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완결)장편-프리즘
[프리즘] 1부 2장 무지개빛 구름 (1)
리오나다
2009. 11. 12. 14:35
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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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무지개빛 구름 (1)
서기력 1349년.
나다가 리오와 헤어진지 몇 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겨울이 지나고 한 해가 지났다. 나다는 그 동안에도 계속 전쟁터의 시체를 뒤지고 잡일도 하고 좀도둑질도 하면서 겨우겨우 먹고살았다. 언제나와 같은 생활.
그렇게 떠돌다 해변까지 가게 되었다. 워페어라는, 꽤 큰 해변도시였다.
오랜만에 전쟁터를 지나 활기차게 벅적거리는 도시를 보니 나다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동안 모아놓은 돈을 어떻게 아끼면, 한참은 전쟁터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리라.
초봄이라 아침은 쌀쌀하지만 제법 햇살이 비쳤다. 나다는 돈을 어떻게든 아껴보려고 여관은 생각도 하지 않고 뒷골목을 뒤졌다. 햇빛 잘 비치고 찬바람이 안 새는 구석을 잘 살펴본다. 그렇게 이리저리 뒤지다가 골목 뒷켠에 같은 부랑자들이 오글오글 모여있는 지저분한 골목을 발견했다. 나다는 미리 주워온 천조각이니 종이조각이니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영 자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조막탱이만한 자리를 발견했다. 나다는 워낙 키도 작고 왜소해서 넓은 자리는 필요 없었다.
"에이구구 살 것 같다.."
사지를 좍 펴고 누우니 비록 지저분한 뒷골목 맨바닥이지만 푹신한 침대 부럽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야. 저리비켜!"
"에이 아저씨, 다 같은 처지에 한 칸 좀 씁시다."
괜히 텃세를 부리는 부랑자에게 배실배실 웃으며 말한다. 부랑자는 나다를 흘깃 보더니 다시 드러누웠다.
'거참 드럽네. 지저분한 뒷골목도 다 임자가 있군.'
한동안은 이 커다란 해변도시에서 눌러 붙어 있어야겠다 생각하면서 나다는 곧 골아 떨어졌다.
-어?
꿈속에서 나다는 예전 꿈에서 야크와 싸웠던 흰옷의 검사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텅 비고 쓸쓸한 검은 눈으로 나다를 쳐다보았다. 나다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같이 반갑게 느껴졌다.
-무엇을 찾고 있는가?
흰옷의 검사는 입을 떼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도가 가슴에 울려왔다. 나다는 달빛아래 더욱 어울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입을 떼지 않고 말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꿈이니까.
-무엇인가 나를 갈망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부질없어요. 하지만 더 미치겠는 것은,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흰옷의 검사는 조용히 나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달빛처럼 잔잔했다.
-나는 그대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다는 너무나도 놀라웠다.
-무엇이지요? 무엇이지요?
잠에서 깬 한참동안에도 나다의 귓속엔 자신의 말이 메아리쳤다.
무엇이지요? 무엇이지요?
...도대체 뭐냐구 이 재수 없는 새끼야!
"에이 모르겠다. 오랜만에 바다나 구경해볼까?"
나다는 어슬렁 어슬렁 도시를 배회했다. 길을 모르니 그냥 앞으로 나가다보면 바다가 보이려니 생각한다. 저기 저렇게 파랗게 보이는 수평선.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다가가도 다가가도 바다는 그 모양이고 길도 점점 없어졌다. 발도 아파온다.
도시를 헤메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도 마주쳤다.
"어?"
나다는 꿈속의 흰옷 검사를 거리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른 사람이다. 그는 큰 키에 꿈속의 흰옷검사처럼 굉장히 아름답게 생겼다. 하얀 조약돌처럼 부드러운 피부,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 하지만 새카만 눈동자에는 꿈속에서와 같은 허무가 아니라 생기와 장난기가 넘쳤다. 그리고 꿈속과는 틀리게 그의 흰옷은 굉장히 화려했다. 검도 마찬가지다.
"모험가구나. 돈 많은가보네. 헤, 되게 닮았다."
무심히 지나치고 나서 한참 더 가보니 배가 고파왔다.
'뭘 먹긴 해야되는데. 어디 싼 거 없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다니던 나다는 사람들이 까맣게 모여있는 거리를 발견하고 몹시 기뻐했다. 몇 명의 사제들이 줄줄이 선 거지들에게 빵과 스프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다는 길게 늘어선 줄 뒤켠에 섰다.
"조심해, 도적길드가 뽀작났단다."
"뭐야? 제기럴, 빌어먹기도 힘들겠군. 경비병들이 우리만 볶을거 아니야?"
"근데, 하룻밤 새에 몰살이랜다. 이건 악마의 소행이 분명해."
"아, 악마? 하긴, 도적길드의 성난 오거 존슨도, 쌍칼 데이빗도 다 한가닥 하던 놈들인데."
"악마? 그래, 악마의 짓이야! 어제밤 샤트가 뿔이 여섯 개, 팔이 네 개에 모두 무시무시한 검을 쥔 그림자를 봤다는군."
줄 선 부랑자들은 수근거리며 어수선하게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나다는 도적길드가 망했다는 소문에 왠일인가 싶었다.
'그놈들이 얼마나 지독한 놈들인데 하룻밤만에 망했다고? 이곳 도적길드는 상당히 약했나보다'
드디어 스프를 끓이는 솥이 보이는 지점까지 줄이 줄어들었다. 아직은 차가운 초봄의 공기에 하얀 김을 코로 내뿜으며 부랑자들은 소문을 양념 삼아 질긴 빵을 열심히 씹었다.
이제 다섯 명 남았다.
"시케, 리오 소식은?"
빵을 나눠주던 견습사제의 말에 나다는 귀가 번쩍 뜨였다. 몇 개월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리오'라...
걱정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짧은 금발의,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견습사제였다. 다른 사제들과는 다르게 검게 탄 얼굴과 탄탄한 몸이 마치 검사나 용병같은 인상이다. 빵을 건네주는 손을 보니 굉장히 강인해 보였다. 사제복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아, 아직이야. 도대체 어디로 간거지..."
눈물을 글썽이며 그릇에 스프를 담던 여자 견습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다음 부랑자에게 그릇을 건네줄 때 보니 꽤 귀여운 인상이었다. 조금 가무잡잡한 피부인데 머리카락은 갈색이다. 슬픔에 젖어있는데도 그녀의 눈 역시 강인해 보였다. 손도 무척 거칠다.
빵이 떨어지자 남자 사제는 팔짱을 꼈고 여자 사제만이 스프를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나다의 차례가 되자 솥뚜껑을 덮는다.
"자, 잠깐! 난 아까부터 기다렸다구!"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없어요. 죄송합니다. 다른 줄에 서세요."
나다는 다른 줄을 쳐다보았다. 까마득하다. 또 한참을 기다리라고?
견습사제 두 명이 도구를 챙겨들고 돌아서는데 그 뒤에다 대고 나다가 급하게 외쳤다.
"잠깐! 난 리오를 본적이 있어!"
시케라는 여자 사제는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멈춰 섰다. 그리고 갑자기 솥과 그릇을 다 던져버리고 나다의 손을 꼭 잡으며 외쳤다.
"정말이에요? 리오가 살아있나요? 어딨어요? 무사한가요?"
"에에.. 난 배고파서리..."
주근깨 견습사제가 못마땅한 눈으로 나다를 보았다.
"시케, 거짓말일거야. 다 수작 부리는 거라구."
나다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러나 이타냐에 리오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자가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일단 찔러보기로 했다. 손해볼 건 없잖은가?
"내가 만난 리오란 녀석은.. 음.. 남자야!"
여자 사제가 김이 빠진 얼굴로 나다를 보았다. 남자 사제는 그것 봐라 하는 얼굴로 나다를 보았다. 궁색해진 나다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에에, 그리고 말이야... 단발머리를 한 사제던데..."
반짝이는 여자 사제의 눈을 보자 나다는 맞췄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이타냐의 많고 많은 사제 중에 단발머리는 흔한 것이다. 여전히 남자 사제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이쯤해서 빵이라도 한조각 주면 어디가 덧나냐?'
나다는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표시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정식사제지?"
"네. 맞아요!"
"속지마 시케. 그 정도는 때려맞출 수도 있다구."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남자 사제가 믿지 않자 나다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진짜 리오의 인상착의를 말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름만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얼버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거짓말한 건 아니니까.
"내가 본 사람은 말이우. 약간 더벅거리는 검은색 단발머리에 항상 환하게 웃음짓고, 눈은 항상 웃는 표정인덕에 쭉 찢어져서 작아보이지만 놀라서 둥그렇게 뜰 때는 초록색 눈이 꽤 귀여운 녀석이었다우. 자기 말로는 정식사제라는데 보기엔 꽤 어려보인다오."
여기까지 말하자 주근깨 남자견습사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 정말 리오인가? 리오는 열 아홉이지만 좀 어려보이긴 하지..."
나다는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사제는 뛸 듯이 기뻐하며 물었다.
"리오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이런 횡재가! 나다는 이제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난 긴 여행 끝이라 배고픈데..."
"아! 죄송합니다. 따라오세요! 저희가 대접해드리지요."
시케라는 여자사제는 몹시 기뻐하며 앞장섰다. 나다는 다시 다른 줄 뒤끝에 서야하는 가련한 부랑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사제들의 뒤를 의기양양하게 따라갔다.
거지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견습사제들은 부랑자들이 잘 얼어죽는 겨울에 도시에 와서 몇 개월간 봉사를 하는 아미앙스 수도단 소속의 임시단체에 있었다. 셋은 숙소로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다는 시케가 준 빵을 맛있게 우걱거리며 그들의 질문공세에 느긋한 얼굴로 답변해주었다.
하지만 나다는 그들이 말하는 리오가 자신이 알고 있는 리오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대강 비슷하게 뭉갰다. 시케는 마음이 급한 듯 나다가 식사를 마치기 전인데도 질문했다.
"리오는 살아 있나요?"
'만약에 느네가 아는 리오가 내가 아는 리오라면 무지 걱정되겠지. 치유능력도 없고 칼도 못쓰고 힘도 약한 녀석이 위험한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데."
나다는 빵을 씹으며 두 사람의 애를 태웠다.
"어떻거 같애요? 우적우적"
시케는 울듯한 표정이 되었다. 주근깨 남자사제는 울컥 화를 내려 한다. 시케가 그의 주먹을 잡고 "참아, 반."하고 말렸다. 나다는 굉장히 주먹이 세 보이는 반을 보고 꿀꺽 빵을 삼켰다. 그리고 능글능글 얼굴을 바꾼 후 말했다.
"음.. 어디부터 얘길 할까. 그러니까 내가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어있는걸 봤거든요?"
시케와 반은 잔뜩 긴장된 얼굴로 나다를 쳐다보았다.
"에에, 거기서 시체들의 버려진 유품들을 정리해 주다가..."
반은 얼굴을 찌푸리고 경멸에 찬 시선으로 나다를 쳐다보았다. '시체나 뒤지고 다니는 놈이로군.'하는 표정이었다. 그 시선 하나로도 충분히 나다는 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여간 뭐. 시체를 하나 묻어 줬다오. 아, 물 있수?"
시케와 반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시케는 떨리는 손으로 수통을 내밀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그 시체가 혹시.. 혹시..?"
애태워주기 위해 나다는 일부러 천천히 물을 마셨다.
'얘들아, 한 상 걸판지게 먹고 용돈까지 얻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단다. 밑천 다 떨어지면 너희가 나한테 물 한 모금 주겠니?
그때 왠 사내가 험악한 상처투성이의 얼굴로 거대한 전투용 도끼를 들고 지나가면서 나다를 노려보았다.
"케켁!"
그저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다는 사래가 들렸다. 반은 저만큼 지나가버린 사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요즈음 이 도시가 왜 이러는지..."
이 도시가 다른 도시보다 부쩍 괴상한 여행자들이 많은 것을 보고 나다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나다의 경험으로 봐서는 대개가 아름다운 직업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이거 빨리 떠나야겠는데..'
"그래서요? 그 시체가 리오는 아니겠죠? 네?"
나다는 여자사제를 돌아본 후 식사는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더니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되었다. 시케와 반은 갑자기 기절해버린 나다를 보고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반, 원래 위중한 병자였나봐!"
반은 나다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나다는 비몽사몽, 또 꿈을 꾸고 있었다.
저 멀리 무엇인가가 보인다. 흐릿하다.
더 가까이 가보자...
리오였다. 그리고 붉은 머리의 야크가 모닥불을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리오의 상처는 이미 다 나아 있었다. 그는 싱글거리며 모닥불에 가지를 넣고 있었다. 거대한 근육덩어리 야크는 리오와 잡담을 하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흥, 쿵짝이 잘 맞는군.'
나다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리오는 깜짝 놀라면서 외쳤다.
"나다?"
야크는 의아한 눈으로 리오를 보았다. 리오는 주변을 휘휘 돌아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쑥스럽게 웃고는 모닥불 앞에 앉아 다시 작은 가지를 던져 넣었다.
"야크님은 참 재미있는 일을 많이 겪으셨군요. 무용담이 정말 멋져요. 그렇지만 이야기로 들으니까 멋지지, 굉장히 위험한 일들이군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야크는 쿠하하 웃었다.
"위험이라. 위험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난 지루한 건 못 참거든. 내가 일을 찾아 쫓아다니는 셈이지. 덕분에 이런저런 사람들도 만나고 좋았어."
리오는 미소지으면서 맞장구쳤다.
"맞아요. 활동적인 분들을 보면 굉장히 부러워요. 저는 수줍음이 좀 많은 편이거든요."
그때 나다는 또 속으로 빈정거렸다.
'비위맞추기는. 아부도 작작해라.'
리오는 차를 마시다가 다시 흠칫하니 멈췄다. 야크가 또 의아하게 쳐다볼 때 즈음 리오는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허공을 보며 외쳤다.
"나다? 나다에요? 그거 저한테 한말이에요?"
분명히 나다는 빈정거렸는데도 불구하고 리오는 몹시 기뻐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리오를 보고 야크는 고개를 꼬면서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꿈을 꾸는 나다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리오는 야크에게 손짓발짓하며 열심히 설명했다.
"야크님, 저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의 음성과 감정을 느꼈었어요. 일방적인 것이라 그에게 말도 걸 수 없었고 그는 저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죠. 어릴 땐 제 상상이거나 그런
건 줄 알았지만 너무 생생했거든요. 그런데 전쟁터에서 만난 스승님께서 그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셨죠. 그는 저의 소울메이트래요. 영혼을 나눈 친구, 그래서 그를 만나면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야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잉? 그것 참 멋진데! 그를 만났어?"
"네! 그가 바로 나다에요!"
야크는 으윽,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리오는 얼굴을 발갛게 상기시킨 채 기쁨으로 눈을 반짝였다. 야크가 실망을 하건 말건 리오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나다를 만났을 때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속을 다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는 절 싫어했죠. 믿어주지도 않았구요.. 하지만, 방금 또 나다의 마음을 느꼈는데요, 그는 저에게 말을 걸고 있었어요! 지금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절 의식했다구요! 아, 이럴수가. 정말 기뻐요!"
"그런 놈이 소울메이트면 난 굉장히 슬플 것 같군."
불퉁하게 말한 후 야크는 후룩, 차를 마셨다. 하지만 리오는 야크의 말에 상관 않고 허공을 향해 외쳤다.
"나다! 지금 날 느껴요? 대답해줘요!"
나다는 꿈속에서도 미친 짓을 하는 리오가 우스웠다.
'희안한 꿈이군. 꿈꾸면서 이건 꿈이라고 아는 것도 우습고, 꿈속에서조차 내 마음을 읽어버리는 저 미친 녀석도 우습고. 캬캬캬!'
그때 리오가 흠칫 하더니 말했다.
"나다 지금 자요? 꿈꾸는 거에요? 내 목소리 들려요?"
나다는 잠자코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도 속을 읽는 리오가 기분이 나빴다. 리오는 한참 허공을 대고 외치다가 풀이 죽어서 다시 모닥불에 잔가지를 던졌다.
"아마 나다는 잠을 자고 있나봐요."
붉은 모닥불이 야크의 붉은 눈동자를 비추자 마치 이글거리는 것만 같았다. 나다는 섬뜩했다. 그러나 리오는 그런 나다의 마음을 읽고는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지고 야크에게 말했다.
"나다는 잠을 자고 있어요. 그는 수련을 한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 아마 잠에 들었을 때 꿈처럼 저의 목소리를 듣나봐요. 꿈이 없는 수면상태란 모든 생각과 자아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상태라고..."
야크는 솥뚜껑처럼 큰 손을 들어 리오의 말을 막았다.
"넌 서방 놈인데 동방단어를 꽤 쓰는구나. 전부터 느낀 건데 말이야, 인간들끼리는 동서남북 네 방위가 서로 교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지식을 익혔지?"
리오는 쑥스럽게 웃었다.
"책에서 봤어요. 제가 자란 수도원에는 아주 커다란 장서관이 있답니다. 거기서 봤지요."
"음, 하긴 원칙적으론 교류가 불가하지만 완전히 단절되었다기엔 무리니까. 그래도 너희 인간들에게는 희귀한 지식일텐데."
"동방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리오의 말에 야크는 피시시 웃었다.
"뭐, 사실 마룡석에 지혜나 지식도 다 봉인돼버려서. 별로 해줄 얘긴 없겠다."
"아니에요, 정말 얼마 안 되는 기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걸요."
둘은 다시 나다가 알지 못할 동방의 지식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다는 지겨워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리오의 얼굴을 봐서 그런지 몹시 반가웠다.
'영혼을 나눈 친구라.. 영혼을 나눈 친구...'
갑자기 몸에 충격이 와서 나다는 잠에서 깼다. 업었던 나다를 소파에 내던진 반은 중얼거리며 투덜거렸다.
"윽. 더럽게 등에다가 침을 흘리다니. 기절한 게 아니고 잠자고 있잖아?"
나다는 반이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아 노려보았다. 그런데 배에서 쪼로록 소리가 난다. 시케는 한 상 그득히 차려주었다. 염치고 뭐고 없는 나다는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웠다.
"그러니까 리오 사제님은..."
"우걱우걱"
이 모양이니 두 사람은 옆에서 안절부절 하기만 했고 나다에게서 정보를 하나도 얻어내지 못했다. 먹다보니 접시가 옆에 산같이 쌓인다. 그런데 나다는 다 먹고 나자 꾸벅꾸벅 졸았다. 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그는 나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또 자? 당신 정말 사기꾼 아니야? 그러고 보니 수상해!"
'저놈 사제 아니야. 내가 장담한다.'
나다는 속으로 반을 마구 욕했다. 옆에서는 시케가 반을 계속 달랬다.
"반, 그만해. 그럴 수도 있지 뭐."
기지개를 쫙 편 후 나다가 시케에게 말했다.
"음, 잠이 오는데, 샤워라도 하면 잠이 깰 거 같수다."
반은 나다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시케는 나다를 친절하게 샤워장으로 안내했다. 이들이 나다를 데려온 것은 견습사제들의 숙소였다. 반과 시케도 평민견습사제였기에 굳이 나다는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제더라도 견습사제면 지위란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게다가 평민 견습사제면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나다는 샤워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견습사제는 아무나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식사제되기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결국 평민견습사제는 사제들을 돌보는 잡일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평민인 리오가 어린 나이에 정식사제인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리오가 치유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치유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정식사제가 되었을까? 아마 나다가 아는 리오는 사기꾼이거나 정말 자신이 정식사제라고 믿는 미친놈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저들이 말하는 리오와 나다가 본 리오는 다른 사람일 것 같았다. 나다는 왠지 울적해졌다. 그는 리오를 만난 후 한번도 씻지 않은 몸을 개운하게 씻고는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나왔다. 그런데 샤워장 밖에서는 시케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저 여자견습사제가 말하는 리오란 놈은 어떤 놈이길래 이 아가씨가 이렇게 초조해 할까?'
이미 그는 시케가 알고 있는 리오와 자신이 알고 있는 리오가 다른 사람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다는 시케를 보고 무례한 말투로 물었다.
"사제 아가씨, 리오가 혹시 애인이우?"
느닷없는 질문에 시케의 얼굴이 벌개졌다.
"무, 무슨 소리에요?"
"아, 참참참, 사제면 결혼도 안하지. 그런데 안달하는 품이 꼭 애인기다리는 아가씨 같아서 말이우."
시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지만 곧 애원하듯이 부탁했다.
"제발 가르쳐주세요! 리오사제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나다는 왠지 미안했다. 한 상 잘 받아먹었겠다 몸도 씻었겠다 받아먹을 대로 받아먹었는데 더 이상 뭘 뜯어내기가 좀 그렇다. 좋은 사람을 속여먹는 것은 별로 상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저기 사제님. 내가 알고 있는 리오가 당신이 알고있는 리오가 맞는지 의문이우."
"네?"
시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다는 왠지 그 모습이 리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있잖우, 내가 만난 놈은 사기꾼일지도 몰라요. 그놈은 자신이 정식사제라면서 치유력은 하나도 없다 그랬거든요. 치유력 없는 사제라니 말이 돼요? 아미앙스 수도단은 특히나 치유력을 중시하는데......"
뺨 한대 맞을 각오를 하고 중얼중얼 진실을 말해준 나다는 고개를 숙이고 말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시케가 울고 있었다.
"으윽, 미안해요! 하긴 초록빛 눈을 가진 검은 단발 머리의 리오 사제란게 희안하게 비슷하긴 하지만, 그 정도 조건이면 비슷한 사람 일수도 있죠. 세상은 넓으니까 말요. 하지만 난 일부러 속인 게 아니라구. 난 정말 리오란 놈을 봤으니까!"
시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리오 맞아요. 리오 크리프너... 치유력이 없는 정식사제. 그가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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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무지개빛 구름 (1)
서기력 1349년.
나다가 리오와 헤어진지 몇 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겨울이 지나고 한 해가 지났다. 나다는 그 동안에도 계속 전쟁터의 시체를 뒤지고 잡일도 하고 좀도둑질도 하면서 겨우겨우 먹고살았다. 언제나와 같은 생활.
그렇게 떠돌다 해변까지 가게 되었다. 워페어라는, 꽤 큰 해변도시였다.
오랜만에 전쟁터를 지나 활기차게 벅적거리는 도시를 보니 나다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동안 모아놓은 돈을 어떻게 아끼면, 한참은 전쟁터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리라.
초봄이라 아침은 쌀쌀하지만 제법 햇살이 비쳤다. 나다는 돈을 어떻게든 아껴보려고 여관은 생각도 하지 않고 뒷골목을 뒤졌다. 햇빛 잘 비치고 찬바람이 안 새는 구석을 잘 살펴본다. 그렇게 이리저리 뒤지다가 골목 뒷켠에 같은 부랑자들이 오글오글 모여있는 지저분한 골목을 발견했다. 나다는 미리 주워온 천조각이니 종이조각이니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영 자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조막탱이만한 자리를 발견했다. 나다는 워낙 키도 작고 왜소해서 넓은 자리는 필요 없었다.
"에이구구 살 것 같다.."
사지를 좍 펴고 누우니 비록 지저분한 뒷골목 맨바닥이지만 푹신한 침대 부럽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야. 저리비켜!"
"에이 아저씨, 다 같은 처지에 한 칸 좀 씁시다."
괜히 텃세를 부리는 부랑자에게 배실배실 웃으며 말한다. 부랑자는 나다를 흘깃 보더니 다시 드러누웠다.
'거참 드럽네. 지저분한 뒷골목도 다 임자가 있군.'
한동안은 이 커다란 해변도시에서 눌러 붙어 있어야겠다 생각하면서 나다는 곧 골아 떨어졌다.
-어?
꿈속에서 나다는 예전 꿈에서 야크와 싸웠던 흰옷의 검사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텅 비고 쓸쓸한 검은 눈으로 나다를 쳐다보았다. 나다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같이 반갑게 느껴졌다.
-무엇을 찾고 있는가?
흰옷의 검사는 입을 떼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도가 가슴에 울려왔다. 나다는 달빛아래 더욱 어울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입을 떼지 않고 말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꿈이니까.
-무엇인가 나를 갈망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부질없어요. 하지만 더 미치겠는 것은,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흰옷의 검사는 조용히 나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달빛처럼 잔잔했다.
-나는 그대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다는 너무나도 놀라웠다.
-무엇이지요? 무엇이지요?
잠에서 깬 한참동안에도 나다의 귓속엔 자신의 말이 메아리쳤다.
무엇이지요? 무엇이지요?
...도대체 뭐냐구 이 재수 없는 새끼야!
"에이 모르겠다. 오랜만에 바다나 구경해볼까?"
나다는 어슬렁 어슬렁 도시를 배회했다. 길을 모르니 그냥 앞으로 나가다보면 바다가 보이려니 생각한다. 저기 저렇게 파랗게 보이는 수평선.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다가가도 다가가도 바다는 그 모양이고 길도 점점 없어졌다. 발도 아파온다.
도시를 헤메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도 마주쳤다.
"어?"
나다는 꿈속의 흰옷 검사를 거리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른 사람이다. 그는 큰 키에 꿈속의 흰옷검사처럼 굉장히 아름답게 생겼다. 하얀 조약돌처럼 부드러운 피부,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 하지만 새카만 눈동자에는 꿈속에서와 같은 허무가 아니라 생기와 장난기가 넘쳤다. 그리고 꿈속과는 틀리게 그의 흰옷은 굉장히 화려했다. 검도 마찬가지다.
"모험가구나. 돈 많은가보네. 헤, 되게 닮았다."
무심히 지나치고 나서 한참 더 가보니 배가 고파왔다.
'뭘 먹긴 해야되는데. 어디 싼 거 없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다니던 나다는 사람들이 까맣게 모여있는 거리를 발견하고 몹시 기뻐했다. 몇 명의 사제들이 줄줄이 선 거지들에게 빵과 스프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다는 길게 늘어선 줄 뒤켠에 섰다.
"조심해, 도적길드가 뽀작났단다."
"뭐야? 제기럴, 빌어먹기도 힘들겠군. 경비병들이 우리만 볶을거 아니야?"
"근데, 하룻밤 새에 몰살이랜다. 이건 악마의 소행이 분명해."
"아, 악마? 하긴, 도적길드의 성난 오거 존슨도, 쌍칼 데이빗도 다 한가닥 하던 놈들인데."
"악마? 그래, 악마의 짓이야! 어제밤 샤트가 뿔이 여섯 개, 팔이 네 개에 모두 무시무시한 검을 쥔 그림자를 봤다는군."
줄 선 부랑자들은 수근거리며 어수선하게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나다는 도적길드가 망했다는 소문에 왠일인가 싶었다.
'그놈들이 얼마나 지독한 놈들인데 하룻밤만에 망했다고? 이곳 도적길드는 상당히 약했나보다'
드디어 스프를 끓이는 솥이 보이는 지점까지 줄이 줄어들었다. 아직은 차가운 초봄의 공기에 하얀 김을 코로 내뿜으며 부랑자들은 소문을 양념 삼아 질긴 빵을 열심히 씹었다.
이제 다섯 명 남았다.
"시케, 리오 소식은?"
빵을 나눠주던 견습사제의 말에 나다는 귀가 번쩍 뜨였다. 몇 개월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리오'라...
걱정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짧은 금발의,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견습사제였다. 다른 사제들과는 다르게 검게 탄 얼굴과 탄탄한 몸이 마치 검사나 용병같은 인상이다. 빵을 건네주는 손을 보니 굉장히 강인해 보였다. 사제복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아, 아직이야. 도대체 어디로 간거지..."
눈물을 글썽이며 그릇에 스프를 담던 여자 견습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다음 부랑자에게 그릇을 건네줄 때 보니 꽤 귀여운 인상이었다. 조금 가무잡잡한 피부인데 머리카락은 갈색이다. 슬픔에 젖어있는데도 그녀의 눈 역시 강인해 보였다. 손도 무척 거칠다.
빵이 떨어지자 남자 사제는 팔짱을 꼈고 여자 사제만이 스프를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나다의 차례가 되자 솥뚜껑을 덮는다.
"자, 잠깐! 난 아까부터 기다렸다구!"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없어요. 죄송합니다. 다른 줄에 서세요."
나다는 다른 줄을 쳐다보았다. 까마득하다. 또 한참을 기다리라고?
견습사제 두 명이 도구를 챙겨들고 돌아서는데 그 뒤에다 대고 나다가 급하게 외쳤다.
"잠깐! 난 리오를 본적이 있어!"
시케라는 여자 사제는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멈춰 섰다. 그리고 갑자기 솥과 그릇을 다 던져버리고 나다의 손을 꼭 잡으며 외쳤다.
"정말이에요? 리오가 살아있나요? 어딨어요? 무사한가요?"
"에에.. 난 배고파서리..."
주근깨 견습사제가 못마땅한 눈으로 나다를 보았다.
"시케, 거짓말일거야. 다 수작 부리는 거라구."
나다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러나 이타냐에 리오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자가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일단 찔러보기로 했다. 손해볼 건 없잖은가?
"내가 만난 리오란 녀석은.. 음.. 남자야!"
여자 사제가 김이 빠진 얼굴로 나다를 보았다. 남자 사제는 그것 봐라 하는 얼굴로 나다를 보았다. 궁색해진 나다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에에, 그리고 말이야... 단발머리를 한 사제던데..."
반짝이는 여자 사제의 눈을 보자 나다는 맞췄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이타냐의 많고 많은 사제 중에 단발머리는 흔한 것이다. 여전히 남자 사제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이쯤해서 빵이라도 한조각 주면 어디가 덧나냐?'
나다는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표시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정식사제지?"
"네. 맞아요!"
"속지마 시케. 그 정도는 때려맞출 수도 있다구."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남자 사제가 믿지 않자 나다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진짜 리오의 인상착의를 말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름만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얼버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거짓말한 건 아니니까.
"내가 본 사람은 말이우. 약간 더벅거리는 검은색 단발머리에 항상 환하게 웃음짓고, 눈은 항상 웃는 표정인덕에 쭉 찢어져서 작아보이지만 놀라서 둥그렇게 뜰 때는 초록색 눈이 꽤 귀여운 녀석이었다우. 자기 말로는 정식사제라는데 보기엔 꽤 어려보인다오."
여기까지 말하자 주근깨 남자견습사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 정말 리오인가? 리오는 열 아홉이지만 좀 어려보이긴 하지..."
나다는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사제는 뛸 듯이 기뻐하며 물었다.
"리오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이런 횡재가! 나다는 이제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난 긴 여행 끝이라 배고픈데..."
"아! 죄송합니다. 따라오세요! 저희가 대접해드리지요."
시케라는 여자사제는 몹시 기뻐하며 앞장섰다. 나다는 다시 다른 줄 뒤끝에 서야하는 가련한 부랑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사제들의 뒤를 의기양양하게 따라갔다.
거지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견습사제들은 부랑자들이 잘 얼어죽는 겨울에 도시에 와서 몇 개월간 봉사를 하는 아미앙스 수도단 소속의 임시단체에 있었다. 셋은 숙소로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다는 시케가 준 빵을 맛있게 우걱거리며 그들의 질문공세에 느긋한 얼굴로 답변해주었다.
하지만 나다는 그들이 말하는 리오가 자신이 알고 있는 리오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대강 비슷하게 뭉갰다. 시케는 마음이 급한 듯 나다가 식사를 마치기 전인데도 질문했다.
"리오는 살아 있나요?"
'만약에 느네가 아는 리오가 내가 아는 리오라면 무지 걱정되겠지. 치유능력도 없고 칼도 못쓰고 힘도 약한 녀석이 위험한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데."
나다는 빵을 씹으며 두 사람의 애를 태웠다.
"어떻거 같애요? 우적우적"
시케는 울듯한 표정이 되었다. 주근깨 남자사제는 울컥 화를 내려 한다. 시케가 그의 주먹을 잡고 "참아, 반."하고 말렸다. 나다는 굉장히 주먹이 세 보이는 반을 보고 꿀꺽 빵을 삼켰다. 그리고 능글능글 얼굴을 바꾼 후 말했다.
"음.. 어디부터 얘길 할까. 그러니까 내가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어있는걸 봤거든요?"
시케와 반은 잔뜩 긴장된 얼굴로 나다를 쳐다보았다.
"에에, 거기서 시체들의 버려진 유품들을 정리해 주다가..."
반은 얼굴을 찌푸리고 경멸에 찬 시선으로 나다를 쳐다보았다. '시체나 뒤지고 다니는 놈이로군.'하는 표정이었다. 그 시선 하나로도 충분히 나다는 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여간 뭐. 시체를 하나 묻어 줬다오. 아, 물 있수?"
시케와 반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시케는 떨리는 손으로 수통을 내밀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그 시체가 혹시.. 혹시..?"
애태워주기 위해 나다는 일부러 천천히 물을 마셨다.
'얘들아, 한 상 걸판지게 먹고 용돈까지 얻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단다. 밑천 다 떨어지면 너희가 나한테 물 한 모금 주겠니?
그때 왠 사내가 험악한 상처투성이의 얼굴로 거대한 전투용 도끼를 들고 지나가면서 나다를 노려보았다.
"케켁!"
그저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다는 사래가 들렸다. 반은 저만큼 지나가버린 사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요즈음 이 도시가 왜 이러는지..."
이 도시가 다른 도시보다 부쩍 괴상한 여행자들이 많은 것을 보고 나다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나다의 경험으로 봐서는 대개가 아름다운 직업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이거 빨리 떠나야겠는데..'
"그래서요? 그 시체가 리오는 아니겠죠? 네?"
나다는 여자사제를 돌아본 후 식사는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더니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되었다. 시케와 반은 갑자기 기절해버린 나다를 보고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반, 원래 위중한 병자였나봐!"
반은 나다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나다는 비몽사몽, 또 꿈을 꾸고 있었다.
저 멀리 무엇인가가 보인다. 흐릿하다.
더 가까이 가보자...
리오였다. 그리고 붉은 머리의 야크가 모닥불을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리오의 상처는 이미 다 나아 있었다. 그는 싱글거리며 모닥불에 가지를 넣고 있었다. 거대한 근육덩어리 야크는 리오와 잡담을 하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흥, 쿵짝이 잘 맞는군.'
나다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리오는 깜짝 놀라면서 외쳤다.
"나다?"
야크는 의아한 눈으로 리오를 보았다. 리오는 주변을 휘휘 돌아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쑥스럽게 웃고는 모닥불 앞에 앉아 다시 작은 가지를 던져 넣었다.
"야크님은 참 재미있는 일을 많이 겪으셨군요. 무용담이 정말 멋져요. 그렇지만 이야기로 들으니까 멋지지, 굉장히 위험한 일들이군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야크는 쿠하하 웃었다.
"위험이라. 위험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난 지루한 건 못 참거든. 내가 일을 찾아 쫓아다니는 셈이지. 덕분에 이런저런 사람들도 만나고 좋았어."
리오는 미소지으면서 맞장구쳤다.
"맞아요. 활동적인 분들을 보면 굉장히 부러워요. 저는 수줍음이 좀 많은 편이거든요."
그때 나다는 또 속으로 빈정거렸다.
'비위맞추기는. 아부도 작작해라.'
리오는 차를 마시다가 다시 흠칫하니 멈췄다. 야크가 또 의아하게 쳐다볼 때 즈음 리오는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허공을 보며 외쳤다.
"나다? 나다에요? 그거 저한테 한말이에요?"
분명히 나다는 빈정거렸는데도 불구하고 리오는 몹시 기뻐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리오를 보고 야크는 고개를 꼬면서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꿈을 꾸는 나다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리오는 야크에게 손짓발짓하며 열심히 설명했다.
"야크님, 저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의 음성과 감정을 느꼈었어요. 일방적인 것이라 그에게 말도 걸 수 없었고 그는 저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죠. 어릴 땐 제 상상이거나 그런
건 줄 알았지만 너무 생생했거든요. 그런데 전쟁터에서 만난 스승님께서 그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셨죠. 그는 저의 소울메이트래요. 영혼을 나눈 친구, 그래서 그를 만나면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야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잉? 그것 참 멋진데! 그를 만났어?"
"네! 그가 바로 나다에요!"
야크는 으윽,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리오는 얼굴을 발갛게 상기시킨 채 기쁨으로 눈을 반짝였다. 야크가 실망을 하건 말건 리오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나다를 만났을 때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속을 다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는 절 싫어했죠. 믿어주지도 않았구요.. 하지만, 방금 또 나다의 마음을 느꼈는데요, 그는 저에게 말을 걸고 있었어요! 지금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절 의식했다구요! 아, 이럴수가. 정말 기뻐요!"
"그런 놈이 소울메이트면 난 굉장히 슬플 것 같군."
불퉁하게 말한 후 야크는 후룩, 차를 마셨다. 하지만 리오는 야크의 말에 상관 않고 허공을 향해 외쳤다.
"나다! 지금 날 느껴요? 대답해줘요!"
나다는 꿈속에서도 미친 짓을 하는 리오가 우스웠다.
'희안한 꿈이군. 꿈꾸면서 이건 꿈이라고 아는 것도 우습고, 꿈속에서조차 내 마음을 읽어버리는 저 미친 녀석도 우습고. 캬캬캬!'
그때 리오가 흠칫 하더니 말했다.
"나다 지금 자요? 꿈꾸는 거에요? 내 목소리 들려요?"
나다는 잠자코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도 속을 읽는 리오가 기분이 나빴다. 리오는 한참 허공을 대고 외치다가 풀이 죽어서 다시 모닥불에 잔가지를 던졌다.
"아마 나다는 잠을 자고 있나봐요."
붉은 모닥불이 야크의 붉은 눈동자를 비추자 마치 이글거리는 것만 같았다. 나다는 섬뜩했다. 그러나 리오는 그런 나다의 마음을 읽고는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지고 야크에게 말했다.
"나다는 잠을 자고 있어요. 그는 수련을 한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 아마 잠에 들었을 때 꿈처럼 저의 목소리를 듣나봐요. 꿈이 없는 수면상태란 모든 생각과 자아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상태라고..."
야크는 솥뚜껑처럼 큰 손을 들어 리오의 말을 막았다.
"넌 서방 놈인데 동방단어를 꽤 쓰는구나. 전부터 느낀 건데 말이야, 인간들끼리는 동서남북 네 방위가 서로 교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지식을 익혔지?"
리오는 쑥스럽게 웃었다.
"책에서 봤어요. 제가 자란 수도원에는 아주 커다란 장서관이 있답니다. 거기서 봤지요."
"음, 하긴 원칙적으론 교류가 불가하지만 완전히 단절되었다기엔 무리니까. 그래도 너희 인간들에게는 희귀한 지식일텐데."
"동방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리오의 말에 야크는 피시시 웃었다.
"뭐, 사실 마룡석에 지혜나 지식도 다 봉인돼버려서. 별로 해줄 얘긴 없겠다."
"아니에요, 정말 얼마 안 되는 기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걸요."
둘은 다시 나다가 알지 못할 동방의 지식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다는 지겨워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리오의 얼굴을 봐서 그런지 몹시 반가웠다.
'영혼을 나눈 친구라.. 영혼을 나눈 친구...'
갑자기 몸에 충격이 와서 나다는 잠에서 깼다. 업었던 나다를 소파에 내던진 반은 중얼거리며 투덜거렸다.
"윽. 더럽게 등에다가 침을 흘리다니. 기절한 게 아니고 잠자고 있잖아?"
나다는 반이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아 노려보았다. 그런데 배에서 쪼로록 소리가 난다. 시케는 한 상 그득히 차려주었다. 염치고 뭐고 없는 나다는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웠다.
"그러니까 리오 사제님은..."
"우걱우걱"
이 모양이니 두 사람은 옆에서 안절부절 하기만 했고 나다에게서 정보를 하나도 얻어내지 못했다. 먹다보니 접시가 옆에 산같이 쌓인다. 그런데 나다는 다 먹고 나자 꾸벅꾸벅 졸았다. 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그는 나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또 자? 당신 정말 사기꾼 아니야? 그러고 보니 수상해!"
'저놈 사제 아니야. 내가 장담한다.'
나다는 속으로 반을 마구 욕했다. 옆에서는 시케가 반을 계속 달랬다.
"반, 그만해. 그럴 수도 있지 뭐."
기지개를 쫙 편 후 나다가 시케에게 말했다.
"음, 잠이 오는데, 샤워라도 하면 잠이 깰 거 같수다."
반은 나다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시케는 나다를 친절하게 샤워장으로 안내했다. 이들이 나다를 데려온 것은 견습사제들의 숙소였다. 반과 시케도 평민견습사제였기에 굳이 나다는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제더라도 견습사제면 지위란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게다가 평민 견습사제면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나다는 샤워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견습사제는 아무나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식사제되기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결국 평민견습사제는 사제들을 돌보는 잡일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평민인 리오가 어린 나이에 정식사제인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리오가 치유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치유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정식사제가 되었을까? 아마 나다가 아는 리오는 사기꾼이거나 정말 자신이 정식사제라고 믿는 미친놈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저들이 말하는 리오와 나다가 본 리오는 다른 사람일 것 같았다. 나다는 왠지 울적해졌다. 그는 리오를 만난 후 한번도 씻지 않은 몸을 개운하게 씻고는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나왔다. 그런데 샤워장 밖에서는 시케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저 여자견습사제가 말하는 리오란 놈은 어떤 놈이길래 이 아가씨가 이렇게 초조해 할까?'
이미 그는 시케가 알고 있는 리오와 자신이 알고 있는 리오가 다른 사람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다는 시케를 보고 무례한 말투로 물었다.
"사제 아가씨, 리오가 혹시 애인이우?"
느닷없는 질문에 시케의 얼굴이 벌개졌다.
"무, 무슨 소리에요?"
"아, 참참참, 사제면 결혼도 안하지. 그런데 안달하는 품이 꼭 애인기다리는 아가씨 같아서 말이우."
시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지만 곧 애원하듯이 부탁했다.
"제발 가르쳐주세요! 리오사제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나다는 왠지 미안했다. 한 상 잘 받아먹었겠다 몸도 씻었겠다 받아먹을 대로 받아먹었는데 더 이상 뭘 뜯어내기가 좀 그렇다. 좋은 사람을 속여먹는 것은 별로 상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저기 사제님. 내가 알고 있는 리오가 당신이 알고있는 리오가 맞는지 의문이우."
"네?"
시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다는 왠지 그 모습이 리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있잖우, 내가 만난 놈은 사기꾼일지도 몰라요. 그놈은 자신이 정식사제라면서 치유력은 하나도 없다 그랬거든요. 치유력 없는 사제라니 말이 돼요? 아미앙스 수도단은 특히나 치유력을 중시하는데......"
뺨 한대 맞을 각오를 하고 중얼중얼 진실을 말해준 나다는 고개를 숙이고 말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시케가 울고 있었다.
"으윽, 미안해요! 하긴 초록빛 눈을 가진 검은 단발 머리의 리오 사제란게 희안하게 비슷하긴 하지만, 그 정도 조건이면 비슷한 사람 일수도 있죠. 세상은 넓으니까 말요. 하지만 난 일부러 속인 게 아니라구. 난 정말 리오란 놈을 봤으니까!"
시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리오 맞아요. 리오 크리프너... 치유력이 없는 정식사제. 그가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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