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완결)장편-프리즘

[프리즘] 1부 1장 영혼을 나눈 친구 (3)

리오나다 2009. 11. 9. 14:23
게시자 : 갠달프  게시일 : 2001년 10월 3일  


1장. 영혼을 나눈 친구 (3)


아침에 나다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커다랗게 보인 것은 빙긋이 웃는 사제의 얼굴이었다. 나다는 옆으로 굴러서 좀 떨어진 다음 발딱 일어났다.
리오는 말없이 수건을 어깨에 메고 나다의 앞에 세숫물을 내밀었다. 식탁에는 이미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음식이 다 식었어요. 아침식사라기엔 너무 늦고 점심식사라기엔 너무 이르네요. 많이 피곤했나봐요."

정겹게 종알거리는 리오의 말에도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을정도로 나다는 어이가 없었다. 껄끄럽다. 이런 대접은 어디서든 받아본적이 없었다.
나다가 식사를 하는 동안 리오는 의자에 앉아 보기에도 고루해보이는 두텁고 커다란 책을 읽었다. 빵을 씹으면서 나다는 빨리 이 껄끄러운 방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엔 뭐에 홀렸는지 사제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겠다고 말해버렸지만, 나다는 이젠 겁이 났다. 잘못해서 위험한 일에 휘말릴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벌써 휘말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다의 생각을 이미 읽었는지 리오사제는 식사를 마친 나다가 한마디 말도 없이 푸대자루를 메고 밖으로 나갈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책만 읽고 있었다. 문이 쾅 닫기자 리오는 고개를 숙여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다는 일단 마을에서 좀 떨어진 졸졸거리는 시냇가로 가서 냄새 고약한 물건들을 씻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푸대를 박박 빨고는 물건들을 햇빛에 말린 뒤 다시 어깨에 지고 마을로 들어갔다.
이런데서 팔기보다는 좀 더 내륙쪽의 도시로 들어가야 값을 제대로 받을수 있겠지만, 일단 이 푸대는 너무 무거웠다. 진짜 돈이 될만하고 가벼운 반지같은 것들만 남기고 나머지 무거운 칼 따위는 팔아버렸다. 다행히 이 자그만 마을엔 무기상이 있었다. 삼개월에 한번 도시에서 마차한대가 오간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 마차는 이미 며칠전 도시로 떠났고, 설사 마차가 온다 하더라도 험한 길을 오가는 비싼 마차인지라 얻어타는 것은 어림도 없을 듯 했다.
어느정도 돈이 생기자 나다는 마음이 놓였다. 옷을 입기 전에 전대부터 허리에 둘러놓는다. 길 떠날 것을 대비해 푸대에는 마른 고기와 빵을 채워놓았고 수통도 넉넉히 채워놓았다.
그렇게 일처리를 말끔히 하고 여관으로 들어올 때 나다는 잠깐 갈등했다. 다시 그 사제의 방에 들어갈 것인가?

"에라, 공짜로 재워주고 밥도 주겠다는데 뭐 어떻다고. 귀찮은 일 의뢰하면 안한다고 하면 그만 아냐."

미적미적 방으로 들어간 나다는 살그머니 사제의 눈치를 보았다. 리오는 말없이 나다에게 식탁을 차려주고 두꺼운 책만 들여다보았다. 나다는 빵을 입에 구겨넣으면서 리오를 슬금슬금 살폈다. 가만 보니 책을 보는 것이 아니다. 한참이 지나도 같은 자리만 쳐다보고 있다. 페이지도 넘기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자 리오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상당히 긴장된 미소였다. 책을 덮는다. 나다는 리오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지난밤에 못한 이야기를 마저 하려는 것이다.

"내일합시다."

나다의 짧은 말에 리오는 의자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엉거주춤하니 그를 보았다.

"저 빌어먹을 물건들을 다 씻고 무기상가서 말싸움하느라 지금 녹초라구요. 인자하신 사제님, 내일 얘기합시다. 예?"

리오는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 나다는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나다는 그 다음날부터 식사만 하고 바로 잠만 잤다. 무어라 말을 붙일 여유가 없었다. 리오는 새벽에 간략히 예배를 보고 경전을 읽거나 계속해서 기도했다. 처음엔 초조해 보였으나 나중엔 체념한 듯 조용한 얼굴이다.
리오가 잠시 방을 나가있는 동안, 나다는 침대위에서 뒹굴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밥만 축내고 잠만 자는데 저놈의 사제는 참을성도 많지. 이정도면 포기하고 제가 알아서 떠날만도 한데...'

달칵, 리오가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나다는 재빨리 등을 돌려 누웠다. 타박타박 조용한 발소리가 등뒤에서 멈추더니 다시 멀어진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리오는 창밖을 쳐다보며 앉아있었다.

'물건도 다 팔았겠다, 쉴대로 다 쉬었겠다. 에라, 적어도 먹여준 밥값은 하지 뭐. 얘기만 들어주고 튀면 돼지.'

나다는 슬금슬금 리오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리오를 쳐다봤지만 그는 창밖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한참 말이 없자 나다는 무료해져서 자신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 보이는 마을의 거리는 왠지 시끌시끌했다. 사람들은 흥분되고 밝은 얼굴로 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다는 놀라서 밖을 쳐다보았다.

"뭐하는거야? 무슨 축제라도 여는 건가?"

"일년에 한번 있는 브레일의 축제라는군요."

고개를 돌린 리오는 빙긋 웃었다. 그러나 나다는 코방귀를 뀌었다.

"흥, 미친 마을이군. 전쟁터 한가운데서 축제?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돌았군."

리오는 창틀에 엎드린채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전 굉장히 보기 좋은데요 뭘. 항상 긴장만 하고 산다면 사람이 어떻게 견디겠어요. 이분들은 낙천적인 분들인가 봐요."

그리고 두사람은 다시 말이 없었다. 리오는 지금이 나다가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 - 차분히 말을 들어줄 마지막 기회란 것을 알고 긴장해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답답해진 나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리오는 몸을 일으켜앉아 똑바로 앉더니 나다를 보았다.

"나다, 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정말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으로만 보이나요?"

나다는 한손을 뺨이 찌그러지도록 괴고는 리오를 쳐다보았다.

"처음봐요."

"...."

리오는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 억지로 웃으면서 얼굴을 들었다.

"그럴수도 있어요. 뭐랄까 좀.. 일방적이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도 압시다.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수가 없어!"

리오는 또 침묵하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답답해진 나다는 신음소리 한번 내뱉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만 작별하고 가야겠다고 나다가 생각할 즈음 리오가 급히 말을 꺼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전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의 슬픔과 기쁨을 느꼈었지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도 저를 몰랐지만, 항상 그에 대한 느낌은 저와 함께 있어왔습니다."

나다는 또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사제의 소리는 귓등으로 흘리고 다 포기한 채 이층창문 아래로 보이는 거리만 무심히 바라보았다.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제의 이야기는 옆에서 계속 들려왔다.

"어릴 적 저를 귀여워해주셨던 대사제님께서는 저의 그런 느낌을 부정하지 말라고 해주셨죠. 그는 나의 수호천사일수도 있고, 어쩌면 신께서 함께 해주시는지도 모른다구요. 하지만 제가 받은 느낌은 제가 느끼는 '그'가 아주 평범한 보통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기쁨보다는 깊은 슬픔과 고통이 느껴질 때가 더 많았거든요."

미친사제 맞군. 나다는 손가락으로 의미없이 창틀을 도닥거리면서 거리에 지나가는 늙은 조랑말을 의미 없이 쳐다보았다.
그때 사제가 눈을 반짝이며 돌아봐서 나다는 깜짝 놀랐다. 사제는 볼을 붉히면서 기쁨에 가득 차서 말했다.

"그러다가 전쟁터에서 스승님을 만났죠! 그때 그분께서 제 마음속에 느껴지던 그 친구가 누군지 가르쳐주셨어요. 그분이 말씀하시길, 저의 아주 높은 차원의 영혼이 그의 친구와 이 세상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해요. 그와 저는 오랜 세월 영혼을 나눈 친구였다고 합니다. 제가 마음속에 느끼는 그의 마음은 바로 그 영혼의 친구였던 거지요."

얼굴을 우그린 나다는 혼자 기쁨에 가득 차 있는 사제를 반쯤 감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완전 미친놈이야. 미친놈이 미친놈을 만나서 더 미쳤나보군. 저런 미친 사제가 사제라니 웃기는 노릇이야. 미친놈이 남의 마음까지 읽어대니 더 위험한 놈이야.'

기쁜 얼굴로 말하던 리오가 갑자기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는 작아진 목소리로 고개를 숙인채 당황한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를 만나면, 못 알아 챌 리가 없다고 하셨어요. 왜, 왜냐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알 거라고 하셨거든요. 전 신기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됐어요."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서 나다는 비죽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리오는 나다의 어깨를 잡더니 고개를 젓고 간절히 말했다.

"내게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상대가 당신이니까 가능한 겁니다. 미친것도 아니에요. 왜 날 싫어하지요? 난 당신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나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만있자, 지금까지 미친 사제가 한말을 종합해보면...'

갑자기 나다는 소름이 좍 끼쳤다. 나다가 리오를 멀거니 쳐다보며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우자 리오는 기쁜지 계속 얘기했다.

"사실, 기뻤어요. 당신이 여자가 아니라서요. 전 사제니까, 영혼을 나눈 친구가 여자라면 상당히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나다는 여전히 멍해진 채로 눈만 크게 떴다.

'뭐라고?'

"난 당신이 나와 같은 사제일거라고 상상했었어요. 그렇지만 그 동안 느껴진 슬픔과 절망으로 봐서는 기사거나 용병일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사람을 죽이는 자는 큰 슬픔을 항상 갖고 있는 법이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다는 리오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무슨 수작이야?"

"...."

리오는 슬픈 눈으로 나다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한눈에 알아보듯이 당신도 날 알아볼줄 알았는데... 아니, 아니에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날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해요."

"이제 할말 다 마쳤나?"

싸늘하게 말을 마친 나다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푸대를 어깨에 진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힘없이 창가에 앉아있던 리오는 나다의 거친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귓전에서 사라지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밖으로 나가 두리번거리던 리오는 축제를 위해 모여있는 마을사람들 사이로 쏙 들어가버리는 나다를 보고 급하게 쫓아갔다.
나다도 자신을 뒤쫓아오는 리오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신경쓰기조차 귀찮아졌다.
리오는 자신을 싫어하는 나다에게 그동안 충격을 받은 상태였기에 그동안 식사도 잘 하지 못해서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놓치면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을것만 같아 무엇에 홀린 사람마냥 그를 찾아 뛰어갔다.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브레일의 모든 사람들이 좁은 광장으로 뛰쳐나오자 많이 복작거렸다. 나다의 뒷모습을 놓친 리오는 속이 타서 주변들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사탕과자를 파는 아주머니 앞에서 입맛을 다시며 서있는 나다를 발견했다.

'사먹을까 말까. 에이, 과자먹을 나이는 지난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저놈의 사탕이 땡기냐. 그래도 돈 아까운데...'

"두개 주세요."

나다는 불쑥 나서서 과자를 사는 리오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과자 하나를 내밀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벨도 없나? 갈수록 수상한 녀석이다.'

음악과 아이들 웃음소리가 난장판인 마을 축제를 보면서 나다는 후우, 한숨을 쉬었다. 며칠전 시체더미들 가운데서 뒤적거리고 다닌 것이 꿈같이 아득하다. 여기 뛰어 노는 아이들 또래만한 작은 소년기사를 묻어준 일은 더욱더 그렇다.
게다가 나다의 눈앞에서는 사탕과자를 손에 쥐어 내민 채 초조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정식사제님이 있는 것이다. 왠지 우스웠다.
나다는 어깨를 으쓱하며 사탕과자를 집었다. 곧 울듯했던 리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갑자기 나다를 껴안고 와아악 소리를 질렀다. 나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윽!"

"고마워요! 고마워요 나다!"

자신의 이런 이해할수 없는 행동 때문에 나다가 더욱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리오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다는 리오를 조용히 밀쳤다.

"진정하쇼 사제님. 뭐 좋수다. 이렇게 정성인데 내가 봐주지. 그래, 원하는 게 뭐요? 조건만 좋다면 거래할 마음이 드는데?"

리오는 웃다가 말고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나다를 바라보았다.

"...예? 거래요?"

나다는 사탕과자를 쭉쭉 빨면서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런 거 아뇨. 이상한 얘기 꾸며내지 않고도 당신 도와줄테니까 더 이상 이상한 거짓말은 하지 말아요. 얼마나 위험한 일이길래 그래?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어린애같은 이야기를 꾸며대다니. 잘못짚었어."

"예...에?"

리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나다는 유창하게 말을 쏟아냈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미친사람도 많이 봤다우. 하지만 댁처럼 고상하게 미친사람은 처음봤어. 그런데 아무리 봐도 미친건 아닌거 같아. 그럼 결국 결론은 그거 아니야, 내가 턱 보기에 무식한 부랑자로 보이니까 황당무계한 그런 이야기로 날 홀려서 댁을 위해 뭐든지 하게끔 바보로 만든 다음 뭐 시키려고 그런거지? 당신같이 어리버리하고 순진해보이는데다가 항상 웃는 얼굴인 사람이 실은 가장 무서운 족속들이란건 그동안 당해봐서 안다구. 당신 생각만큼 난 무식한 녀석이 아니야. 아무리 진심인척 해도 안속아넘어가. 어쨌든 어떤 일인지 구체적인 얘기는 이따가 들읍시다. 하지만 아까처럼 영혼을 나눴네 마음을 느끼네 하는, 지나가는 지렁이 하품할 이야기 따위는 더 이상 하지 말아요. 무슨 속셈인지 확실히 말하라구. 알았지?"

사탕을 쭉쭉 빨면서 나다는 축제나 즐기자 싶어 앞으로 걸어갔다. 리오는 실망한 얼굴로 나다의 뒷모습을 보다가 투벅투벅 따라갔다.
나다는 열심히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흠. 미친소리를 해대긴 하지만 이 녀석과 같이 있는게 나쁘진 않을 거 같아. 적어도 돈은 있잖아? 숙박비랑 식비가 해결될 거야. 뭐, 목숨이 간당거릴만큼 어려운 일을 시킨다면야 그냥 도망가면 돼지. 낌새 이상하면 토끼면 된다구. 그러고보니 저 녀석은 굴러들어온 봉이군. 훗훗훗.'

만약에 리오가 한 이상한 말들이 꾸며댄 것이 아니라면, 나다는 곱게 미친 녀석 적당히 봐주면서 편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나다의 추측대로 무언가 계약할 것이 있어서 저런 것이라면, 대강 응수해주다 낌새봐서 도망치면 된다.
하하하하하하하
갑자기 들려오는 우렁찬 웃음소리에 나다의 잔머리가 멈추었다. 벅적거리는 사람들의 소음을 모두 압도하는 웃음소리다.
하하하하하하하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웃음소리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다는 멀뚱하니 사람들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역시 어리둥절하기는 리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지요? 누군데 저렇게 모여들지요?"

리오가 궁금한 듯 나다에게 물었지만, 나다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놈의 미친 사제가. 내가 어떻게 아냐?'

그때 리오는 볼을 부풀리고 나다를 돌아보았다.

"미쳤다는 소리 좀 그만해줘요. 난 안 미쳤어요!"

나다는 허, 하다가 속으로 불퉁거렸다.

'너나 내 속 읽지 마라, 무지하게 기분 나쁘단 말이다!'

그리고 나다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리오는 사람들을 잘 헤쳐나가지 못하고자꾸만 뒤처졌다. 나다는 짜증을 내고는 다시 뒤돌아가 리오의 손목을 잡은 뒤 사람들을 마구 헤쳐서 앞으로 나아갔다.
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거의 천둥소리 비슷했다. 앞으로 나아가 보니 왠 머리가 벗겨진 뚱뚱한 노인이 커다란 푸대를 등에 짊어지고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웃음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기가 막힌 나다는 피식 웃음까지 흘렸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담. 저놈이 전쟁터 가운데서 축제를 여는 미친 마을의 미친놈 대장인가 보군. 아마 이 사제녀석도 이 마을에 오염돼서 미친건지도 몰라. 헉, 그럼 나도 미치는건가?'

복잡하게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나다의 손을 잡고 있던 리오가 갑자기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다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손을 팍 뿌리쳤다. 이런 미친놈, 속으로는 어이없어 욕을 했지만 리오는 빙글 웃을 뿐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미친 듯이 웃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까르르르륵
아이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치 파문처럼 웃음이 번져나갔다. 마치 돌맹이가 던져 생긴 조용한 연못 위의 파문처럼.
마을사람들은 대머리 노인을 정점으로 점점 도미노처럼 웃어나갔다.
으하하하 으헤헤헤 기긱 쿠크크큭
온갖 종류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안되겠는데. 이 사람들, 갑자기 게거품 물고 덤비는 거 아니야?'

나다는 무서워졌다.

'아니면, 외지사람은 잡아먹는다거나... 맞아! 이방인은 리오하고 나 외엔 없었어. 혹시, 혹시 몬스터 마을? 그래서, 이건 축제가 아니고 우릴 잡는 파티 아니야? 으으윽!'
상상은 점점 하늘 높은 줄 모른다. 나다가 갑자기 몸을 휙 돌려 도망가려는데, 리오가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나다는 리오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웃고있었다.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지요?"

그러더니 하하 웃었다. 리오의 웃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갓난아기의 웃음처럼 티없이 맑다. 마치 그 순간에 기쁨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왁자한 가운데서 나다도 왠지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야. 난 왜 무엇을 무서워하는 거지? 그냥 웃는 것뿐인데. 참 우습네. 아깐 리오한테 왜 그렇게 화냈지? 저놈이 미쳤건 말건, 숙박비도 식비도 다 공짠데 이런 행운이 어딨냐구. 생각해보니 그동안 귀족처럼 대접도 잘 받았잖아? 완전 봉잡은거지! 하하? 하하하하!'

나다는 어느새 웃고 있는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법에 걸린 걸까?
이렇게 나다가 웃을까 말까 갈등하고 있을 사이 벌써 다른 이들은 실컷 웃고는 조용히 그 대머리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빙글빙글 웃던 노인은 한 아이를 목마를 태운 후 천천히 걸어갔다. 사람들은 무엇에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라간다. 그들은 여전히 떠들며 웃고있었다.
리오도 역시 홀린 듯이 따라가려고 했다. 그때 나다가 뒤에서 덥석 손을 잡았다.

"당신 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

나다의 외침에 리오는 문득 정신이 든 듯 화들짝 놀랐다. 그는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축제의 행진이라도 이끌 듯 마을 밖으로 걸어가는 노인을 쳐다보고는 다시 나다를 쳐다보았다.

"무슨 새로운 놀이 같은 건 아닐까요? 축제의 하이라이트 같은 거..."

리오가 아이처럼 미소지으면서 말하자 나다는 바닥에 털벅 쓰러질 뻔했다. 그리고 리오의 앞에 바짝 서서 침을 튀기며 외쳤다.

"이봐, 나도 왠간히 돌아다녀 봤지만 이런 뭐 같은 광경은 처음이라구! 다들 뭐에 홀린 거 아니야? 이건 사악한 술수같은 걸꺼야. 최면같은 거 말이야!"

리오는 멀뚱히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악한 술수라고 느껴지지 않는 걸요. 아까 웃을때도 모든 근심걱정 괴로움 다 사라지고 굉장히 기쁘고 마음이 가벼웠어요. 사악한 술수일 리가 없어요."

이렇게 나다와 리오가 옥신각신 하는 동안 노인이 멈추어섰다. 그리고 그는 나다와 리오를 쳐다보았다.
나다는 섬뜩해서 온몸이 굳어지는 듯 했지만 리오는 웃으면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리오를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껄껄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축제의 행진으로 아는지 웃으면서 신나게 뒤를 따라간다. 리오도 따라 가려고 하는데 나다가 확 잡아챘다.

"뭔가 이상해. 이봐요 사제양반. 여관에 중요한 거라도 두고 왔소?"

"아까 당신을 쫓아 급히 나오느라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어요."

"그럼, 돈지갑도?"

"예."

"...당신 잘 뛰어?"

"아니오?"

멀리서 가던 노인이 다시 뒤를 돌아본다. 그의 얼굴은 왠지 재촉하는 듯했다. 나다는 노인을 따라가려는 리오의 손목을 잡아끌고 여관으로 달렸다. 리오는 영문도 모른 채 나다를 따라 달려간다.
항상 사지를 넘나들며 어렵게 살아온 나다는 직감이 꽤 발달된 편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는 빨리 이 이상한 마을과 이상한 사람들을 떠나야된다고 생각했다.
나다는 정말 느릿거리는 리오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며 뛰었다. 둘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여관으로 달려갔다. 나다가 헐떡이며 여관까지 달려올만큼 걱정한 것은 앞으로 한동안 두사람의 숙식을 해결해줄 리오의 돈이었지만 리오는 그것보다는 책이나 촛대 등 나다가 볼 때 하등 중요할것도 없는 것부터 챙겼다. 그 꼴을 보던 나다는 제대로 물건을 챙기지도 못한 리오의 손을 잡아채고 리오의 돈지갑을 그의 주머니에 꼭꼭 쑤셔넣어준 뒤 여관 밖으로 나와 마구 뛰어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출발한 마을사람들이 벌써 저만치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나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외쳤다.

"젠장! 어떻게 된 거야! 다들 날아가기라도 한 거냐?"

나다와 리오는 기를 쓰고 사람들을 쫓아갔지만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그들은 더욱더 멀어졌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 엄습해오는 거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구구구궁...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숲에서는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올랐고 마을의 가축들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신이여!"

리오가 그 말을 외친 순간, 쿠우우우웅... 거대한 파공음과 함께 마을전체가 땅 밑으로 쑥 꺼져들어갔다. 바닥이 과자처럼 부서진다. 나다와 리오는 이미 마을은 벗어나 생매장될 위기는 벗어났으나 마을 전체가 가라앉은 파장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마을의 바닥은 쑥 꺼져 들어가고 거기에서 한줄기 검은 연기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거대한 바위의 파편들이 공기를 찢으며 두 사람의 옆을 스쳤다. 피이잇 공기를 찢으며 날아오는 돌조각의 소리가 쉴새없이 들려온다. 리오는 돌들이 마구 날아오자 재빨리 나다의 위에 엎어졌다.

"아악!"

돌에 맞은 리오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쥐어싼 손 사이로 진득한 피가 흐른다. 나다는 자신의 얼굴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자 그만 질려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하늘을 바라보게 된 나다는 마을에서 솟아오른 그 '검은 연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다.

"이런 젠장!"

나다의 울부짖음같은 소리에 리오는 신음하면서 몸을 움직이려 했다. 쏟아지던 돌은 이제 멈추었기에 리오는 몸을 돌려 나다가 벌벌 떨며 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에는 거대한 검은 용의 반신이 떠올라있었다. 용은 길쭉한 모양이었는데 반신은 아직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몸을 움틀거리고 있었다.

"아아.."

리오도 공포에 질려 신음했다. 그 때 용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해졌다. 그 붉게 빛나는 한 쌍의 눈은 분노에 충천해있었다. 검은 용은 길게 외치며 부서지는 대지를 대하인양 헤쳐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콰가가가각!
땅은 종잇장처럼 찢어진다. 순식간에 나다와 리오가 디딘 땅이 울리고 부서지려 했다.
리오는 나다를 꼭 안고 고개를 숙였다. 핏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그의 흰 옷깃을 더럽힌다. 나다 역시 자신도 모르게 리오를 꼭 껴안고 푸들푸들 떨며 눈물을 흘렸다.
쿠과과과강!
거대한 굉음이 울린 뒤, 자욱한 먼지가 뭉게뭉게 하늘을 메웠다. 서로 부둥켜안고 몸을 움츠렸던 리오와 나다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눈앞의 먼지 가운데 서있는 흰 잔영이 보인다. 환상인가 싶다.
그러나 환상이 아니었다. 리오와 나다의 앞에 서있는 자는 큰 키에 긴 은발머리, 먼지바람에 어울리지 않는 빛나는 백색 옷을 입은 청년이었다. 그의 뒷모습은 산과 같이 흔들림이 없었다.
발 밑에는 돌진을 저지 받은 대지의 갈라진 상처가 흔들리고 있다.
그는 뒤를 돌아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나다는 그의 눈을 보았다. 흰눈? 아니다. 거의 옅은 회백색의 눈은 탈색된 고양이의 눈동자와 같다. 청년은 두 사람을 사납게 노려보더니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 용은 어떻게 된 걸까? 나다와 리오도 긴장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검은 연기를 사방에 퍼트리며 하늘로 솟아오른 검은 용은 창공에서 거대한 원을 그렸다. 용이 움츠리자, 백안의 청년은 소매를 들어 두 사람의 머리위로 뻗었다.
츠바바바밧!
용이 움츠린 몸을 갑자기 뻗어버리자, 용의 몸에서 검은 재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사위가 검게 자욱해진다. 그러나 나다와 리오는 맹렬히 쏟아지는 잿가루에 얻어맞지는 않았다. 백안의 청년이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오가 고맙다고 말을 하기도 전에 자욱한 재들은 금새 잦아들고, 그 너머로 거대한 용의 신형이 하늘에 드러났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용이었다.
그 용은 끔찍하게도 나다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다는 벌벌 떨며 차마 입 밖으로는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젠 꼼짝없이 죽은 거야!'

그러자 나다의 속을 모두 여과 없이 읽어버리는 리오는 그를 꼭 안아주었다. 몸집이 작아 리오의 품에 폭 안겨버린 나다는 평소같으면 욕을 바가지로 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 잠자코 있었다. 나다가 리오를 쳐다보니 초탈한 듯한 얼굴이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만 같았다. 나다는 그런 그의 무기력한 모습이 보기 싫었다. 나다는 뭔가 희망을 가져보기 위해 백안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자가 산다. 나다가 떠돌면서 체득한 것이다. 어쨌든, 이 백안의 청년은 땅이 갈라지는 것도 막아주었으니까.
백안의 청년은 소름끼치게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런 눈초리를 많이 겪어본 나다는 저런 재수 없는 놈에게 희망을 가져야 되는지 갑자기 열이 받았다. 백안의 청년은 별로 두 사람을 달갑게 여기는 것 같지 않다.
청년은 갑자기 손바닥을 펴서 두 사람을 향해 뻗었다.

"으악!"

갑자기 광풍이 불어 두 사람은 공중으로 붕 날아갔다.
그네 타는 기분
쑥 내려갈 때의 그 재수 없는 느낌...

'대지는 자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한단다.'

나다의 머릿속에는 문득 평민학교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누구더라, 그 여선생..

'이럼 안돼! 죽을땐 과거가 떠오른다는데..!"

꽝!
나다는 엄청나게 자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대지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포옹을 하면서 그녀의 강인한 가슴에 떡 들어 붙었다.
웅성웅성, 사방에 웅성거림이 들린다. 나다는 시야가 부옇게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리오는 날아오를 때부터 이미 의식이 없었다.



왠지 몽롱한 달빛이야.
그리고 산속이다. 검은 하늘에 흰 달, 그리고 산속의 작은 공터.
음, 많이 떠돌아다녀 봤지만 나다 이십여 년 인생에 저런 곳은 본적이 없는데. 저기가 어디지? 모여있는 사람들도 뭐 하는 놈들인지 생소해. 다 검을 들고 있는 거 보니 살벌하구만.
그 중 두 사람이 서로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둘 다 검을 들고 있어. 그리고 한 켠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고.
누굴까? 모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인데...
난 멀리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지만, 의외로 하나하나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여. 달이 밝아서 그런가?
잘 들어봐 리오. 저기 마주 선 사람중 한 명은 긴 검은머리에, 밤이라 그런지 더욱 하얗게 보이는 옷을 입고 있어.
더 자세히 볼까? 그는 검을 들고 있어서 그런가 굉장히 차가워보여. 그리고 피부가 말이지.. 밤이라 그런지, 마치 잘 다듬어진 하얀 조약돌같아. 야, 저렇게 잘생긴 녀석은 처음 본다. 짙고 가는 눈썹에, 우수에 젖은 검은 눈동자라. 흐, 여자였으면 완전 뿅 가겠는데. 사내자식이라 유감이군.
하여간 저렇게 아름답게 생긴 사람은 처음 보는데. 진짜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군.
그리고 상대편 녀석은.. 뭐, 옷이 좀 누덕거리네. 천을 여러 겹 덧친 옷이야. 모자도 썼구만. 빙글거리는게 무슨 장난꾸러기 같아. 되게 등치도 크네. 완전 근육뎅이.. 흐, 근데 머리가 빨개. 눈동자도 붉은 기가 도는 갈색이구. 근데 웃으면서도 좀 긴장돼 보이네?
두 녀석이 싸울 건가...?
한켠에 왠 녀석들이 모여있어. 근데 대장같아 보이는 놈이.. 음, 보통녀석이 아닌 거 같아. 저런 녀석한테 잘못 걸리면 국물도 없을걸. 모여있는 녀석들의 대장인거 같은데.
지금 상황이 말이야, 저 두 사람은 대장 놈의 포로인데.. 대장 놈이 두 사람에게 싸움을 시키려는 거야. 이기는 사람이 살고 지는 사람은 죽는 걸로.. 거참 악취미네.
둘이 싸우기 시작했어.
아.. 잠깐 있어봐, 싸우는 중이야. 이야, 멋진데? 꼭 춤추는 거 같아.
크으, 어두운 숲 속 청명한 달빛, 은가루를 뿌리며 휘어도는 두 사람! 어디서 이런 멋진 광경을 보겠냐? 살벌하다는 느낌보다는 아름답다는 느낌마저 드는데...
어, 근데 뭔가 이상해. 저 흰 옷 입은 친구가 말이지.
얼굴이 좀 이상해. 뭔가 고민하는 거 같아.
아!
그는 고민하고 있어. 리오, 그는 아주 슬픈 사람이야.
그는 모든 것을 잃었어. 가족, 친구, 사랑하는 여자까지.
그에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그래서 그는 고민하는 거야. 어차피 미련도 없는 목숨, 왜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지. 이겨봤자, 저 대장 놈에게 고초만 당할텐데.
음. 그건 다 핑계야. 그는 살고싶은 마음이 애초에 없었던 거야.
상대방은? 이런, 저 녀석은 아주 실력이 뛰어난 녀석이야. 녀석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지. 자신이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착각이지. 누더기 녀석도 대단한 녀석이지만, 흰옷녀석은 이미 그 경지를 넘어섰거든.
누더기 녀석은 한 공격 한 공격 자신감에 차서 흰옷을 궁지에 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흰옷은 그저 수심에 찬 얼굴로 기계적으로 검을 쳐올릴 뿐이야.
흠, 흰옷은 누더기의 얼굴을 보더니, 왠일이냐? 누더기의 친구와 친한 사람들의 얼굴을 물 흐르듯이 떠올려 보고 있어. 이게 뭐지? 음 하여간..
저 흰옷녀석 차가워 보이는데, 감상에 젖어있구나. 아이구 이런,
누더기녀석이 승부를 걸어왔어.
시간이 아주 느릿..하게 흐르는데.
누더기녀석의 검이 천천히, 천천히 다가오는걸 보면서, 백의검사는 드디어 결심했어.
어응? 그는 검을 던졌어! 검은 멀리 떨어져 땅에 박혀버렸고, 흰옷의 그 친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약간 젖혀버렸어. 목이 무방비로 드러나잖아!
누더기도 놀랐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뻗친 검을 어쩌지 못해! 모든 건 순간적인 일이야. 사방은 천천히 돌고 있어...! 대장녀석은 놀란 듯이 두 사람사이로 날라올랐지. 그는 당연히 백의검사가 이길 걸로 여겼던 거야, 그놈도 실력을 아니까 말이야. 그런데 백의검사가 검을 던져버릴거란 건 예상을 못한 거지!
어떻게 된거지? 장면이 여기서 멈춰버렸어!
..어? 비가 오네?
왠지.. 뜨뜻하고..
지린 냄새가 나는...
.....



"사제 형! 누더기형이 깼어! 우헤헤헤!"

나다는 숨이 막혀서 푸푸! 입안에 들어간 빗물(?)을 뱉어내며 깨어났다. 그의 귓전에 걱정스러워하는 리오의 음성이 들렸다.

"나다, 정신이 듭니까? ..미크,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어쨌든 깼잖어요, 씨잉..."

미크라고 불린, 한 열살 될까말까한 꼬마아이 하나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눈이 반짝이는게 엄청나게 신나있다. 미크는 기절한 나다의 얼굴에 오줌을 갈긴 것이다.

"야 임마!"
미크는 덤벼드는 나다를 피해 리오의 뒤로 쏙 숨어버렸다.

"우씨.. 지린내.. 우엑!"

그러나 나다는 곧 욕설이 쏙 들어가버렸다.
쿠아아아앙!
크가가가각!

"이게 뭐야?"

엄청난 굉음이었다. 나다가 고개를 돌리자, 멀리 마을이 있던 자리엔 산들이 부숴지며 붉은 용과 흰 용이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다는 리오에게 물어보았다.

"야, 리오, 저 뻘건 거는 아까 봤지만, 저 흰 거는 뭐야? 어어?"

나다는 깜짝 놀라 리오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까 돌에 맞은 탓에 리오는 머리에 피투성이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부어 올라 보기에도 끔찍했다.
리오는 약간 의아한 얼굴로 나다를 보았다. 자다 깨서 그런건가, 나다는 리오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말투도 존대와 하대가 섞인 평소의 삐딱한 말투가 아니었고, 친구에게 말하듯 거리낌없이 말을 놓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이 사제양반'이라던가 '사제 나으리'라는 식으로 부르지 않았던가.
나다는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꿈을 꿀 때 리오를 굉장히 친근하게 느꼈다. 그래서 잠에서 깬 지금까지도 리오를 친근하게 부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이야 리오가 알수 없는 것이지만, 단지 나다가 자신을 친근하게 대해준다는 것이 몹시 기뻤다. 그는 빙긋 웃으려다가 얼굴의 찢어진 상처가 아파 저도 모르게 찡그렸다.

"나다, 우리를 안전한 마을 사람들 쪽으로 이동시켜 주신 분이 바로 저 백룡이시라고 해요. 인간으로 변신한 모습이었죠."

"뭐? 그 재수 없는 녀석이 백룡이었대?"

나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크가 나다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쥐어뜯었다.

"뭐야? 우리 백룡님을 욕하는 거야?"

나다는 화가 치밀어서 꼬마를 패대기쳤다. 미크는 떠나갈 듯이 울어댔다. 나다는 꽥 소리를 쳤다.

"이 간 큰 꼬마야, 이런 상황에서 장난칠 마음이 드냐? 이 미친 꼬마야!"

리오는 엉엉 우는 미크를 품에 안고 나다를 보면서 난처한 듯 말했다.

"나다, 미크는 부모가 없는 불쌍한 아이에요. 조금 버릇이 없어도 좀 이해해주세요."

나다는 오히려 커다랗게 외쳤다.

"야! 이타냐에 부모 없는 애새끼들이 한둘이야? 어디서 이게 까불어?"

미크는 리오의 품에서 나다를 보고 뭐라고 중얼중얼 욕하더니 혀를 낼름 내밀고는 리오의 품으로 머리를 쏙 파묻었다. 나다가 다시 때리려 하자 리오가 몸을 돌린다. 그리고 나다에게 말했다.

"나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지 않아요?"

나다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멀리서 두 용이 피통 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풀을 뽑아 질겅질겅 씹는다. 리오는 조심스럽게 나다를 살펴보더니 미크를 안고 옆에 앉았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모두 절벽 끝에 가맣게 모여들어 한 방향을 초조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같이 "아아..!"하고 숨을 죽이다가, 어떨 땐 "아!"하고 기쁨의 환호를 내지른다. 절벽에 몸을 위험하게 내민 수많은 사람들은 한꺼번에 합창이라도 하듯 탄식을 내뱉았다.
한 여자애가 훌쩍였다.

"내 인형이 못나왔어요.. 히잉.."

그러자 한 마을사람이 아이를 위로하면서 말한다.

"괜찮아, 백룡님이 저 나쁜 용을 물리치시면 우린 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나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왠지 국가에서 실시하는 공익광고를 보는 것 같았다. 연극 시작하기 전에 잠깐 하는 촌극... 한 어린 배우가 운다. 그리고 한 남자배우가 나와 과장되게 커다란 눈썹을 단 얼굴을 실룩이며 말하는 것이다.

"괜찮아, 국왕폐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꺼야! 폐하 만세!"

나다는 이런 광경을 상당히 한심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정이래? 이야기 좀 들었냐 리오?"

나다의 말투는 거칠었지만 리오는 그의 마음의 벽이 사라진 듯 하여 기뻤다. 갑자기 말투가 바뀐 것은 영문을 알수 없었지만.
사실 나다도 정신이 맑아진 후 리오에 대한 자신의 말투가 그렇게 된것에 어색함을 느꼈다. 하지만 다시 말투를 싹 바꾸는것도 우습고 해서 아예 막나가기로 했다. 사제고 뭐고 알게 뭐야,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게다가 미쳤잖아!

"이 마을이 전쟁터 한가운데서도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던 것은 백룡의 가호 때문이었다고 해요."

"백룡의 가호?"

리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래요. 참 희안한 일이죠. 신룡이 수호하는 마을이라.. 그리고 마을 축제때 크게 웃으신 분있죠? 저분이요."

리오가 가리키는 손끝을 보니 사람들을 마을에서 끌고 나온 덩치 큰 대머리 노인이 나무 아래 앉아 눈을 감고 그린 듯 조용히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나다를 실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리오는 그 노인을 부드러운 눈으로 보다가 나다를 보고 설명을 이었다.

"저 분은 마을사람들이 신룡의 사자라고 알고 있더군요. 말씀은 없지만 정기적으로 마을에 오셔서 크게 웃고 가셨대요. 그러면 마을사람들도 모여서 한바탕 웃었다나요. 그 웃음에는 신기한 힘이 있어서, 그렇게 웃고 나면 마을사람들의 서로간의 친분도 돈독해지고 여러 가지 갈등들도 저절로 풀렸다고 해요. 그래서 저분이 오시는 날은 다들 축제를 연다고 합니다. 한해를 무사히 보냈다는 증표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저분이 이렇게 해마다 나타나시는 것은 벌써 몇 백년 째라고 합니다."

나다가 입을 벌린 채 황당해 하자 리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사실 저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마을 분들이 많이 하셨어요. 미두란군이 마을로 진군하는데 갑자기 그들이 마을을 발견 못하고 떠난 적도 있대요. 그리고 이타냐군이 마을을 점령하고 식량을 모두 가져가려 할 때 갑자기 흰눈의 청년이 나타나서 그들을 쫒아버렸대요. 그리고 병사들은 마을을 떠나고 나서 모두 몰살을 당했다더군요. 마을사람들은 멀리서 그들을 살육하는 흰 용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은 후엔 미두란 군이나 이타냐 군이나 모두 이 마을을 꺼렸대요. 마을을 해치면 자신들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대가를 받았으니까요. 이 마을의 백룡에 대한 전설은 몇 백년을 이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음....."

나다는 깊게 신음했다. 그냥 소문으로만 들었다면 미친소리라고 치부해 버렸겠지만 막상 상상 속에서나 존재한다던 용들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근데 이건 무슨 소동이래? 저 용들이 왜 싸워?"

리오는 고개를 젓고 나무 밑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있는 대머리 노인을 쳐다보았다. 뚱뚱한 노인은 여전히 꼼짝도 앉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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