아직도 널 잊지 않았다구! 네가 부른다면 어디서든지 달려올 거야."

"무, 무슨 소리야 반. 우린 사제야!"

"제길!"

반이 수건을 집어던지더니 외쳤다.

"그때는 리오가 나을 때까지만 이라더니! 계속 이렇고 저렇고! 왜 이러는 거야? 저들이 우릴 사제로 인정해주는 줄 알아? 계속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거지들 죽이나 나눠주라고 하고! 궂은일은 다 시키지! 저들도 우리가 귀찮은 거야. 뭐하러 눈칫밥먹으면서 인정해 주지 않는 이따위 짓을 해야 돼지? 이제 정신차려 시케! 리오에겐 리오의 길이 있고 우리에겐 우리의 길이 있어. 그는 사제고 우린 용병이야! 언제까지나 함께 갈 수는 없다구! 리오에 대한 미련은 버려. 그 녀석은 네 아기도 아니고 너랑 결혼할 수도 없어. 언제까지나 네 옆에 있어줄 순 없다구!"

시케는 반의 말을 묵묵히 듣다가 마지막 말에 푸르르 떨더니 짝! 반의 뺨을 때렸다.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다를 깜짝 놀라게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리오는 순결한 사제님이고 성자님이야! 결혼이라구?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찡하게 아픈 뺨을 만지더니 반은 더욱더 거칠게 몰아쳤다.

"정신차려. 넌 리오를 만난 뒤로 이상해졌어. 너같이 총명한 사람이 그걸 왜 몰라? 저 녀석들은 리오 때문에 마지못해 우릴 혹처럼 붙여주는 거야. 저들도 우리가 나가기를 바라고 있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거침없고 용감하던 시케는 어디로 갔지?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리오와 너는 이루어질 수 없어!"

시케는 입술을 푸르르 떨며 분노로 몸을 덜덜 떨었다. 반은 이죽거렸다.

"그 멍청한 리오자식이 네가 리오를 생각하는 만큼의 반의 반이라도 널 생각해줄까? 그래, 리오는 성자님이지, 고귀하시고 순결하신 성자님! 그러니 철없는 소녀같은 짝사랑은 집어치워. 너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넌 지금 우스꽝스러워, 알아?"

시케는 뭐라고 화를 내며 외치려다가 문득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도 알아, 반."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반은 입술을 깨물고 시케가 나가버린 방문을 노려보았다.
침묵.
나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뭐야 이거. 환자 앞에서 싸우고. 이 자쉭이.. 재수 없는 놈.'

그리고 나다는 침묵을 깨고 반에게 한 마디 했다.

"야, 주근깨. 너 바보냐? 누굴 좋아하는 감정이란 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거냐구, 이 자식아."

나다는 다음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근깨 반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다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콰앙!
반은 물 주전자를 거칠게 밀어서 쓰러뜨린 다음 나가버렸다. 나다는 잠시 멍했으나 곧 알아차렸다.
반은 시케를 좋아한다.



그날 밤 나다의 꿈에서 리오는 또 시체를 태우고 있었다. 야크는 아예 꾸벅꾸벅 졸았다. 그는 지겨웠다.

'안녕, 리오.'

나다가 인사하자 리오는 환하게 웃으며 활기차게 대답했다.

"안녕, 나다!"

리오는 무척 행복한 표정이었다.

'너 무슨 좋은 일 있니?'

"나다, 사실.. 그 동안 내내 저는 나다의 감정을 느끼면서 살았어요. 하지만 말을 걸어도 응답이 없었지요. 이렇게 나다의 꿈속에서나마 대화를 한다는 것이 정말 기뻐요."

나다는 잠시 할말을 잊었다.

'야, 내가 대단한 마법사나 전사, 하다못해 좀 근사한 평민이라도 못 되는게 싫지 않니?'

말도 안 된다는 듯 리오는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게 무슨 소용이죠? 가진 것 없이 떠돌아 다니긴 저도 마찬가진데요 뭐."

나다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리오는 자신의 지위가 더 높다고 해서 나다를 낮춰보거나 하지 않았다. 리오의 마음은 나다도 바로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다. 리오는 '성자'라는 이름에 어울리기보다는 순박하고 착한 어린아이 같았다.

'야, 근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시케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

나다의 갑작스런 질문에 리오는 순간 입을 굳게 닫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나 나다는 리오의 마음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흥분해서 외쳤다.

'야! 이거 정말 우스운데? 너 시케 좋아하는구나? 허억! 이 따끈따끈하고 애절한 마음을 느껴 보라! 우히히히히히!'

리오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하, 이런 건 별로 좋지 않은데요, 나다. 내 감정을 다 파악해버리다니..."

나다는 일이 잘 되간다 싶어 기분이 좋았다.

'야, 시케가 널 좋아하고 너도 시케 좋아하고, 그럼 끝난 거 아니야? 그 헐렁한 사제복 벗어버리고 결혼해!'

나다는 자유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간단히 생각했다. 그러나 리오는 달랐다. 그는 묵묵히 시체 태우는 불만 쳐다보았다. 조금 지난 후 리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신의 사랑입니다."

나다는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는 리오가 마치 교과서에서나 나올법한 표정을 짓거나 말을 할 때면 상당히 구역질이 났다.

'으으.. 정말 지겹고 신물나는 전형적인 사제님의 말씀이시군. 이 거짓말쟁이, 개자식아! 멍청아!'

리오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졌다.

"가, 감정은, 그건, 저는 아직 신의 사랑을 모르기에, 그래요, 그런 거에요. 지금 나의 감정은, 욕망일 뿐이에요. 성 크리스토퍼의 전도서 3장 6절을 보면 수도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세속적인 감정은 신의 사랑에서 벗어나는 욕망에 불과한 것으로.."

나다는 신학을 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바로 일갈했다.

'닥쳐!'

그리고 계속해서 공격했다.

'그런 개 같은 소리 집어쳐. 이 책이나 파먹는 좀벌레 같은 사제놈아! 나한테는 거짓말 못할 껄. 리오, 네가 시케를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그 감정이 욕망이라고? 그래 너 잘났다. 우리 비천한 평민들은 그렇게 산다. 욕망대로 산다. 왜, 드럽냐? 신성하신 성자 나으리!'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리오는 입을 다물고는 눈물을 주륵 흘렸다. 시체가 탈 때 펑, 펑!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체가 타면서 배가 터지는 소리다. 불의 열기와 함께 퍼지는 잿가루가 리오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리오는 '잿가루가 눈에 들어가서 눈물이 나는 거 같아요'하고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닦았다.

"전도서에 보면 그런 경고가 나와요. 독신을 맹세한 남자 사제나 여자 사제에게 닥치는 시련 중 사랑에 대한 것도 있다구요. 사제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품게 되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했어요. 소녀들이 선생님에게 품게되는 동경 같은 것, 순수에 대한 동경 같은 것.. 그들이 반하는 것은 제복이지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마치 바닷가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소라껍질이 집에 가져갔을 때 그 빛을 잃는 것처럼, 그들이 반한 사제가 사제복을 벗는다면 그들이 반해버린 매력이란 곧 사라지게 되죠. 그런 거에요. 일시적인 착각이라구요."

'그런 일시적인 착각으로 일년이나 그 힘든 간호를 해주었을까? 넌 시케가 그런 어리석은 착각에 휘둘릴 여자라고 생각하니? 난 얼마 안 되는 기간밖에 그녀를 보진 않았지만 그렇게 시케가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는다. 넌 일년이 넘게 함께 있었으니 더 잘 알 거 아니야!'

야크는 리오가 울자 잉? 하고 다가왔다. 리오는 야크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앞의 야크를 보고는 웃으려다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야크님, 그냥 잿가루가 눈에 들어가서 그래요."

"또 시체들이 불쌍하다고 우냐? 쯧쯧, 이렇게 여려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것냐. 끌끌."

야크는 혀를 차며 리오를 보다가 다시 멀리 떨어져 칼을 붕붕 연습 삼아 휘둘렀다. 야크가 옆을 떠나자 리오는 멍하니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나다, 이번엔 내가 물을께요. 그러는 당신은요? 당신은 왜 아무도 사랑하지 않지요?"

나다는 갑작스런 질문에 화를 내며 외쳤다.

"뭐, 뭐이? 야, 이런 땟국 주르르한 거지같은 부랑자를 어느 미친 뇬이 좋아하겠냐? 미친놈...'

리오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지었다.

"일부러 욕하면서 본심을 숨기지 말아요. 난 다 알아요. 당신은 사랑은커녕, 사람들에게 정조차 주길 꺼리고 있어요. 왜지요?"

'.....'

나다는 잠시 말이 없다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꿈인데 상관이 없겠거니 싶다.

'알겠다 리오. 말해주지. 왜냐하면, 난 언젠간 그들을 떠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야. 알것냐?'

"왜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떠나지요?"

'음, 흠. 리오, 나에게는 뭔가 갈증 같은게 있어. 한자리에 오래 있질 못하지. 내가 물려받은 집시의 피에 흐르는 방랑자의 갈증일지도 몰라.'

그러나 그렇게 말해놓고 나다는 한참 말이 없었다. 리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래, 그 갈증이 무엇인지는 난 잘 몰라. 하지만 난 그 갈증에 이끌려 모든 것을 떠나고 말아. 아니, 아니야. 그래, 이건 방랑자의 변명일 뿐이야.'

"갈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 음..'

나다는 그답지 않게 계속 더듬거렸다.

'그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에게 있어선, 사랑은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호기심이나, 그래, 니 말처럼 욕망일 뿐이야. 그래.. 사랑은, 부정하면 사라지는 허무한 감정이지. 아냐, 사람들을 봐, 목숨처럼 사랑했다구? 결혼 뒤 일 이년이면 사라지는 감정이야. 그리고 배신한 애인에게 증오를 느끼지. 그건 말이지.. 뭐랄까..'

나다는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

'음, 그래. 욕망일 뿐이야. 소유욕, 색욕, 갖고 싶다는 거.'

"그래서요?"

나다는 이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건.. 뭐랄까. 그건 허망한 거야. 봄햇살에 녹을 눈사람처럼, 허무한 거야. 모두 사라져버려. 난..난, 뭔가 갈증을 느껴. 그건...'

"그건, 변치 않는 본질에 대한 갈증이이에요. 나다 말대로 적당히 표현할 단어란 존재하지 않아요. 단지 저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릅니다."

'음, 흠? 글쎄? 난 신은 싫어! 제길. 하여간, 그래서 난 결혼을 해도 언젠가는 그들을 떠나고 말거야. 어느날 느껴지는 봄바람에 충동을 느끼고, 어느날 느껴지는 자유의 바람에 유혹을 느끼겠지. 버리는 건 한순간일 것이고... 그러니까 말이지, 난 내게서 상처받을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

리오의 눈물은 이미 멈추어 있었다. 그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나다, 나도 또한 그렇게 느껴요. 영원한 것은 신의 사랑. 그 외엔, 모두가 허망한 욕망일 뿐입니다."

갑자기 리오의 고통 나다의 마음 깊숙이에 느껴졌다. 나다 같으면 일분도 못 견딜 고통이.
나다는 별로 할 말이 없어졌다. 리오는 헌신의 길을 택한 사제였다.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



나다는 워페어의 사제들 숙소에 머무는 동안 시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케는 이것저것 궂은 일을 하느라 개인적인 시간이 적었지만 몇 시간 안되는 수면시간을 줄여가면서 나다와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시케가 나다와 이야기하면 어디선가 반이 슬그머니 나타났고, 나이겔 정식사제가 은근히 끼어 들었고, 알렌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이렇게 다섯 명이 이야기를 나눌 때면 스틱대사제는 얼굴을 찌뿌리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모임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나다만이 알고 있었다.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내려고 알렌을 돈으로 매수했으니 보기 싫어도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나 스틱은 그날그날 알렌이 보고해 오는 정보가 모두 나다를 한번 거쳐서 온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리오는 도대체 몇 살에 정식사제가 된 거야? 그리고, 치유력도 하나도 없는 놈이 어떻게 정식사제냐구."

나다가 묻자 시케는 고개를 저었다.

"리오와는 그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어요. 일년간 함께 다닐 때는 리오가 말할 기운이 없었고, 그 뒤로는..."

후, 시케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나이겔이 끼어들었다.

"내가 떠도는 소문으로 듣기로는 리오사제님은 아기 때부터 신기한 치유능력을 보였다고 하더군. 그를 알아본 마르코 주교님께서 그를 데려온 거지. 가난한 사제님의 집에서도 기뻐했다던데."

알렌이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했다.

"리오 사제님은.. 저기, 저, 사생아시라면서요?"

"음, 꼬챙이 영감이 말버릇처럼 리오를 욕하면서 하는 말이잖아."

나다가 맞장구치자 나이겔은 얼굴이 굳어진 채로 말했다.

"대개 정식사제들은 귀족출신이 된다. 평민출신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솔직히, 아무리 치유력이 뛰어나도 평민은 평생 견습사제로 머물게 되는 경우가 많지. 그러나 아주 천재라면 조금 틀리지. 리오사제님의 경우가 그런 경우였다고 들었다. 마르코 주교가 리오사제님을 처음 세상에 소개한 것은 그의 나이 여섯 살때. 그때 그는 이미 고대어에 능통하고 모든 주문과 기도문을 정확히 외웠으며 그의 치유력은 측량할 수 없었다고 해. 그렇게 일년동안 교단을 놀라게 하며 명성을 떨쳤지. 그렇게 해서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유례없이 어린 나이에 정식사제로 인정된 거야. 그런데..."

"그런데?"

나다가 묻자 나이겔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정식사제의 의식을 치룬 후 리오사제님의 치유력은 말 그대로 거짓말같이 사라져버렸어. 마르코 주교님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더군."

"이유는 아무도 모르는 거구나..."

나다의 중얼거림에 나이겔은 주변을 보며 계속 설명해주었다.

"전쟁은 오십여 년이나 계속되고 있어, 그리고 성직자들의 순교는 또한 계속 이어지고 있지. 이타냐 사제들의 치유력은 온 서방에 알려져 있기에 적들도 심지어는 다른 나라들도 사제들을 납치해서 그 치유력을 배우고 싶어해. 전쟁에서 순교하는 외에도 납치되는 사제들도 많지. 그리고 그런 경우 우리들은 신을 위해 스스로 순교하라고 교육받았다."

알렌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자살하나요?"

나이겔은 이 어린 견습사제에게 미안한 듯 미소지었다.

"뭐, 이를테면 그런 거지. 어쨌든 치료를 위한 성직자의 수는 급격히 줄었지. 아다시피 견습사제는 많지만 정식사제는 아주 적어. 종단은 항상 사제의 교육에 열을 올리고 종단을 빛낼 사제를 열망하고 있지.
우리 아미앙스 수도단은 종단 내에서도 상당히 치유능력과 권능을 중시해. 치유력을 잃은 리오사제님은, 내가 듣기로는 굉장히 비참한 지경이 빠졌다더군. 스틱 대사제를 보면 알겠지만 마르코 주교님은 더 심해. 굉장히 독설가인데다가 손찌검마저 심하지. 게다가 리오는 평민출신이고.. 음, 알렌 말대로 아버지 없는 자식, 사생아야. 사실 출신만으로 보자면 리오는 평생 정식사제는 꿈도 못 꿀 위치지."

역시 평민출신인 알렌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반은 그것 봐라! 하는 얼굴로 시케를 보며 말했다.

"결국 평민출신 견습사제란 허드렛일을 위한 하인일 뿐인 거지요, 안 그래요 시케자매님?"

반의 비아냥에 시케는 입을 꽉 다물더니 그를 무시했다. 그리고 나다를 보며 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리오는 사제복을 벗으란 말도 여러 번 들었나봐요. 그렇지만 리오는 자신의 인생을 사제 이외의 것으로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대요."

나다는 여기서 시케가 잠시 서글픈 미소를 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쩝. 리오자식.'

그때 알렌이 또 궁금한 듯 물었다.

"사제님, 그런데 리오사제님같이 치유력이 없으신 분이 어떻게 종군사제가 되셨죠?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시케와 반, 나이겔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케가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마르코 크리프너 주교가 왜 그렇게 리오를 미워하는지."

나이겔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뭐, 그런 거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군.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천재소년덕분에 마르코 주교님은 대사제에서 주교가 될 수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리오사제님이 치유력을 잃자 출세길이 막힌 것이지. 주교님이 연구에 관한 한은 독자적인 일가를 이루었지만, 다른 수도단과는 달리 아미앙스는 치유력 자체만이 최우선이야. 그가 다른 수도단에 있었으면 벌써 대주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미앙스에 있는 이상, 치유력이 약한 마르코 주교는 평생가도 꿈도 못 꿀 일이지."

"흐음."

시케는 마르코 주교에 대한 이야기가 듣기 싫은지 화제를 돌렸다.

"리오는 종군사제가 되자마자 최전방의 군용마차에 오르게 되었대요. 그는 교육도 받지 않고 바로 전선으로 가게 된 것이죠. 그리고 첫 기착지가 바로 저와 리오가 만난 그 마을이었어요."

"참, 시케. 아무도 고칠 수 없다던 리오사제님을 고쳐주셨다는 그 분이 누구시지?"

나이겔은 눈을 빛내며 시케에게 물었다. 그는 리오가 찾아 다니는 그 '스승님'이 은거한 최고위 사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시케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분은 그냥 많이 마르신 노인분이세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긴 하지만 특별히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죠. 게다가 나다와 같은 황인이셨어요. 사제님 같아보이진 않던데 며칠만에 리오사제님을 고쳐주셨죠. 믿겨지지가 않았어요. 부축하지 않으면 스스로 일어나 앉지도 못하던 리오가 며칠만에 자리에서 자기 힘으로 일어났으니까요.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기적 같았죠. 리오는 그분에게 엎드려 크게 통곡했어요. 그가 잘 웃고 잘 울긴 하지만 그렇게 오열하는 것은 처음봤어요."

나다는 속으로 웃었다.

'흐, 그녀석도 살아난게 엄청스레 감격스러웠나부지? 하긴 뭐 지도 인간인데.'

그의 잡념이 이어지기도 전에 시케는 계속 이야기했다.

"치료를 위해 그분과 있은 지 두 달이 지났어요. 그 동안 두분이서 알쏭달쏭 알 수 없는 말만 하더니, 나중엔 아예 말도 안하고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를 하루종일 하는 거에요.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리오는 스승님의 권유라면서 떠나자고 했죠. 그는 자신을 치유해주신 그 분을 '스승님'이라고 불렀어요. 리오는 스승님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지 몹시 안타까운 얼굴로 작별했어요. 그리고 우리를 모두 데리고 종단으로 돌아왔죠. 그때 아미앙스의 종단으로 돌아와 보니 리오가 사라진 일 년여간 그는 전설이 되어 있었어요. 치유력도 없는 그에게서 나왔다던 초록색 후광, 그리고 오색구름과 한 달여간 물도 마시지 않고 살아난 기적 때문이지요. 사드를 쫓아내고 리오를 구해주었던 쏜튼 와일더 장군은 리오에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어요."

그때 반이 끼어들었다.

"리오사제님은 좋은 사람이지만 정말 멍청하지. 갑자기 우리들 방에 뛰어들어오더니 묻는 거야. '여러분들 소원이 뭐지요?' 느닷없이 묻길래 아무도 대답을 못했는데 시케가 말했어. 리오가 있는 곳에 있고 싶다고. 그랬더니 뭐랬는 줄 알아?"
반은 나다의 앞에 얼굴을 쑥 내밀고 리오의 말투를 흉내냈다.

"시케, 사제가 되고 싶어?"

"크억!"

나다는 쓰러질 뻔 했다. '으으윽.. 리오야 리오야.. 멍퉁구리!'

"그래서 리오는 우리 용병단 중 원하는 사람들을 사제로 인정해달라고 했어요."

시케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게 그렇게 리오에게 폐가 되는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는 건데..."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나다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종단사람들은 거친 용병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책상머리 사제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단지 '인간백정'이었다. 이타냐의 사제들은 상류계층이고 출신도 대부분 귀족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치유능력도 없는 평민출신 리오가 정식사제인데다 소위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도 못마땅한데, 그의 부탁으로 '천한 용병 따위가' 견습사제가 되자 쳐다보는 눈들이 느껴질정도로 냉랭해졌다.
어찌되었든 리오가 마을에서 보인 기적은 큰 화제가 되었고 그가 일년만에 살아 돌아온 것도 기적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동안 종단 내에서도 마르코 주교를 주축으로 단지 그 오색구름과 후광은 착각이거나 아니면 어떤 숨은 마법사의 장난일 것이란 의견도 거셌다. 이타냐에 마법사가 전무하긴 해도 어쩌다 우연처럼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법사가 있다면 눈속임에 의한 구름이나 후광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곳의 목격자들은 경건한 느낌이 드는 신성한 빛이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시케와 마을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논의가 계속되는 도중에 모든 것이 리오의 술책이라는 말조차 나돌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리오에게 있었던 '기적'이 과연 기적인가 아닌가를 심사하는 위원회가 열렸다. 아미앙스의 고위사제들이 한군데에 모였고 증언자들과 구경꾼들이 평소에는 재판장으로 쓰이는 건물에 가득히 모였다.

"리오사제는 어린 시절 놀라운 재질을 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려운 신성마법을 마스터 해가던 도중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능력을 모두 상실했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마르코 주교는 커다란 덩치에 키가 컸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없고 눈썹도 없는 데다 굉장히 뚱뚱해서 얼핏 보면 주교라기 보다는 전사와 같은 인상이었다. 손바닥도 굉장히 커서 솥뚜껑만했다.
그는 설득력 있고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확신하건데 그 상실의 원인은 바로 리오 자신입니다. 저는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신성한 징조 또한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재판소의 모두가 웅성거렸다. 시케는 화가 났다. 리오가 뭘 잘못했다고 마치 죄인 추궁하듯이 하는가?

"그리고 리오사제는 그 동안 모두 쉬쉬하였지만, 많은 이단적인 책을 보며 이단의 지식을 몰래 섭렵해왔습니다. 특히 그의 최근 언행을 보면 신성모독적인 발언이 대부분입니다. 그는 이단의 사상에 물든 종단의 위험인물입니다!"

당시 회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파리한 얼굴의 리오는 나무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케는 리오의 이런 태도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르코 주교는 서류를 하나하나 들어올리며 읽었다.

"일주일전 티이 사제의 증언으로는, 리오는 '신이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거야, 네가 바로 신인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명백한 신성모독입니다! 그리고 삼일 전 두 시경, 다니엘 사제에게는 '신, 악마, 이 모든 것이 나의 환상일지도 몰라. 내가 나라는 것, 신이라는 관념, 이 모든 것은 바다 위의 파도일 뿐일지도 몰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입니다."

리오는 단지 바닥만 쳐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케는 답답했다. 심의를 맡은 대주교가 리오를 보며 확인했다.

"맞습니까? 리오사제."

"맞습니다, 대주교님."

그리고 나서 마르코 주교는 몇 날 몇 시에 리오가 무슨 행동을 했고 그것은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신성모독이 되는지를 일일이 증거를 들어 증언했다. 마을의 사건을 기적으로 볼 것인가 심의하던 기구는 순식간에 리오의 신성모독에 대한 재판으로 바뀌었다.
고개만 수그리고 있는 리오에게 대주교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마르코 주교가 말한 것을 모두 사실로 인정합니까?"

그때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리오가 고개를 들고 마르코 주교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연민과 슬픔이 가득했다. 마르코 주교는 순간 얼어붙었다. 나이와 지위에도 불구하고 주교가 나어린 리오의 시선에 꼼짝없이 제압당했다는 것을 그곳의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시케는 속으로 몹시 통쾌했다.
그러나 마르코 주교가 울그락푸르락 화를 내기도 전에 리오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인정합니다, 대주교님. 오직 교단의 선처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리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주교는 의기양양해졌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리오사제는 긴 시간 교단을 모독해왔습니다. 그가 신에게 버림받아 모든 치유능력을 잃었을 때 그의 사제직을 유지해 줄 것을 간청한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존경하는 형제여러분. 하지만 저는 순간의 동정심으로 인해 저지른 저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신께서도 저버리신 저 어리석은 영혼을 어찌 저 같은 자가 계도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모든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고자 합니다. 저 어리석고 이단에 물든 사제인 리오를 파문할 것을 주청합니다."

파문.
리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다음 발언자는 뾰족한 인상의 스틱 대사제였다.

"저는 리오가 치료를 빙자하여 저기 전직 용병무리들과 유람을 다니면서, ... 흠,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하게... 현재 견습사제인 시케 자매와 입에 담지 못할...."

"무슨 소리에요! 리오는 환자였고 나는 그를 간호했을....!"

갑자기 일어선 시케를 대주교가 망치를 탕탕 두들김으로써 저지했다.

"조용히 하시오! 이 무슨 소란입니까!"

스틱 대사제는 경멸의 웃음을 지었다.

"근본은 어쩔수 없지요."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들은 어흠, 포옹하기도 했고 심지어 ...음.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는 겁니다. 그들이 온 이타냐를 떠돌며 우리 종단의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심지어...음....시케 자매, 당시 리오는 꼼짝도 못하는 상태였다면서요?"

"그럼요!"

시케가 당당히 말했다.

"흠.. 그럼 그의 .. 음 , 험, 대소변은 스스로 가릴 수 없었겠군요."

"네! 당시 그를 시체라고, 치료할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지요?"

탕! 탕!

"상대에 대한 비난은 삼가하시오, 시케자매."

시케는 뭐라 소리지르려 했지만 리오가 소매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멈추었다.

"그런데 이해못할 것은 당신은 다른 남자형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오의 모든 수발을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게 했다는 겁니다... 심지어 한 마차 안에서 같이 밤을 새우기도..."

"이보세요! 당시 리오는 혼수상태인 환자였고 나는 간호하기 위해 밤을 샌 겁니다! 간호행위를 모두 비난하실 생각인가요?"

그녀의 당당한 말에 간호에 관한 일을 맡은 엘라노어 콜린스 여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스틱 대사제는 씨익 웃었다.

"그렇군요. 모두가 간호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린, 당시 리오사제의 가사상태가 모두 그의 연극이었음을 증명할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말!"

"조용히 하세요!"

그때 리오가 조용히 손을 들어 마르코 주교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모두들 흥분한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다른 방으로 갔다.
그렇게 몇 시간 흐른 뒤, 일방적으로 재판이 끝났음이 알려져 왔고 리오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여기까지 듣고 나서 나다는 황당했다. 그가 볼 때 그 당시 상황은 거의 억지였다.

"그런 억지가 먹히나? 다 바보냐?"

나다의 말에 나이겔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나다의 험한 말은 계속 튀어나왔다.

"허, 그 마르코 주교란 녀석 엄청나군! 리오에 대해 몇 시 몇 분에 물 마신 것까지 다 감시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 자식 변태나 정신병자 아니야?"

"크억!"

나이겔은 기겁을 했고 알렌은 난처한 얼굴로 외쳤다.

"나다님! 주교님에게 그런 무엄한 말투가 어디 있어요! 나다님의 그런 말이 다른 사제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나다님은 감옥에 갖힐거라구요!"

그러나 두 사람과 달리 시케는 시원한 표정을 지었고 반은 대놓고 후련해했다. 반은 엄지손가락마저 치켜들며 나다를 보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나이겔과 알렌은 더욱더 기겁을 했다.
시케는 다시 화제를 바꿨다.

"그 동안 리오의 소식을 알려고 얼마나 가슴 태웠는지 몰라요. 그가 살아있다니, 정말 기뻐요."

나다는 환하게 웃는 시케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소식을 전해주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뻐졌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시케를 보며 물었다.

"근데, 그 키스 건은 뭐야? 흐흐흐.."

응큼한 웃음소리에 시케는 얼굴을 붉히며 바락 소리쳤다.

"마, 말도 안돼요! 그건 주교의 모함이라니까요!"

"흐흐흐흐... 커억?"

음흉하게 웃던 나다는 시케가 당황해서 내저은 손에 명치를 맞았다.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숨도 쉬지 못한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으윽...'

"앗! 나다! 미안해요! 많이 아파요?"

시케는 나다의 등을 퉁퉁 두들겼다. 나다는 등이 아파서 더욱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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