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완결)장편-프리즘

[프리즘] 1부 2장 무지개빛 구름 (3)

리오나다 2009. 11. 14. 14:42
 
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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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무지개빛 구름 (3)

마을사람들은 병사들이 저지해서 광장 깊숙이는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에 모여 서서 가족을 잃은 슬픔의 저주를 리오에게 퍼부었다. 그리고 그가 음식을 먹을까봐 두려워했다. 게다가 후광을 비칠 권능을 지니고도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지 않는 그를 원망했다.

시케는 멀리서 그를 지켜보았다. 리오는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시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슬픔과 두려움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왜 당장 전설에나 나올법한 대단한 능력을 사용해서 서스턴을 죽이지 않는 것일까? 그럴 능력이 없다면 왜 백작의 행방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그 백작의 목숨이 마을사람들 전체보다 더 중요해서? 그는 귀족이고 마을사람들은 평민이라서? 만약 그렇다면, 왜 나중에야 나서서 저런 고통을 당하는가?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그 동안 매일 신선한 음식들이 광장에 날라졌다. 식은 음식들은 금새 버려졌다. 사드는 그 음식들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준 후 그냥 버렸다. 마을사람들은 굶주림과 공포에 지쳐 나날이 말라가는데 마을 주변에는 음식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병사들이 두려워 감히 버린 음식에 손도 대지 못했다.

리오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음식뿐 아니라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고통스러운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리고 사흘째, 리오는 자신의 옆에 있던 물통을 쥐었다. 사람들은 공포 때문에 심장이 멎는 듯한 표정으로 리오를 바라보았다. 시케를 비롯한 용병들도 긴장해서 그를 보았다. 만약 그가 물을 마신다면 음식냄새가 풍기는 이 광장에 다시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게 될 것이다. 리오가 나타난 후 멈춰졌던 사드의 그 잔혹한 취미가 다시 연극처럼 공연될 것이다.
하지만 리오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다시 쥔다. 그는 차마 놓을 수 없는 듯 당겼다 밀었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그는 그것을 던져버렸다. 힘이 없어서 멀리 던져지진 않았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물통을 던지고는 다시 엎드려 흐느꼈다.

리오의 입술은 말라 뒤틀어지고 눈은 극심한 갈등으로 혼미해져갔다.

처음에 단정하게 앉아 기도하던 모습이었지만, 곧 앉을 기운조차 사라졌는지 조그맣게 몸을 오그린 채로 쓰러져있었다. 리오는 있는 힘을 다해 앉으려고 애썼지만 곧 포기해야 했다. 처음엔 계속 저주를 퍼붓던 마을사람들도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 말없이 마음을 졸였다. 서스턴이 마을사람들을 괴롭히던 것도 리오가 나타나자 멈추었다. 그렇지만 음식을 먹는다면 다시 재현될 것이다.

닷새 째. 리오는 정신이 혼미해져있었다. 그는 그릇 하나를 또 집었다. 그의 손 뿐 아니라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맑은 수프가 가득 찬 커다란 그릇이었다. 그러나 리오는 그것이 수프인지 스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냥 액체일 뿐이었다. 리오는 그릇을 두 손으로 잡고는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그릇 안에 넣으려는 순간 그를 지켜보던 한 마을의 어린아이가 외쳤다.

"안돼요!"

리오는 그 아이의 비명소리를 듣고는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손에 들고있는 그릇을 보더니, 마치 그 그릇이 뜨겁게 달아오르기라도 한 듯 놓쳐버렸다. 그 바람에 그릇은 기울어져 액체가 쏟아졌다. 리오는 깜짝 놀라며 그릇을 바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떨리는 그의 손은 자꾸만 그릇을 놓쳤다. 그릇 안의 스프는 거의 다 쏟아져버렸다. 리오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을 보더니 멍하게 굳어버렸다. 병사들이 다가오자 그는 가까스로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잘못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전 안 먹었어요! 절대.. 안 먹었어요.. 욱..으흑.."



나다는 감동에 떨며 이야기하는 시케의 얼굴을 보자 닭살이 돋았다.

'완전히 위인전기로군.'

하지만 그런 나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시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정말 열렬히 리오를 숭배하고 있었다. 나다는 피식 웃었다.

'숭배하게 되면 과장도 심해지는 법이지.'

그때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케 자매님, 리오사제님의 친구분과 이야기 중이신가요?"

시케와 나다가 돌아보니 소년 견습사제인 알렌이다. 그는 열 서너 살 되었을까 한 자그만 소년이었다. 아까부터 알렌은 옆에서 쓰레기를 줍는 척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리 와서 앉아요."

시케의 말에 알렌은 볼을 붉히며 기뻐했다. 시케 옆에 앉은 그는 나다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에 무례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리오사제님의 친구 분이신데.."

"뭐? 아~ 나보고 거지라고 했던 거? 거지보고 거지라 하는데 뭐가 실례라구. 난 괜히 나 때문에 쇠꼬챙이 같은 스틱대사제한테 꼬마가 혼나서 더 미안하던걸."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한 나다의 말에 알렌의 얼굴은 더욱더 붉어졌다. 척 보기에도 몹시 순진해 보였다.
알렌은 시케를 보더니 우물쭈물 말했다.

"저.. 리오 사제님에 대한 이야기지요? 저도 들어도 될까요?"

그의 말에 시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은 뛸 듯이 좋아하더니 열정적으로 말했다.

"아이들이 그러는데 평민출신의 성자가 나올 것 같다고 했어요! 정말 대단해요, 리오 사제님은! 귀족도 아니신데 정식사제가 되시고 또 그런 기적을 일으키셨으니까요!"

나다는 이 소름 돋는 광경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알렌은 눈을 빛내며 그를 보았다. 자신이 동경하는 사람과 친구여서 그렇다. 나다는 상당히 불편했다.
그러나 시케는 엄한 얼굴로 알렌에게 말했다.

"알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잘못하면 리오사제님에게 해가 끼친단다."

"옛!"

나다는 슬금슬금 빠져나가려 했다. 그는 광신도를 싫어해서, 아무리 마음씨 좋은 시케와 순진한 소년 견습사제이긴 해도 이럴 땐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케가 나다를 불렀다.

"나다? 어디 가요? 내일 이야기할까요?"

그러자 알렌의 얼굴은 보기에도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본 나다는 '으으'하고 신음하더니 다시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어 시케? 리오가 스프를 쏟았다며?"

아, 예, 하더니 시케는 말을 이었다.



리오는 쏟아진 스프를 피해 힘겹게 기어갔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기어갔지만 기껏해야 몇 발자국 안되는 곳 밖에는 가지 못했다. 그리고는 쓰러져서 몸을 오그렸다. 조그맣게 오그린 그의 어깨가 흔들리더니 짐승의 신음소리와 같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러나 곧 기운이 없는지 혼절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죽었는가 해서 시케는 얼른 달려갔다. 어깨를 잡아보니 기절해 있었다.
시케는 초조해졌다. 그래도 물 한 모금은 마셔야 할 것 아닌가? 리오는 탈수상태였다.
다른 동료 용병들도 신성한 빛을 내던 사제가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 좋지는 않았다. 전쟁터에 떠돌며 목숨을 내놓고 살기에, 용병들은 미신을 많이 믿었다. 이번 일은 그들 입장에선 정말 아닌 말로 '재수 없는 일'이었다.

"자자, 보기 좋지도 않은데 우리 술이나 마십시다. 부하들도 다 지켜보고 있는데 뭐."

용병단의 대장은 두 명 있던 서스턴의 부하를 설득해서 끌고 갔다. 그들도 리오사제를 지키느라 지루했던 터라 얼른 따라나섰다. 그래서 광장에는 몇 안되는 아이들과 용병단만이 남게 되었다.
대장은 서스턴의 부하들과 술을 마시러 가면서 시케에게 눈짓했다. 시케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수통을 들고 리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주위를 살핀 후 리오의 입에 수통을 갖다 댔다. 하지만 리오는 '먹지 않아야'된다는 생각만 본능처럼 남았는지, 거의 기절상태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먹지 않았다. 물이 얼굴로 줄줄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
물을 먹이려고 애쓰던 시케의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스턴이었다. 그녀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정신을 다잡은 시케는 되도록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서스턴에게 말했다.

"물을 먹지 않으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물은 먹여야 오랫동안 마을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서스턴은 시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그 어떤 괴물을 만난다 해도 이 눈빛에 비할 수는 없을 것 이다. 시케의 담력은 작은 편이 아니었건만, 사드의 눈빛에는 본능적으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신이 지켜주시는 위대한 사제 나으리신데 물이 없다고 쉽게 죽을까?"

그렇게 말한 서스턴은 리오를 내려다 보았다. 시케는 안도와 실망이 교차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리오는 약간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리오가 희미하게 눈을 뜨자 사드는 마치 연극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감동했다, 사제여! 대단하다. 그대의 의지에 경배를 드리지. 하지만, 이렇게 굶어죽는다면 이것이야말로 개죽음이 아닌가?"

서스턴은 옆에 있던 닭고기를 뜯어 조금 맛보더니 퉤! 하곤 리오의 옆에 뱉았다.

"음식이 식었어. 고귀하신 사제께서 입맛이 없어 못 드시겠다는데, 식은 닭고기나 대접해서야 되겠느냐?"



시케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나다는 으윽, 하고 신음했다. 그는 화가 났다. 부랑자로서 여기저기 떠도는 나다는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리오에게는 누군가 먹는 장면을 본다는 것 자체가 고통일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손만 대면 먹을수 있는데. 아마 뱉어놓은 것조차 주워먹고 싶을 것이다.

"난 굶은 놈이 소똥 뒤져서 보리알 건져먹는 것도 봤다구. 굶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줄 알어? 나아쁜놈!"

알렌은 나다의 위생적이지 못한 말에 우욱 구역질을 했다.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나다를 보던 시케가 재빨리 다음 이야기를 이었다.

"나다, 사실 배고픔보다는 목마름이 더 심해 보였어요. 하지만 나다 말이 맞아요, 사드의 그런 행동은 리오를 몹시 고통스럽게 만들었죠."



하지만 사드는 그에 그치지 않고 리오의 머리카락을 잡아 머리를 뒤로 잡아당기고는 그의 입에 억지로 닭고기를 집어넣었다.

"자! 먹어! 그리고 말해! 그 자는 어디 있지?"

리오는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구역질을 하며 닭고기를 토해냈다.

"엑...! 우엑..! 욱.. 으으..."

그 모양을 보던 서스턴은 손가락을 딱 쳤다.

"맞아, 맞아. 혼자 먹으면 입맛이 떨어지는 법이지. 좋아, 먹성 좋아 보이는 녀석들을 끌고 와라!"

그리고 마을 사람들 중 뚱뚱한 사람들이 끌려왔다. 그들은 공포에 잔뜩 질려있었다.

"먹어라! 아~주 맛있게!"

하지만 공포에 질렸는데 어떻게 음식을 맛있게 먹겠는가? 사람들이 우물대자 사드는 험악한 얼굴로 외쳤다.

"당장!"

그러자 사람들은 미친 듯이 먹기 시작했다. 서스턴은 수통을 들고 리오의 앞에서 바닥에 모두 쏟아버린 후 킥킥거리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음.. 그 녀석 진짜 악마가 아닐까?"

나다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걸 가지고 그러다니!! 치사한 놈!"

나다는 옆에서 질린 얼굴로 자신을 보는 알렌이나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시케는 아랑곳이 없이 몹시 분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케 사제님,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알렌의 재촉에 시케가 한숨을 쉰 뒤 힘없이 말을 이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참 잘했다. 나다는 그녀가 전직 용병이 아니라 전직 바드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노래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하여간 바드란 직업은 이야기꾼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어요. 마을사람들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열흘이 넘게 버티는 리오사제를 보고 과연 신성한 빛이 지켜주는 사람이라고 수근댔죠. 하지만 몇몇 사람은 차라리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어요. 만약 그가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신다면... 그 뒤에 이어질 끔찍한 일을 두려워했던 거죠. 사람들은 신경이 바짝바짝 타는 듯 괴로워했어요.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달랐죠. 제가 보기에, 리오사제님이 나타난 후로는 서스턴이 마을사람들을 끔찍하게 고문하며 즐기는 것을 멈추었어요. 리오가 백작의 행방을 아니까 마을사람들을 고문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냐고 할지는 몰라도, 그렇지 않아요. 서스턴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인해 공포와 고통에 울부짖는 것을 즐기는 악마였죠. 마을사람들이 무사한 것은 순전히 괴롭힘의 대상이 리오사제가 되었기 때문일 거에요. 리오사제를 괴롭히는 재미에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중단한 것이죠.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추측이에요."



그러나 사람들은 리오사제가 어서 빨리 죽어버리고 서스턴이 드디어는 백작을 찾는 것을 포기하길 바랬다.
리오는 기둥에 기대어 앉아 뚱뚱한 마을사람들이 널린 음식을 목숨을 걸고 집어먹는 것을 공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 시케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며칠이 정말 악몽 같았아요. 음식을 먹어도 목이 메이는 거에요."

나다는 안타까움에 잠긴 시케를 쳐다보며 속으로 웃었다.

'헤헤, 말해봐 시케. 그때부터 리오한테 반한거지? 헤헤..'

시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가끔가다 고통스러운 사제의 신음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용병단은 돈을 반납하고 떠나야 하지 않을까 의논을 거듭했지만, 그 액수가 너무 많고, 또 보복이 두려워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반은 대장에게 칼을 들고 덤비기도 했다. 대장은 그때서야 용병들에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지금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벌판에 사드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오백이 될까한 용병단이 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몇천이 되는 그들에게 몰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용병단이 돈을 되돌려 준다 해도 사드가 용납을 안하고 오히려 그들을 죽일 것이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그렇게 시케와 반이 대장과 싸우고 난 후 광장으로 나와보니 사제는 - 리오는 마치 시체처럼 광장에 쓰러져있었다. 시케는 정말로 죽어버렸는가,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살펴보니 그는 겨우 숨을 쉬고있었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 시케는 차라리, 이렇게 고통을 받느니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리고 발을 돌리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아주 미약한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리오였다. 그러나 잡은 힘이 너무나 약해서 놀랄 정도였다.

"으...으으.."

리오의 미약한 신음같은 말은 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다 해도 바짝 말라버린 그의 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케는 입술의 움직임만으로도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는 훈련을 받았기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입술만 움직여도 알아들을 수 있어요."

시케가 그렇게 말하자 리오는 몹시 기뻐했다. 퀭하고 검게 쑥 들어간, 고통으로 희미해진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힘겨운 듯 하얗게 갈라진 입술을 움직였다.

'내게 말을 걸어줘요.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요.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제발...'

그래서 그 뒤로 시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감시하려 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의 옆에서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땡볕이 곧바로 그에게 내리쬐이고 있었기에 햇빛 쪽으로 앉아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사실 거칠게 살아온 시케로서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계속 이야기한다는 것이 생소했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 아마 그때 시케가 알고 있는 옛날이야기란 옛날이야기는 다 한 것 같았다. 나중에는 시케의 어릴 적 얘기, 반의 어릴 적 얘기, 안한 얘기가 없을 정도로 다 하게 되었다. 리오는 옆에 쓰러진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아서 사실 듣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케는 절망에 빠져있는 리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나다가 말을 끊고 질문했다.

"왜 그렇게 그를 도와주고 싶어했지? 시케하고 아무 상관도 없잖아."

알렌 역시 궁금한 얼굴로 시케를 바라보았다. 시케는 잠시 얼굴을 붉히더니 말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에요, 나다. 의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죠. 사실 저도 당시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땐 너무나 안타까웠죠. 그리고 그 고통과 절망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경이로웠어요."

그때 한쪽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케, 여기서 뭐해?"

돌아보니 나이겔 제로 사제였다. 붉은 곱슬머리를 흔들며 다가온 그는 알렌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나다를 돌아보더니 말한다.

"리오 사제님의 이야기 중인 것 같군요."

"예, 사제님."

시케가 정중히 머리를 숙이자 나이겔은 손을 저었다.

"너무 정중히 그러지 말아, 시케. 우린 친구잖아? 난 신경쓰지 말고 하던 얘기 계속해요. 리오사제님의 친구 분에게 사드의 일을 이야기하던 중이었잖아?"

시케는 무안한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나이겔, 다 듣고 있었어요?"

나이겔은 머리를 긁더니 말했다.

"일부러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시케와 리오사제님의 친구 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지. 리오사제님의 근황이 알고 싶기도 하고.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어버렸군. 왠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어. 시케는 우리에겐 이렇게 구체적으로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잖아? 물어봐도 피하기만 했지... 사실, 듣고 싶었다구. 당시의 이야기를 말이야."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케는 나이겔에게 미안한 듯 웃더니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굶는 것이 정도를 넘으면 더 이상 배고프지 않게 되지요. 하지만 목마름은 끝까지 고통을 주게돼요."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리오는 신기하게도 죽지 않았다. 그러나 리오는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마치 뼈 위에 가죽만 얹어놓은 듯 끔찍하게 야위고, 눈 밑은 검게 타들어간 채 입술은 하얗게 말라붙었고 목 안쪽까지 바짝 타서 혀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가늘게 숨은 쉬고 있었다.
그때쯤엔 시케와 리오는 몸짓으로도 대화가 가능했다. 눈빛이나 조그만 입술의 움직임, 손가락의 미약한 움직임 등으로 알아본다.



"맞아요. 우리가 볼 땐 꿈쩍도 안하는 리오를 보고 시케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다는 둥 이야길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지요."

갑자기 툭 튀어나온 반의 목소리에 다들 그를 쳐다보았다. 반은 후우, 하고 한숨을 쉬더니 나다의 옆에 앉았다. 나다는 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반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반은 뒤로 벌렁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보고 시케는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리오가 시케를 불렀다.
'시..시케, 안보여요... 지금 밤이에요? 왜 이렇게 어둡지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리오는 지나친 탈수로 인해서 시력을 잃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피?"

알렌이 질린 듯이 물었다. 그러자 나이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탈수가 너무 심해지면 땀이 흐르다 못해 피가 땀 대신 흐르게 돼지. 사실 더 일찍 피가 흘렀어야 했어요 시케. 리오사제님께서 한 달간 물 한 모금없이 버티고 살아난 것은 기적입니다. 그 자체로도 말이죠."

시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기적이죠. 그 당시 여름이었어요. 태양은 사정없이 내리쬐는데 인간의 한계를 넘도록 버티는 사제에겐 단비의 은총조차 내리지 않았죠. 리오는 헝겊조각처럼 쓰러진 채 피를 흘렸어요. 그의 사제복이 뿌연 먼지와 검붉은 피로 물들었죠. 핏방울이 눈물처럼 뺨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죠.
그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것이 신의 은총이라면 너무나 잔인한 은총이다. 차라리 죽는다면, 차라리..
함부로 자살을 생각하는 자는 경멸했지만, 저는 리오사제님이 혀라도 깨물기를 바랬어요. 하지만 그는 그럴 힘도 없었죠."

나다는 헛헛 기침을 하며 시케의 말을 막았다.

"참, 시케 말을 듣다 보면 그렇게 싱글거리던 리오의 모습이 상상이 안가. 그런데, 어떻게 살았지? 이제 리오가 고생한 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얘기해. 기분 나빠 솔직히..."

"아, 그래요."

알렌과 나이겔이 원망의 눈초리로 나다를 쳐다보았지만 나다는 왠지 피곤했다. 리오란 녀석이 점점 더 짜증나기 시작했다. 만날 때부터 짜증이 났지만 이 정도까지 인줄은 몰랐다.
시케는 실망하는 알렌과 나이겔을 달래며 내일 밤에 다같이 모여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러자 다들 기쁜 마음으로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나다는 막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짐을 느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으면서 그의 웃음은 왜 어린아이 같이 천진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리오가 섬뜩하게 느껴져서 나다는 얼른 숙소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잔 나다는 하품을 하며 어슬렁어슬렁 거리로 나왔다. 견습사제들과 사제들은 모두 봉사활동을 위해 나가서 숙소는 텅 비어있었다.
나다는 설렁거리며 숙소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인기척이 들려 슬금슬금 들어가 봤더니 스틱대사제가 알렌과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스틱은 탁자에서 금고를 꺼내어 열고 금화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금화 몇 개를 꺼내어 알렌에게 주었다.

'저게 뭐지?'

나다는 궁금해서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웠다.
금화를 손에 쥔 알렌은 잠시 그것을 보더니 스틱에게 물었다.

"대사제님, 하지만 시케사제님은 좋은 분이세요."

"흥."

스틱은 차가운 얼굴로 알렌을 내려다보았다. 알렌은 움칠 고개를 숙였다.

"그 여자는 용병이었다.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던 용병. 천하고 사악한 살인자다."

"하지만.. 나이겔 사제님도 그러셨어요! 리오 사제님은 좋은 분이라구요. 훌륭한 분이랬어요."

스틱은 엄하게 알렌을 노려보았다.

"어린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느냐? 리오 그 천한 사생아가 어릴 때 악마적인 재능으로 정식사제가 된 것이 놀라운가? 그것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능력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정식사제 시험을 통과했단 말이냐?
그러나 신은 정당한 심판을 내려, 그의 악마적 능력을 빼앗아 가셨다. 그가 치유력이 전혀 없는, 사제라고 조차 말할 수 없는 자가 된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아미앙스에 치유력이 없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정식사제가 리오 하나라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알렌은 눈물을 글썽이며 작은 목소리로 울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좋은 분이랬어요. 사람들을 위해..."

"헛!"

스틱이 어이없다는 듯 비웃으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너는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그가 왜 전장으로 쫓겨났는지 아느냐? 어릴 때부터 그를 키워주고 치유력을 잃은 후에도 정식사제의 자리를 유지시켜준, 리오의 은인인 마르코 주교님의 금고를 뒤져 물건을 훔쳤기 때문이다. 그의 악행은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어린 너에게 차마 이야기 해줄 수조차 없구나. 그가 아홉 살 때엔 하얀 늑대, 그 하얀 악마라 불린 끔찍한 개를 사귀어 수도원이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나이겔 제로 사제도 어리석어 그를 마치 성자 보듯 한다만, 그것은 거짓이다. 그의 선한 얼굴에 모두 속는다만, 리오 그 사생아는 선의 가면 속에 음흉한 속내를 숨긴 사악한 자다!"

알렌은 스틱의 확신에 찬 말에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케사제님도 속으신 거군요. 나이겔 사제님도 그렇구요."

"맞다! 그러므로 너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야. 악마에게 홀린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내게 고하거라. 그 금화는..."

자신의 손에 든 금화를 바라보는 알렌의 얼굴이 벌개졌다.

"그 금화는, 병드신 너의 부모님에게 갖다 드리거라. 특별히 마르코 주교님께서 너의 딱한 사정을 아시고는 내게 부탁하셨느니라. 알겠느냐? 이렇듯 마르코 주교님은
아량이 넓으신 분이다. 그러나 그분은 리오 그 사생아의 사악함에 호되게 당하셨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가 바로 리오 크리프너 그 사생아이다. 이제 알겠느냐?"
알렌은 금화를 쥐고 감격한 듯 스틱을 보았다. 그리고 인사를 꾸벅 한 뒤 방을 나왔다.
스틱이 금고를 다시 잘 숨기는 동안 나다는 손톱을 씹으며 곰곰 생각했다.

'도대체 스틱 저 꼬챙이 영감은 리오를 왜 저렇게 증오할까? 리오가 아무리 저놈의 말대로 그런 짓을 했다 해도, 저렇게 자신이 리오를 증오할 일은 아니잖아. 아무리 봐도 원수 대하듯 한단 말씀이야. 무슨 일이 있었나?'

그리고 그날 밤 나다는 다시 시케를 만났다. 작은 동산인 그 언덕엔 시케와 반, 나이겔, 그리고 알렌이 이미 나와있었다.
시케는 다들 모이자 전날 못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쟁이란 점령하고 점령 당하는 것이지요. 이타냐 군과 미두란 군은 마을 앞의 벌판에서 결전을 벌였고, 서스턴은 패했어요. 그때 서스턴은 우리 용병단을 미끼로 남겨놓고 자신들은 후퇴해버렸죠. 꼼짝없이 우리 용병단은 괴멸되었어요."

반이 이를 부득 갈았다.

"그때 대장도 죽었죠. 그리고 나와 반은 포로로 잡히고...."

시케는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나이겔이 나섰다.

"그때 나는 그 마을을 탈환한 지휘관 쏜튼 와일더 장군의 종군 프리스트였지요. 항상 그분의 옆에 있었는데, 그분은 독실한 신자이자 정명한 기사셨습니다."

그때 나다는 정식사제인 나이겔이 자신을 위해 존댓말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사제님, 그냥 말 놓으슈. 뭐 나이도 나보다 많아 보이는데다 정식사제 나으리잖아요. 편하게 말 놓으시우. 나중에 갑자기 꼬챙이 영감이 뛰어나와서 또 혼나면 어쩌려구 그래요?"

나다의 말에 나이겔은 하하, 웃었다.

"리오사제님은 저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저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분의 친구 분이시니 말을 높이게 된 것이지요."

"그런 법이 어딨어. 말 놓으슈."

나다의 말에 나이겔은 '어, 그럴까'하고 중얼거리더니 편한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이겔은 마을로 들어섰을 때 마을밖에 버려진 끔찍한 시체 동강이들에 놀랐다. 그 처참한 모습에 그는 그만 토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타냐군을 환영 나온 마을사람들은 유령처럼 삐쩍 말랐는데 마을 뒤편에선 음식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광장에 가득한 음식과 그 가운데서 굶어 죽어가는 사제였다.
와일더 장군은 충격을 받고 크게 분노했다. 미두란의 악정에서 벗어난 마을사람들의 분노 또한 대단했다. 나이겔은 명을 받고 리오사제를 돌보게 되었다. 하지만 리오는 이미 시체나 다름이 없었기에 너무나 막막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사정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이겔은 희망을 가지고 치료에 임했다.

'신께서 지켜주시는 분인데 이대로 쓰러지실 리가 없지.'

나이겔은 일단 리오사제에게 물을 주고 싶었지만 갑자기 마셨다가는 큰일날 것 같았다. 그래서 수건에 물을 적셔 입안을 적시고 치유마법을 좀 쓴 후 조금씩 입안에 물을 흘러 넣었다. 그때 리오는 정신이 조금 들자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리오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 후, 며칠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완전히 뼈만 남아 있었다. 아무리 치료해도 겨우 목숨만 이을 뿐이어서 나이겔은 속이 탔다. 조금이라도 치유의 손을 늦췄다가는 곧 죽을 것만 같은 상태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서스턴의 병사와 용병들은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알렌은 '교수형'이란 말에 움찔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시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의아한 눈빛이다. 그때 나다가 말참견을 했다.

"리오가 나와서 말렸구나?"

시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다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다가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리오녀석 정말 대단한 녀석이군..."

그는 흘깃 알렌을 보았다. 알렌은 눈을 불안하게 흔들고 있었다. 그는 스틱의 말과 이들의 말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나다는 굳이 사람들에게 알렌과 스틱의 약속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케와 나이겔이 하는 이야기를 여과없이 알렌에게 들려줌으로써 이 순진한 어린 견습사제가 나름대로 좋은 판단을 해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나이겔은 나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리오 사제님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어. 당장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지. 그때 광장에서 교수형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증오에 찬 함성소리가 들렸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잠시 성호를 그었지."



그때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리오가 눈을 떴다. 기적이라고 생각한 나이겔은 놀랍고 기뻐서 리오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리오는 탈수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 눈은 비록 떴지만 의미 없이 허공을 향해 눈동자를 굴려 볼뿐이었다. 나이겔은 계속 치유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리오는 조금 기운을 차렸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며 리오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겁니..까?"'

나이겔은 이미 리오의 지난 이야기를 들었기에 감격에 차 그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악마는 사라지고 정의가 마을을 구원했습니다!"

그러자 리오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저 소리는.. 저 웅웅거리는 소리는..."

리오에게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웅웅거리는 울림으로 들려왔다.

"아,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습니다. 악마 밑에 있던 병사들과 용병들을 처단하기 위해..에?"

나이겔은 깜짝 놀랐다. 리오가 갑자기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힘은 없었다.

"날, 데려다줘요... 안돼... 그들을 죽이면 안돼.."

나이겔은 말리고 싶었지만 리오의 의지는 확고했다. 나이겔은 리오를 부축하려 했지만 리오는 일어설 힘도 없었기에 그를 업고 형장으로 갔다.
나이겔이 리오를 업고 나타나자 증오의 함성을 질러대던 마을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리오는 나이겔의 귓전에 조용히 내려달라고 속삭였다. 나이겔이 머뭇거리며 내려놓자 리오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이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리오의 목소리는 사방이 조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쉰데다가 아주 미약했기 때문이다. 나이겔은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이 병사들을 용서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에겐 들렸어요."
시케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당시 리오의 작은 몸짓, 입술의 달싹임으로도 그의 의도를 알수 있었다. 그녀는 나이겔의 이야기에 이어 말했다.

"당시 교수대에 묶여있던 저는 리오 사제님이 업혀오자 마지막으로 얼굴이나마 보게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분은 무릎을 꿇고 조아리면서 사람들에게 저와 병사들을 용서해달라고 비셨죠. 전 목이 메여왔어요."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냉정했다. 그들은 와글거리며 외쳤다.

"사제님도 다를 것 없어요!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은 고맙지만, 우리가 개처럼 죽어갈 동안 숨어있었잖아요! 당신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리오는 그저 용서만 빌 뿐이었다. 움직이기도 힘든 몸으로 머리를 계속 조아렸다.

"용서를.. 제발.."

그때 갑자기 힘찬 음성이 들렸다.

"모두들 입을 다물라!"

이타냐의 귀족 하나가 와일더 장군과 함께 나타났다. 그가 바로 서스턴이 찾던 이타냐의 백작, 하이드 노이만 백작이었다.

"흥, 버러지 같은 놈들."

그는 눈 아래로 평민들을 더럽다는 듯 내려다보며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같이 온 지휘관 쏜튼 와일더는 사람들을 쏘아본 뒤 엎드린 리오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무척 감동어린 얼굴로 리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탈수로 눈이 보이지 않는 리오는 그냥 힘없이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때 나이겔이 분노에 가득 차서 말했다.

"백작은 그동안 지하실 깊숙이 마법진에 숨어 있었다더군. 어떻게 그럴 수가! 많은 사람들이 사지가 잘려 죽어 가는데도!"

나다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 같으면 나 잡아 잡수슈 하고 나오겠냐. 끌끌. 리오녀석이 비정상이야 임마.'

나이겔이 다음 이야기를 이었다.

"노이만 백작은 장군에게 부축 받아 서있는 리오사제님을 기묘한 얼굴로 쳐다보았어."



리오는 다시 무릎을 꿇고 빌었다.

"백작님...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음."

백작은 콧수염을 한번 꼬더니 리오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뭐라고 속삭였는데 나이겔에겐 들리지 않았다.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고, 백작은 리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소. 그럼 저 포로들을 풀어주도록 하지."



"그렇게 해서 시케와 나머지 용병들은 살아남게 된거야."

나이겔이 여기까지 말하자 시케는 감동과 흠모의 눈길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뒤로 전 사제님의 건강을 찾아드리기 위해 치유력이 강하신 분들을 찾아 이타냐를 헤멨죠. 마침내 회복되셨을 때, 사제님은, 그분은 저보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셨어요."

시케의 얼굴이 자랑스러움에 발개졌다. 나이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해, 시케는. 다들 리오사제님은 회복할 수 없을 거라고 했어. 치유를 계속하는 것은 낭비다, 하며 리오 사제님이 누워있는 침대 머리맡에서 죽고 나면 화장을 하느니 마느니 떠들어댔어. 스틱 대사제님하고 마르코 주교님은 비록 상급자이지만 이해가 가지 않아. 특히 마르코 주교님은 리오사제님을 어릴 적부터 키워주셨다는데, 굉장히 리오사제님을 미워해. 이해할수 없어. 어쨌든 시케가 거의 납치하다시피 리오 사제님을 빼내어가지 않았다면 그분은 치료도 제대로 못 받아보고 돌아가셨을거야. 시케가 드디어 리오사제님을 완쾌시켰다는 애길 듣고 정말 신에게 감사했지."

"나이겔도 많이 도와주었잖아요. 정말 고마워요."

시케와 나이겔은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나다는 후우, 하더니 말했다.

"어쩐지 여자가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더라니.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시케는 용병이었군? 그것도 말 들어보건데 대장급이었던거 같아. 근데, 왜 사제가 된거야?"

시케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리오를 따라 종단에 들어왔지요."

나다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리오 사제님이라 그랬다가 리오라 그랬다가 정신이 없군. 자기들끼리는 친해져서 이름을 불렀지만, 견습사제가 된 뒤엔 정식사제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고 했던가? 하여간 시케는 리오를 완전히 성자로 보는구나? 위대한 성자. 쩝.'

하지만 나다 역시 이야기를 듣고 나자 리오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물론 나다 입장에서는 리오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을 했다. 하지만 그 멍청한 판단력은 뒤로 미루고, 의지력 하나만은 존경할 만 했다. 좋고 싫은 감정도 전염되는지도 모른다. 나다는 실제 리오를 만났을 때보다도, 시케의 얘기를 듣고 나서 더 그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시케에게 전염된지도 모른다.
그날 헤어질 때 나다는 알렌의 뒤를 따라갔다. 알렌은 나다가 쫓아오는 줄은 모른 채 우물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울었다.

"고민 돼니?"

알렌은 흠칫 놀라 나다를 쳐다보았다. 나다는 그의 옆에 척 앉았다.

"고민할거 없어. 너는 아픈 부모님 때문에 돈이 필요하고, 그 꼬챙이 영감은 그렇게 큰  돈을 준대잖아! 이런 횡재가 어딨담. 단지 말이다, 리오나 시케 등에게 해가 갈까봐 두려운 거지?"

알렌은 나다가 모든 것을 알고 있자 겁이 났지만 나다의 얼굴에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눈물이 그렁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다는 알렌의 등을 툭툭 쳤다.

"그럼 이렇게 해. 내가 말이지, 니가 들은 얘기 중에 보고해도 될 말과 안해도 될 말을 가르쳐줄게. 일단 시케가 죽어가던 리오를 구하기 위해 납치할 때 나이겔 사제가 도와주었다는 말 같은 건 보고하면 안돼, 알았지? 그리고.."

잠시동안 나다에게 이런저런 말을 들은 알렌은 환한 얼굴로 발딱 일어서서 달려갔다. 나다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빼족한 스틱이나 이름만 들은 마르코 주교란 녀석이 굉장히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다는 그날밤 잠자리에 들면서 얼마전 반의 등위에서 기절했을 때 꾸었던 리오의 꿈을 되새겨 보았다. 아주 생생했던 꿈.
그리고 왠지 리오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몇 개의 잡꿈 뒤, 또 리오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흐릿하게..점점 선명해진다.
연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벌판 위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퍼렇게 밤으로 녹아가는 사위에 붉고 밝은 점 하나가 보인다.
검붉은 고양이 눈을 한 적룡 야크는 뭐가 그렇게 지루한지 긴 검을 세우고 귀를 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슬픈 눈을 한 리오가 시체더미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저놈이 뭐 하는 걸까?'

나다가 그렇게 생각할 때 리오는 얼굴을 환하게 바꾸더니 공중을 향해 외쳤다.

"나다? 나다에요? 벌써 자는 거에요?"

나다는 잠시 황당해졌다. 어차피 속 다 읽어버리는 것은 포기한 상태지만, 이놈의 꿈은 정말 생생하다.

'에라, 어차피 꿈인데 뭐. 그래, 지금 뭐하는거야?'

나다가 묻자 리오가 기쁜 얼굴로 답했다.

"아, 시체를 화장하려구요."

'왜?'

리오는 다시 침울한 얼굴로 시체더미를 바라보았다.

"다 묻어드리면 좋으련만. 야크님은 마법을 쓰지 못하시고 또 여기저기에 시체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화장해 드리고 있지요."

야크는 의미 없이 잔 돌맹이를 던지다가 혼잣말하는 리오에게 말했다.

"나다 녀석과 얘기 하냐? 리오, 나다한테 이렇게 전해다오. 리오녀석이 돌아다니면서 시체 태우느라 하루에 일 킬로도 못 간다구. 쳇, 으이구 지겨워. 시체시체시체, 으으악!"

야크가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하자 리오는 미안한 듯 적룡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리오는 시체들 앞에 가서 기도문을 조용히 외웠다. 기도가 끝나자 그는 시체에 불을 붙였다. 기름이 뿌려진 장작은 맹렬하게 타오르며 시체더미를 마구 태웠다.
타다다닥
리오의 얼굴에 붉은 불빛의 그림자가 날름거렸다. 나다는 리오가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말이 걸고 싶어진 나다는 상념에 잠긴 리오에게 말했다.

'야, 리오. 너 인제 보니 대단하더라? 나 시케 만났다?'

리오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시케요? 거기가 어디지요?"

'여긴 워페어란 해변도시야.'

리오는 온 얼굴에 환하게 미소지었다. 나다는 빙글거리는 리오의 밝은 얼굴을 보니, 시케의 이야기에서 들었던 리오와 같은 인물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일을 당한 놈이, 저런 아이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시케 덕분에 잘 얻어먹고 잘 쉬고 있어. 크하하!'

"다행이네요. 제 안부 좀 전해주세요. ....걱정할 거에요, 아마."

나다는 태평하게 대꾸했다.

'뭐, 이건 꿈인데 꿈에서 잘 있드라 얘기하면 뭐해? 너랑 헤어지기 전 까진 얘기해 줬어.'

리오는 음음, 몇 번 버벅거리더니 나름대로는 열심히 설명했다.

"나다, 우리는 실제 이야기하는 거에요. 나다는 지금 물론 꿈을 꾸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대화하는 건 현실이라구요. 우린 실제 대화하는 거라구요."

'머리아픈 얘긴 관두고. 근데 시케가 널 아주 숭배하더라? 너 성자니?'

리오는 기겁을 하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엑! 무슨 소리에요? 말도 안돼요!"

옆에 있던 야크는 나다의 목소리는 당연히 못 듣고, 혼자 웃었다 당황했다를 반복하며 중얼거리는 리오를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시케가 말이지, 너 때문에 목숨 건진 얘기를 하던데? 너 그렇게 굶고 어떻게 살았냐? 너 바퀴벌레냐?'

"하하! 윽, 바퀴벌레라뇨. 시케가 좀 과장되게 얘기했죠? 그럼 오색구름이니 휘광이니.. 마치 제가 대단한 사람인양 얘기했겠군요."

'잘 아네? 그리고 시케만 그런 것도 아니야. 반녀석, 나이겔 사제, 그리고 또 뭐더라.. 다른 견습사제들도 널 성자라 그러더라.'

쑥스러워진 리오의 얼굴이 벌개졌다. 그런데 야크가 불쑥 끼어 들었다.

"무슨 소리냐? 오색구름하고 휘광?"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그는 눈빛을 번득이며 리오에게 물었다.

"나하고 백룡 차이 말고도 동방 신룡을 본적이 있느냐?"

리오는 어리둥절한 듯 되물었다.

"예?"

"너 청룡 크리아난다 알어?"

리오가 고개를 젓자 야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오색구름이라면.. 흠. 그럼 황룡 크리아트만인가? 흑룡 크리뚜리야는 인계엔 안나오고.."

나다는 이상한 말만 주절거리는 야크에게 짜증이 났다.

'무슨 헛소리야?'

야크는 리오에게 설명해주었다.

"오색구름은 우리 의형제들의 호출표시야. 그런데 오색구름을 봤다니, 백룡 차이하고 나 적룡 야크 외에 누굴 본 거냐?"

"의형제들이라뇨?"

적룡 야크는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더니 말했다.

"우리 다섯 룡은 동방 최고의 신룡 오형제! 짜자잔! 트핫핫핫! 서방으로 같이 넘어온 의형제들이닷!"

나다는 어린애같은 야크의 유치한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저런 멍청한놈. 으이구.. 오색구름 얘기 해줘라, 리오.'

"음, 그러지요. 제가 오색구름을 본 것은.."

리오는 야크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자신이 대단해 보일법한 장면은 스스로 다 축소해서 말한다. 이를테면 시케가 나다에게 세세히 묘사해 준 리오의 고통에 대해서는 "목마르고 배고팠어요."하고 짧게 말했다. 나다는 리오가 왠지 잘난 척 한다 싶어 기분이 나빴다.

'나 같으면 막 자랑하겠다. 흥, 잘났다 잘났어.'

리오는 나다의 중얼거림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나다는 리오의 말에서 시케가 몰랐던 부분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마을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저도 영문을 몰랐지요. 그냥 무서웠어요."



그 마을은 아주 오래된 건물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잘 가지 않는 마을의 외곽에 황폐화된 고대 유적들이 모여있다. 사드가 오기 전에는 그 마을에 이탸냐의 부상병들을 임시로 수용하고 있었다. 리오가 처음 종군사제로서 발령받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병사들을 돌보았다. 비록 치유력은 없지만 보통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그런 치료는 가능했기에 손이 부족한 부상병들의 수용소에서 잠도 거의 못 자고 일하고 있었다. 그때 같이 일을 도와주던 마을 청년이 리오에게 희귀한 고문서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치유에 관한 귀중한 글이었다.

"그 책이요? 마을 외곽의 그 오래된 폐허에서 발견했죠. 마을사람들은 저주받은 곳이라 해서 그 폐허에는 가기를 꺼려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건 굉장히 귀한 책이에요. 잘 간수했다가 대주교님께 보내드려야겠습니다."

"그래요? 무슨 소린지 모를 글자들이 써있어서 겨울에는 불쏘시개로 썼는데요."

"우엑? 불쏘시개요? 이건 고대어에요!"

그 책을 보고 리오는 치유력이 없더라도 사람들을 충분히 고쳐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졌다. 정식사제인 그가 치유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배척했던가. 바지런한 그의 성실함에 감동하여 이젠 다들 잘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내내 리오는 죄스러웠다. 하지만 이 책에는 치유력이 없더라도 사람들을 고쳐줄수 있는 귀한 비법들이 상세히 실려 있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다른 책도 찾기 위해  몇 번 그 폐허를 뒤졌다.

사드는 마을을 점령한 뒤 부상병들의 임시숙소를 불태워 모두 죽였다. 치유하던 사제들도 모두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그때 리오는 잠시의 휴식시간을 틈 타 그 폐허를 뒤지고 있었다. 그가 돌아와 보니 모두 죽어있었다.
그때 부상병들을 돌보아 주던 착한 마을 청년도 함께 죽어있었다. 리오는 그의 시체와 뼈를 찾아 그의 부모에게로 갔다. 그들은 몹시 슬퍼했지만 리오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사드가 백작을 찾으면서 집집을 뒤지자 리오는 그들에게 폐가 갈 것 같아서 밤에 몰래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그 폐허로 들어갔다. 그런데 병사들은 그곳도 뒤지려고 했다. 리오는 들어가본 적 없는 깊숙이까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병사들은 어느 정도 살펴보더니 그냥 가버렸다. 불빛과 웅성거림이 사라지자, 리오는 나가려고 했지만 급히 도망 온 터라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리오는 어둠 속을 한참 헤멨다. 그러다가 마침내 불빛이 보이고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기뻐서 그 곳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 안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고 귀족과 병사 몇이 있었다. 리오는 범 굴로 뛰쳐 들어간 셈이었다. 왜냐면 거기엔 사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던 귀족은 이타냐의 백작인 하이드 노이만 백작이었다. 리오의 정식사제 복장을 보고 사드는 리오를 묶으라고 명했다. 이타냐의 정식사제들은 그 치유력 때문에 적국에 많이 사로잡혀 간다. 그러나 그럴 경우 사제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교육받았다. 치유마법에 대한 비밀이 적국에 넘어가면 안되기 때문이다.
리오는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입도 꽉 막힌 채로 꽁꽁 묶였다. 그래서 백작과 사드와의 비밀회담을 본의 아니게 모두 듣게 되었다. 그들은 사드가 노이만 백작을 풀어주는 대신에 있을 서로간의 이익에 대해서 모종의 협약을 맺고 있었다.
회담이 다 끝난 뒤 사드는 리오를 풀어주었다.

"그 대단하다는 이탸냐 사제들의 치유마법을 보고 싶군 그래."

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는 치유력이 없습니다."

"거짓말 마라. 너는 정식사제의 복장을 하고 있다. 거기에다 이렇게 어리다. 분명 너는 치유력이 뛰어나서 어린 나이에 정식사제가 되었을 것이다."

"아닙니다. 정말로 전..."

사드는 냉혹한 얼굴로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저자를 죽여라."

그런데 그때 리오의 몸에서 푸른 빛이 퍼져 나왔다. 사드는 몹시 놀라워했다.



그때 나다가 참견을 했다.

'야, 리오, 너 그 후광 지금 한번 내봐라? 어떻게 생겼나 보게!'

그러자 리오는 당황해했다.

"저, 나다, 저도 그때 놀랐어요. 전 치유력이 없는지라 그 푸른 치유의 빛이 제 몸에서 나는 것을 일곱 살 때 이후로 처음 보거든요. 그래서 전, 내 영혼을 나눈 친구의 도움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땐 영혼을 나눈 친구가 어쩌면 대단한 고위사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죠."

'으윽.. 능력 없어서 미안하다.'

나다는 자신은 못 느끼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모르게 자신을 '리오의 영혼을 나눈 친구'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리오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야크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리오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그들이 놀라자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나다는 얼른 맞장구 쳤다.

'도망갔니? 잘했어, 잘했어.'

"...서스턴에게 말했죠. 백작을 찾았으니 마을사람들을 더 이상 끔찍하게 죽이지 말라고요."

나다는 리오가 정신이 나갔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으윽, 고귀하신 사제나으리여. 생각의 방향이 틀리시구만.'

"그랬더니 서스턴이..."

갑자기 리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오락거리를 뺏으려면 더 재밌는 오락거리를..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했더니.."

리오는 힘없이 말을 이었다.

"....후광이 비치는 신성한 사제를 가지고 노는 게 더 흥미로울 것 같다나요. 과연 신이 도와주는지.."

적룡 야크가 흥분했다.

"저런 발칙한 인간을 봤나! 당장 찢어 죽였어야지!"

리오는 황당해 하며 웃었다.

"야, 야크님, 전 그럴 능력이 없어요."

나다는 자꾸 끼어드는 야크가 싫었다.

'야, 저 멍청한 지렁이 말은 듣지 말고 빨랑 다음을 말해봐.'

나다의 말에 리오는 바로 물었다.

"나다? 멍청한 지렁이가 누구죠? 아, 야크님이요?"

'으악!'

야크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리오는 어색하게 하하,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서스턴은 저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계속 참혹하게 죽일 거랬죠. 만약 다음날 제가 광장에 나타난다면.. 마을사람들은 그만 죽이고 저만 가지고 놀겠다더군요."

리오는 당시의 공포가 생각났는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넌 나선거구나. 야, 존경스럽다.'

리오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다. 난, 정말 불경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냥 도망가고 싶기도 했고.. 신이 원망스러웠어요. 난 정말 무서웠어요. 서스턴에 의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끔찍하게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걸요. 나, 나난.."

그때 야크가 리오의 어깨에 손을 척 얹었다.

"됐어, 리오야. 넌 훌륭했다. 이 동방의 신룡 크리아미드, 작고 보잘것없지만 훌륭한 인간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다는 갑자기 리오를 존중하는 듯한 야크의 행동이 우스웠다.

'왜 저래 저 자식?'

"아, 이런, 왜 이러세요?"

리오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나다는 감격해서 '리오만세!'를 외칠만큼 착하고 순수한 놈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런 분위기를 상당히 싫어했다. 그는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야, 리오. 근데 너 시케랑 사귀니?'

리오는 당황했다.

"무슨소리에요. 시케는 순결을 서약한 사제라구요. 저도 사제구요."

'그렇군. 시케 혼자 짝사랑이라. 불쌍하군 그래.'

리오는 나다의 이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전 사드가 절 놔주고 나서 고민에 빠졌답니다. 너무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사드가 근처에 설치한 고문 장소에 가게되었죠."



그것은 커다랗고 날카로운 나무 꼬챙이들이 땅에 꽂아져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사람들의 사지를 꼬챙이에 꽂아 멀리서 보면 마치 사람들이 공중에 둥둥 떠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온통 피투성이인 채로 신음도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리오가 만약 이대로 도망간다면 마을사람들 모두 저렇게 죽을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한 남자는 리오를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증오였다. 그도 역시 사지가 나무에 꿰여 공중에 떠있었고, 눈 한쪽도 찔려 외눈이었다. 그러나 그 한 개의 빛나는 눈동자는 무섭게 리오를 노려보고 있었다.
리오는 수통에 물을 떠온 뒤 그들에게 물을 먹였다. 그러나 눈이 이상한 광기로 빛나던 그 남자는 머리로 리오가 내미는 수통을 밀어버렸다. 리오는 너무나 슬프고 무서웠다. 그의 눈은 지금 두려움으로 도망가려는 리오를 채찍질하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으윽.."

리오는 그의 머리를 안고 너무 무섭고 미안해서 울었다. 그리고 한참 울고 나자 조금 용기가 생기는 것만 같았다. 그 남자도 울고 있었다.



"그분에게 물을 드리고 나서 저는 완전히 결심하게 되었지요. 도망가지 않기로..."

리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약하게 미소지었다. 야크는 무릎을 딱 치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렇지! 사내 대장부가 도망가서는 안돼지! 그래도 대단하군. 넌 진정한 대장부다!"

리오는 야크의 찬사에 당황했다. 그래서 재빨리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야크님, 저는 겁이 많은 사람에 불과해요. 어쨌든 그렇게 해서 다음날 광장에 나선 후, 사드가 절 재미로 갖고 놀 때.. 그렇게 음식 가운데서 굶고 있을 때 너무 힘들고 외로웠어요.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배도 고프고 목도 너무 마르고.. 사람들은 저를 보고 욕만 하고. 시케는 그때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고, 정말 시케가 아니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거에요."

리오는 그리움이 담긴 눈으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드가 도망가고 시케도 반도 모두 살아났을 때, 전 다시 기절했고 나중에 듣고 보니 사람들은 모두 제가 죽을 거라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시케만이.. 그리고 용병단의 생존자 몇 명만이 시체나 다름없는 저를 마차에 태우고 다니며 온 이타냐의 치유자들을 찾아다녔어요. 그렇게 일년이나 헤맸지요. 그 동안 서서히 나아갔지만 전 혼자서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폐인이었어요. 그런 저를.. 시케는..."

리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시케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에요. 그렇게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나에게 정말 잘해주었어요. 전, 정말.. "

리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두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야크는 고맙다고 울어버리는 리오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아까 리오보고 사내 대장부라고 한 말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럼, 일년 뒤에 누가 고쳐준 거야? 아미앙스의 사제들도 못 고쳐주는 걸 누가 고쳐준다는 거야?'

나다의 말에 리오는 눈물을 닦고 방긋 웃었다. 야크는 잘 울고 잘 웃는 리오가 왠지 아직도 어린아이같다고 여겼다.

"딱 일년이 되었을 때, 스승님을 만났어요. 지금 제가 전쟁터로 찾아다니는 스승님이요. 아.. 스승님...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셨죠. 영혼의 친구도.. 그리고 모든 것을..."

리오는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 곧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결국 시케는 저의 육신의 생명뿐 아니라 영혼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이때쯤 야크가 말을 잘랐다.

"리오야, 오색구름 얘기 다시 해줄래?"

"아, 하늘 위에 뜬 오색구름이요? 하하! 사람들은 저 때문에 떴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세요. 하늘 위의 해는 누구 머리 위에 있지요? 모두의 머리 위에 뜬 거에요. 당시 오색구름은 제 머리 위에 뜬 거라기 보다는 그냥 하늘 위에 떠있었던 거에요."

그러나 리오의 해석에 야크는 동조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분명히 우리 의형제 중 누군가가 널 도와준거야. 너처럼 몸도 약한 인간이 물도 먹지 않고 한 달을 어떻게 버티지? 인간으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분명히 도와준거야."

"그, 그런가요?"

그때 나다가 격하게 소리쳐서 리오는 깜짝 놀랐다.

'흥! 신룡인지 지렁인지 그 새끼들 처음부터 끝까지 재수 없어 죽겠다! 도와줄려면 너도 구출하고 사든가 서스턴인가 하는 악마같은 새끼를 없애버리든지 하지, 구름따위나 띄우고, 니가 물도 못 먹고 헐떡일동안 생명이나 연장시켜 준거냐?'

그러나 나다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야크는 계속해서 나름대로 추리해나갔다.

"그런데 널 당장 구해주지 않은 건, 뭔가 안좋은 상태에 빠졌던 거야. 오색운은 우리 의형제들의 호출신호거든. 다른 형제들이 달려와주길 바란 거야. 그리고 네 생명만 겨우 지켜줄만큼 힘들었던 거지. 뭐지? 인계에서 우리 위대한 신룡이, 그것도 내 의형제 하나가 못당할 정도의 상황이 도대체 뭐지?"

야크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백룡 차이에게 봉인 당한지 몇 백년이라, 형제들 소식을 알 수가 없군. 봉변이라도 당한건가?"

"저.. 적룡님.."

"왜?"

리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의형제고 친구라면서.. 왜 백룡님과 싸운 거지요? 그는 왜 당신을 봉인했지요?"

나다와 리오는 깜짝 놀랐다. 야크의 온몸이 불타오르듯 시뻘개졌다. 게다가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타오르듯이 솟아올랐다.
잠시 그러더니, 야크는 다시 평상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안하다. 놀랬니 리오야?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 단지, 우리는 길이 달랐다. 그 뿐이야."

적룡 야크답지 않게 쓸쓸한 표정이었다. 리오는 그런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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